112화.
“어…… 오랜만이야. 언제 왔어?”
“한 20분 됐나?”
“뭐?”
루벤의 대답에 아셰는 이단을 흘겨보며 기가 막힌다는 듯이 반문했다.
“지금…… 온 지 20분밖에 안 된 손님이랑 그것도 응접실에서 술을 마셨다고? 무슨 손님 대접을 이렇게 해? 그것도…… 음…… 그, 그다지 가, 가깝지 않은…….”
“왜 안 가까워?”
이단은 편하게 의자에 기대앉은 채 천연덕스럽게 어깨를 으쓱했다.
“우린 구면이야. 형님 덕분에 내가 아메탄 왕궁에 들어갔다고.”
“형님?”
아셰는 어이가 없어서 더 이상 말도 잇지 못했다. 루벤이 한술 더 뜨며 말했다.
“네 남편이니 내가 형님 소리 좀 들어도 되지 않겠어? 황족한테 형님 소리 듣게 해 주다니 네가 어린 시절 내내 날 싫어했던 건 용서해 주도록 하지. 내가 예전부터 제국 싫어했던 건 어찌 알고.”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이단이 씩 웃으며 의자를 권했고 그녀는 얼떨떨한 표정으로 루벤의 맞은편에 앉았다. 아무렇지도 않게 생글거리며 세상 살가운 여동생을 가장하여 손님 대접을 하는 거야 어렵지 않았지만 그러고 싶지 않았던 것은 르엘라 생각이 나서였다.
이제 나이가 꽤 들었는데도 불구하고 루벤은 여전히 풍운아처럼 홀로 세상을 돌아다니고 있었다. 그가 그 어떤 여자도 곁에 두지 않는 이유, 그저 방랑하는 삶을 살고 있는 이유, 그러면서도 1년에 한 번씩은 아메니티에 돌아가는 이유가 모두 르엘라 때문일 것이다. 그런 슬픔을 지고 사는 사람에게 감정을 가장하고 싶지 않았다. 이제 그렇게 살지 않아도 괜찮았으니까.
“뭐, 딱히 이유가 있어서 싫어한 건 아니야. 원래 왕궁은 그런 곳이니까.”
아셰는 새초롬한 표정을 지어 보이며 말했다. 아무리 교류가 없었다고 할지라도 어린 시절 내내 궁에서 함께 지내서 그런지 나이 차이가 꽤 나지만 막상 대화를 시작하니 마냥 어렵지만은 않았다.
“네가 우려낸 차가 그렇게 맛있다고 르엘라가 칭찬이 대단했었는데.”
루벤이 피식 웃으며 중얼거렸다. 벌써 시간이 많이 지난 일이다. 그런데도 어제 일처럼 애수에 젖은 표정으로 말하다니. 아셰는 문득 서러워졌다.
“그때, 네 궁에 갈 일 없다고 단언했었거든, 이젠 네 궁이 아니니 한잔 얻어 마셔도 되겠지. 난 차 별로 안 좋아하지만.”
이단이 그녀의 머리카락을 한 번 쓸어 주며 씩 웃었다.
“저도 차 안 좋아했습니다. 그런데 아셰가 끓여 준 차는 정말 맛있더라고요. 한 번 마셔 보신 뒤에는 정기적으로 이 성에 방문하실지도 모릅니다.”
루벤의 입에서 나오는 르엘라의 이름을 듣자마자 눈물이 날 것 같아 그녀는 괜히 툴툴거렸다.
“둘 다 술을 잔뜩 마시고 나서 무슨 차를 또 마시겠다고 그래? 세상에 누가 술을 마시다가 갑자기 차를 마셔?”
그녀의 말에 루벤도 이단도 미간을 찌푸리며 동시에 대답했다.
“그게 무슨 상관이야?”
“술은 술이고, 차는 차지, 무슨.”
그녀는 한숨을 쉬며 일어났다. 찻잎을 신중히 고르고 물을 데우면서 그녀는 둘이 묘하게 닮았다고 생각했다. 궁의 둘째들은 다 비슷한가 하는 생각도 가볍게 들었다. 궁의 예법에 조금도 신경 쓰지 않는 자유분방함과 외부 문명에 대한 개방적인 태도까지. 아셰는 루벤이 이단을 궁에 들이자고 회의에서 열심히 주장했던 것을 잊지 않고 있었다. 그 회의로부터 10년 가까이 흘렀다.
이제 두 남자는 대륙의 온갖 지역에 대하여 이야기하고 있었다. 이단 역시 옛 제국 역사의 흔적을 수집하겠다며 가 보고 싶어 하는 곳이 많았고, 루벤은 정처 없이 떠돌아 이제 안 가 본 곳이 드물 지경이었다. 그녀는 황궁에서 차가운 분위기를 온몸으로 내뿜으면서 말수가 극도로 적어졌던 이단을 생각하며 살짝 웃었다. 루벤과 이야기하는 이단의 쾌활한 어조는 마치 맨 처음 만났던 열다섯 소년 같았다.
“메데스토 왕국도 가 보셨습니까? 늘 가 보고 싶었는데 내란이 심각하여.”
“안 가는 게 좋아. 거긴 혁명군들조차도 둘로 갈라졌으니까. 등신 같은 것들, ‘나의 공화주의’에 대해 해석이 다르면 리한 카드민한테 서신이라도 보내서 빌어먹을 그 문장의 뜻이 뭐냐고 물어보면 되잖아? 각자 해석이 다르다며 처싸우기는.”
메데스토라면 제국에 비할 바는 아니었으나 아메탄보다는 훨씬 큰 왕국이었다. 메데스토 역시 폴라리아의 영향을 받아 오래전부터 내란에 휩싸인 상태였다.
“리한 카드민이 그 예쁜 입으로 ‘그런 문장이 그 책에 있던가요? 기억이 안 나는데요. 졸면서 썼나 봐요.’라고 공식적으로 대답해서 거하게 엿 먹이면 정말 재미있을 텐데. 각종 권력에 미친놈들마다 ‘나의 공화주의’를 붙들고 넘어지니 아마 리한도 제정신으로 살기는 힘들 거야. 아무리 은둔한다고 해도 어떻게 정신을 붙잡고 사는지 모르겠어.”
루벤은 의자에 대충 몸을 기대고 조소를 섞어 말했다. 아무렇게나 묶은 머리, 여행에 최적화된 편안한 옷, 거친 수염, 엉망진창인 자세 등은 그를 누구도 왕족으로 보기 힘들게 했지만 눈빛만큼은 예전처럼 날카로웠다.
“초대 통령한테는 미안한 말이지만, 거기 가서 보니 혁명군이 정의라는 생각은 안 들더군. 민간인들에게 누구 편인지 다짜고짜 묻는다던데? 잘못 대답하면 그대로 죽어. 아마 오랫동안 메데스토는 지옥일 거야.”
“아메탄에게는 좋은 일이지.”
찻잔을 건네며 아셰가 냉정하게 말했다.
“국민들에게 감성적으로 설득할 여지가 있잖아. 아메탄도 메데스토처럼 될 겁니까, 하고. 어설픈 공화주의자들이 혼돈을 만들기 전에.”
루벤이 피식 웃으며 이단을 바라보았다.
“넌 왜 얘랑 결혼했냐? 초대 통령의 짝이 할 말은 아닌 것 같은데.”
“그러게요. 지금 생각하면 조금 홀린 것 같아요.”
“원래 얘 별명이 어릴 때부터 여우였어.”
이단이 뭐라고 대답하기도 전에 루벤은 차를 한 모금 마시고 옅은 한숨을 쉬었다. 그가 착잡하다는 듯이 눈을 가늘게 떴다.
“르엘라가 했던 말 중 역시 틀린 말은 없었군.”
아셰는 어깨를 으쓱했다. 루벤이 킬킬대며 그녀에게 말했다.
“여기다 찻집 한번 차려 보는 건 어때? 나도 레르가 호수를 보러 왔다가 너희 부부가 이사 왔단 얘기를 듣고 우연히 들른 거니까. 경관 좋기로 유명한 곳이니 아마 다니엘보다 부자가 될 수도 있겠는걸.”
한 번도 못 해 봤던 생각이라 아셰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안 그래도 종종 이단의 수집품들을 보러 오겠다는 서신이 학자들에게 오고 있었다. 생각보다 손님을 좀 많이 받게 되겠구나 싶었는데, 여기서 그녀도 잘할 수 있는 일을 한다면 또 다른 의미로 인생이 재미있어 질 것 같았다.
“온 김에 그럼 저녁도 같이 먹고, 며칠 묵었다 가.”
인생은 모를 일이었다. 아셰는 자신이 루벤에게 이런 제안을 하게 될 날이 올 것이라는 생각을 단 한 번도 해 본 적이 없었다.
“며칠은 됐고, 오늘밤만 신세를 지도록 하지. 오랜만에 옛 회포를 풀 친구를 만나서. 네 남편은 내가 아메탄 왕궁에 영향을 끼친 마지막 사건의 주인공이라.”
“친구라니? 나이 차이가 얼마인지는 알아?”
“나이 차이 운운하는 걸 보니 아직 젊구나. 내 나이쯤 되면 새로운 사건이 딱히 생기지 않아 자꾸 과거를 살거든.”
아셰는 흥, 하고 눈을 내리깔았다. 루벤도 딱히 그녀와 회포를 풀 생각은 전혀 없는 듯했다. 아무리 둘이 생각하고 있는 사람이 같을지라도 이제 와서 신파극을 찍을 생각은 서로 없었다. 저녁을 먹은 뒤 아셰는 피곤하다며 이단과 루벤만을 남기고 일부러 일찍 방에 들어갔다.
눈을 떴을 때 루벤은 이미 떠난 상태였다. 이렇게 새벽같이 그녀에게 인사도 하지 않고 떠날 줄은 몰라서 아셰는 몹시 당황했다. 여하튼 그녀의 둘째 오빠는 늘 그녀의 짐작 밖에 벗어나 있는, 세상에 몇 안 되는 사람 중 하나였다. 그녀는 옆자리에서 늦게까지 잠들어 있는 이단을 흔들어 깨우며 말했다.
“루벤이 갔대. 대체 언제 간 거야?”
“……동틀 때.”
이단이 눈을 뜨지 못하며 중얼거렸다.
“내가 직접 배웅했어. 걱정 마.”
“그럼 밤새 너랑 술 마시다가 그대로 떠났다고?”
“……나도 말렸어. 근데 말린다고 듣는 사람은 아니던데. 네 차를 한 번 마셔 봤으니 됐대.”
아셰는 한숨을 쉬고 이단의 곁에 그대로 털썩 누웠다. 이단이 잠결에 그녀를 끌어안았다.
“밤새 무슨 얘기를 그렇게 했어?”
“네 어린 시절 얘기 좀 해 달라고 부탁했지.”
“아는 게 없을걸.”
“예상했던 그대로던데. 좀 예쁜 건 인정하지만 딱히 정이 가는 타입은 아니었다고. 그런데도 좋은 남자 만난 것 같다고 전해 달라더라. 내가 훨씬 아깝다고.”
옛날에 사이가 딱히 좋지 않았던 것을 이런 식으로 되갚다니. 아셰는 루벤이 다시 온다면 그 때에는 조금 더 따져 물어야겠다고 생각하며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이렇게 새벽같이 떠날 줄 알았더라면 아무리 르엘라 생각이 났어도 몇 마디는 더 나눌 걸 그랬다는 후회가 들었다. 이단은 그녀의 살결을 매만지며 그새 또다시 잠이 들어 있었다.
‘죽을 때까지 잊지 못할 것 같은 순간들이 있어. 시간에 밀려 사라지는 다른 기억들 속에 꼿꼿하게 자리 잡고 있는 추억. 세상의 아름다운 것들을 모두 보고 다녀도 그 순간보다 간절하지는 않아. 어쩌면 몇 개의 기억을 가지고 평생을 사는 거야.’
루벤의 쓸쓸한 말이 뇌리에 박혔는지, 이단은 설핏 옛날 꿈을 꿨다. 인생에서 가장 비참했던 날, 가장 숨기고 싶던 비밀을 제 입으로 털어놓은 날, 그녀는 그를 뒤에서 안은 채 단번에 괜찮다고 말해 주었다. 그때 그녀의 표정을 보지 못한 것이 이제 와서 아쉬웠다. 등에 느껴지던 그녀의 체온과 심장 소리, 살짝 떨리던 목소리, 둘 사이에 맴돌던 공기의 냄새까지도 그는 죽을 때까지 잊지 못할 것이다. 이단은 무의식중에 품에 안고 있는 아셰를 더 꼭 끌어안았다.
“이단.”
그녀는 그의 품을 벗어나지 않은 채 속삭였다.
“나, 꼭 잘 살 거야. 오래오래 네 곁에서.”
그의 고른 숨소리를 들으며 아셰는 오랫동안 이단의 잠든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네가 저런 쓸쓸함을 지니고 세상을 헤매는 건 싫어.”
저 없이 혼자 있을 이단을 생각하면 자꾸만 마음이 먹먹해졌다. 자신이 어떻게 옛날에 그를 혼자 둘 생각을 했는지 새삼 미안함이 느껴졌다. 무슨 일이 있더라도, 그의 곁에 끝까지 있어 줄 것이다. 그녀가 그의 품에 파고들며 마지막으로 속삭였다.
“잘 자, 좋은 꿈 꿔.”
[완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