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1화.
13
역사적으로 아메탄은 언제나 완전한 독립을 꿈꿨다. 어쩔 수 없이 제국의 눈치를 보고 그 가치관을 답습하지만 아메탄을 아메탄답게 만드는 것은 몇몇 지도자의 주체적인 혁신이었다. 어차피 작은 영토와 적은 인구 때문에 강대국이 될 수 있는 조건이 안 되는데도 어떻게든 꼿꼿하게 서겠다는 희한한 민족성이 있었다. 그 증거가 산하기관 아닌가. 제국의 신분제를 받아들이지만 자신들의 영역 안에서 어떻게든 돌파구를 마련하고 만다.
그녀는 자신이 생각한 범위의 복수를 다 끝내고 나서야 온전히 내게 왔다. 결혼식부터 그때까지 거의 5년의 시간차가 있었다. 그녀다웠다고 생각한다. 그를 죽이고 싶었다면 내게 한마디만 했어도 충분했을 텐데, 그녀의 인생은 이미 망가졌지만 내 인생은 아니라고 생각한 듯했다. 그래, 그녀는 배려의 정도도 그녀가 스스로 결정하지. 사형선고를 기다리면서도 함께 나가자 하니 고개를 젓던 그 여자는 변하지 않았다. 본인은 아니라고 하지만…… 아무리 봐도 그녀는 고고하고 독립적이기 그지없는 아메탄의 왕녀다.
내가 어쩔 수 없이, 세상에 남은 마지막 황족이듯이.
14
황궁의 지붕은 황궁에 있는 내 트라우마의 장소 중 하나였다. 그녀가 온 뒤 단 한 번도 그곳에 간 적이 없다. 이 모든 이야기의 시작이고, 내게 처음으로 ‘생각이 멈추지 않는’ 증세가 나타났던 장소. 그녀를 데려가지 않은 것은 내 사랑의 시작이 추악한 집착이라는 사실을 인정하고 싶지 않아서였다. 그러나 황궁으로 떠나기 전, 나는 자진해서 그녀의 손을 잡고 비밀 통로를 올랐다. 마지막이라고 생각하니 한 번은 가 보고 싶었던 것이다. 그녀의 모든 진실을 듣고 나서 나 자신이 많이 안정되기도 해서, 괜찮을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두 손으로 술잔을 잡고 나를 보며 웃는 그녀의 모습을 본 순간, 나는 이상한 확신이 들었다. 내가 미친 황족이 아니라 평범한 소년이었어도 그때 그녀에게 반했을 것이다. 어줍지 않은 수작을 걸면서 한 번이라도 더 보겠다고 멋있는 척 대화를 이어 나갔겠지. 그리고 그녀의 장난스러운 눈빛, 어느 정도 자신이 예쁘다는 것을 알고 있는 계산된 미소, 내면의 우울함을 매력으로 꺼내 놓을 수 있는 본능적인 감각, 센스 있게 대화를 마무리 짓고 까르르 웃어 버리는 발랄함까지 모두 오랫동안 기억 속에 남았을 것이다.
술을 흘렸다며 난감해하는 아내를 끌어안고 흰 살결에 입을 맞추며 나는 난생처음으로, 앞으로의 삶이 괜찮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평범하게 살아야지. 그렇게 되도록 노력해야지. 사랑하고, 사랑하다 보면 서운하고, 서운하다 보면 화도 내고, 화를 내다가도 다시 끌어안고. 모든 것이 시작된 이 장소에서 이야기는 오늘 하나의 원을 그려 완성하고, 처음부터 아주 새로운 방향으로 잔잔하게 뻗어 나갈 것이다.
새로운 곳에 가면 그녀의 차를 마실 거야. 그 언젠가의 전개와 똑같이. 그러나 갇힌 조그만 궁이 아니라 푸른 하늘을 머리에 이고, 방음 마법 따위 치지 않은 채 크게 웃고 떠들 것이다.
15
지나온 길은 끔찍했다. 다시 돌아보고 싶지 않을 만큼, 내 자신이 끔찍해질 만큼. 평생을 내가 행복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며 살지 않았다. 그래도 괜찮다고 말해 주는 그녀가 있어서 나는 괜찮게 살아 보려고 한다. 그녀도 적당히 과거를 눈감으며 행복해지려고 노력하니까. 그 언젠가, 그녀의 당숙이 했다던, 곁에 있는 사람에 충실한 채 앞만 보고 가라는 유언처럼. 차마 그녀의 첫 번째 남편이라는 말은 독백으로라도 할 수가 없다.
16
씻고 나오니 그녀는 야외 테라스의 테이블에 엎드려 자고 있었다. 자기 전에 차 한잔을 우려 주겠다고 자신만만하게 말하더니 오늘 이사한 것이 피곤하긴 했나 보다. 차를 마시는 공간만큼은 자신의 취향대로 꾸미겠다면서 하루 종일 분주하더니 초저녁부터 잠이 들었다. 나는 그녀의 옆에 앉아 볼을 꾹 눌렀다.
“일어나. 여기서 잘 셈이야?”
그녀는 미동조차 하지 않고 색색 숨소리만 낼 뿐이었다. 나는 턱을 괴고 가만히 그녀의 속눈썹과 규칙적으로 오르락내리락하는 목덜미, 살짝 벌어진 입술을 바라보았다. 그 어떤 의무도 목적도 남아 있지 않은 그녀는 이제 그저 내 앞에 그 모습 그대로 존재할 뿐이었다. 나는 얕은 한숨을 쉬고 그녀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으며 한 번 더 말했다.
“여기서 자면 허리 아파. 일어나, 얼른. 해가 진 지 얼마 되지도 않았어.”
그녀의 볼에 입을 맞추자 그제야 그녀가 간신히 눈을 떴다. 푸른 눈동자가 나를 보고 배시시 웃었다. 잠이 전혀 달아나지 않은 얼굴로 그녀가 중얼거렸다.
“으음…… 가야지. 근데 조금만 더.”
내가 미간을 찌푸렸지만 그녀가 칭얼대듯 말을 이었다.
“움직이기 싫단 말이야.”
한 번 부드러운 볼에 입술을 대자 충동을 멈출 수 없어, 나는 그녀의 귓불과 목덜미에 입을 맞추며 속삭였다.
“여기서 자면 감기 걸려.”
그녀의 눈에 입을 맞추자 속눈썹이 엉켰다. 나는 피식 웃고 그녀의 어깨를 들어 억지로 일으켰지만 그녀는 일부러라도 몸에 힘을 주지 않겠다는 듯 흐느적거렸다.
“깰게. 깬다고. 근데 조금만 더.”
“업혀.”
내가 등을 들이대며 낮게 말했다.
“뭐?”
“업히라고. 움직이기 싫다며.”
그녀에게 등을 대고 있었기 때문에 나는 그녀의 표정을 보지 못했다. 다만 그녀는 아무 말 없이 내 목에 두 팔을 감았다. 일어나서 침실로 향하는데 그녀의 자세가 영 불편하여 나는 낮게 말했다.
“완전히 몸을 기대. 네가 자꾸 뒤로 체중을 실으면 내가 불편해. 업혀 본 적 처음이야?”
대답은 없었다. 나는 그녀를 업은 팔에 힘을 주며 경고하듯 말했다.
“눈 감지 마.”
그제야 내 목덜미에 그녀의 피식 웃는 숨소리가 닿았다. 또 대답이 없었기 때문에, 다시 한 번 단단히 주의를 주었다.
“잠들지 마.”
“왜?”
“새집으로 온 첫날밤이야. 이대로 잘 셈이야?”
그녀가 가는 팔로 내 목을 더 감싸 안았다. 등 뒤로 완전히 밀착한 체온이 그대로 느껴졌다. 하지만 대답이 없어서 나는 마지막으로 말했다.
“눈 떠. 침실에 갔는데 잠들어 있으면 허탈할 것 같으니까.”
계단을 오르는데도 그녀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아서 나는 한숨을 쉬며 포기했다. 테라스에서 정신 못 차리고 잠들어 있었을 때부터 사실 오늘 밤은 안 되겠다고 생각한 터였다. 침대에 그녀를 조심스럽게 내려놓고 이불을 덮어 주는데, 잠든 줄 알았던 그녀가 갑자기 내 목덜미를 끌어안으며 잡아당겼다.
그녀가 비몽사몽간에 눈을 간신히 뜨고 내 입술에 자신의 입술을 가져다 대며 속삭였다.
“처음이야.”
“뭐?”
나는 그녀의 위에서 얼떨떨하게 물었고, 그녀는 싱긋 웃었다.
“업혀 본 거. 정신을 잃었을 때나, 기억 안 나는 아기 때는 있을지 몰라도.”
아무 말도 못하고 그녀의 입술을 조심스럽게 느끼고만 있었다. 부모의 사랑을 아예 받지 못했다고 했었다. 아주 어릴 때부터 혼자라는 걸 알았고 그다지 착하지도 나쁘지도 않은 성격으로 보잘것없는 인생을 벼랑에 걸어 두고 살았다고 했다. 나와 비슷한 생각을 떠올리고 있는지 그녀가 속삭였다.
“내 생각, 많이 해도 돼.”
“…….”
다른 날도 아니고, 황궁에서 벗어난 오늘 그런 소리를 하다니. 너는 내가 어떤 마음으로 황궁을 벗어났는지 알고 있다. 그 광기의 장소에서 벗어나면 너에 대한 집착과 싸우지 않아도 될지 모른단 기대가 내게는 있었는데.
“어린 시절 내내, 내 생각을 해 주는 사람들은 별로 없었거든. 그러니까.”
“…….”
“네가 좀 더 많이 해 줘도 균형이 맞을 거야.”
“…….”
“어쩌면 이제 서로 화를 내고, 싸울 수도 있겠지. 며칠간 토라지고 이해할 수 없다며 짜증을 낼지도 몰라. 난 인내심이 뛰어나거나 선량한 사람은 아니거든. 그래도…… 나는 네가 언제까지나 괜찮을 거야.”
그대로 그녀는 무겁게 뜨고 있던 눈을 감았다. 다시 고른 숨소리를 내며 잠든 그녀의 뺨에 다시 입을 맞추고 나는 작게 속삭였다.
“눈 감지 말라니까.”
물론 다시 잠의 세계로 빠져든 그녀에게 내 말은 들리지 않는 듯했다.
“잠들면 안 된다니까.”
늘어진 그녀의 몸을 안고 실내복 사이로 드러난 쇄골에 입 맞추며 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런 말을 해 놓고 너는…….”
그녀를 깨워서 어떻게든 안고 싶은 마음 반, 잠든 그녀를 깨우고 싶지 않다는 마음 반이 또 내 안에서 치열하게 싸웠다. 언제나 그녀는 내 세계를 둘로 갈라 버린다. 그녀의 엄마가 입버릇처럼 달고 살았다는 어린 시절 그녀의 별명이 여우라서 그런가. 나는 그녀의 목덜미에 고개를 묻고 희미한 살결의 냄새를 한껏 들이마셨다.
“일어나.”
깨울 의지가 전혀 없는 어조로 한 번 더 속삭이고 나서, 나는 결국 그녀를 안은 채 눈을 감았다. 업어 주는 것이 마음에 들었나? 그렇다면 몇 번이고 업어 줄 것이다. 또 어린 시절에 부모에게 느끼지 못한 애정을 상징하는 것들이 뭐가 있을까? 무엇이든 다 해 줄 것이다. 처음으로, 아이가 생겨도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아마 리에는 그다음 날 아침에 생겼을 것이다.
외전2. 어느 저녁
아직 리에가 생긴지도 몰랐을 때의 일이다. 지는 노을이 예뻐 바람을 쐴 겸 혼자 호숫가에 산책을 다녀온 아셰는 그새 성에 온 뜻밖의 손님 때문에 깜짝 놀랐다. 빛나는 금발 머리에 날카롭게 째진 푸른 눈을 가진 그녀의 두 번째 이복 오빠, 루벤이 천연덕스럽게 이단과 마주 앉아 술을 마시고 있었기 때문이다.
“음, 어, 아?”
그녀가 이토록 당황한 것은 인생에 거의 없는 일이었다. 그녀는 루벤과 전혀 친분이 없었다. 오히려 어린 시절에는 회의 때마다 그를 마주치면 속으로 욕을 하기도 했다. 그의 모친인 테스티가 아셰와 샤틴을 대놓고 무시했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그때에 그녀는 무조건 윌리엄 편을 들기도 했었으니까.
물론 루벤이라는 사람 자체에는 악감정이 없었고, 게다가 르엘라와 얽힌 과거를 알고 나니 이상한 동지의식이 생기기도 했었다. 르엘라의 죽음에 함께 슬퍼했다는 생각을 하면 미묘하게 가깝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어쨌든 같은 사람을 정말 많이 좋아했으니까.
그렇다고 할지라도 워낙에 대화를 나눠 본 적이 없어서 그녀는 피가 섞였을지라도 제대로 인사조차 못하고 있는데, 이단과 루벤은 이미 응접실에서 꽤 도수가 센 술 한 병을 비우고 기분 좋게 취해 있었다.
[다음 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