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9화 (239/256)

  

109화.

다른 곳에 있는 그녀를 불안해하면서도 계속해서 혁명군에 몸을 담았던 것은 핏줄의 힘을 끊고 싶다는 간절한 바람 때문이었다. 건국 신화에서 전해지는 대로, 내가 아버지를 죽이면 엔리히 황조의 모든 힘은 사라진다. 이 저주 같은 엄청난 마법의 힘을 끊으면 내 광증 또한 없어지지 않을까. 만일 그렇지 않더라도, 그녀를 둘러싼 모든 것들을 파괴하고 싶은 충동이 현실로 나타날까 봐 전전긍긍하지 않아도 될 것이었다.

적어도 이런 힘을 가지고 그녀를 곁에 두고 싶지 않았다. 남을 강제할 수 있는 힘이 선천적으로 주어진다는 것은 위험한 일이다.

그녀를 만나러 간 빌어먹을 캐넌 영지에서, 그 젊은 영주의 부드러운 눈매와 그를 바라보는 그녀의 표정, 그리고 그들을 응원하는 수많은 사람들 속에서 나는 비참한 마음으로 그들을 지켜보았다. 내가 갖지 못한 많은 그녀의 진심이 그 젊은 영주에게 쏟아졌다. 동료애, 투정, 고마움, 미안함, 신뢰, 토라짐, 유대감, 슬픔…… 나는 단 하나도 모르는 표정들. 네가 내게 단 하나도 주지 않았던 순진한 감정들.

그 영주가 어떤 사람인지 단번에 파악했다. 양어머니를 범하고 그 아이를 지웠다는데도 편을 들고 나서는 사람들을 보며 나는 그 영주의 인덕을 짐작했다. 그리고 그 모든 것들이 그녀에게 어떻게 받아들여지고 있을지도.

그동안 그녀는 단 한 번도 내게 마음 깊숙한 곳까지 내보인 적이 없었다. 토라질 법 한데도 토라지지 않고, 캐물을 만한데도 캐묻지 않고. 언제나 우리 사이에 부정적인 감정이 자리 잡지 않을 만큼의 거리에서 영리하게 웃고 있었다. 남들은 편리하다 여길 그 거리조차 나는 싫었다. 그녀의 사랑만이 아닌, 분노와 슬픔과 투정까지 모두 갖고 싶었다. 그런데 그녀의 그 모든 감정을 그 영주가 갖고 있었다.

그녀는 오랫동안 그 선량한 영주의 곁에 있었다. 나는 그저 한 달 동안 갇혀 있던 그녀를 가졌을 뿐이다. 그녀가 ‘정상’이라면, 누구를 선택할지는 자명한 사실이었다. 그녀는 원래 적당히 구석진 공국의 착하고 잘생긴 남자와 결혼하는 것이 목표였다. 사랑도 권력도 그녀에게는 딱히 중요하지 않았다. 게다가…… 그의 애를 배었었다고.

다시 한 번 구체적인 망상이 펼쳐졌다. 다 죽이면 되는 것이다. 이 작은 영지를 모두 초토화시키고, 그래, 혁명군의 기지를 산사태로 박살 냈던 내 아버지처럼, 라가닐 대학살 사건처럼 그렇게 모두 없애고, 폐허가 된 이 광장에서 너를 거칠게 안을 것이다. 너를 가득 담던 그 남자의 맑은 초록 눈동자를 닮은 나뭇잎조차 태워 버릴 것이다. 너와 다른 남자의 행복을 빌어 주던 이 많은 사람들을 흔적도 없이 땅에 묻어 버릴 것이다. 흐느끼는 너를 가진 채 절대 놓아 주지 않을 것이다. 그녀가 이 영지를 눈에 담지 못하게 시야를 가리고, 그 영주의 이름을 부르지 못하게 입을 맞추고, 그 영주의 몸을 기억하지 못하게 꽉 끌어안아 교합할 것이다.

나는 그날, 내가 죽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내 광기로 그녀를 불행하게 하느니 내가 죽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징그러운 희망을 가지고 나는 그녀의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그녀는 내 어머니의 반지를 여전히 끼고 있었다.

그 반지를 네게 준 것은…… 네가 원하기도 했었지만, 내게는 내 욕망보다 네가 우선이라는 뜻이기도 했다. 있잖아, 네가 핏줄로 이어지는 패물을 하나 받고 싶다고 했을 때, 단 한 번도 믿지 않았던 ‘운명’이라는 단어가 희망처럼 울렁거렸어. 내 아버지의 피가 널 끊임없이 괴롭힌다면, 내 어머니의 피가 너를 내게서 구해 줄 거야.

10

나는 벼랑 끝을 걷는 기분이었다. 위태롭게 ‘혁명이 끝나면 데리러 오겠다고 약속한 연인’의 낭만적인 선을 아슬아슬하게 지키고 있었지만, 조금만 발을 헛디뎌도 최악의 비극으로 모든 것을 망칠 것 같았다. 언제든 내가 떨어지기만을 기다리며 아가리를 벌리고 있는 광증의 늪에 빠지지 않기 위해 나는 그녀처럼 거리를 유지할 수밖에 없었다. 그 영주에 대해 묻지 않고, 아이에 대해 묻지 않고, 아이를 죽인 사람에 대해 묻지 않고.

그녀가 내 곁에 있으면 된다. 함께 한 약속을 지키면 된다. 나를 사랑하고, 곁에 있고, 결혼하면 돼. 그 외의 것을 욕심내다가는 정말로 돌이킬 수 없는 참극이 벌어질 수도 있었다.

그리고 그녀가 처음으로 불안함을 말했다.

“네게 혼담이 쏟아질 것은 당연한 일이고, 나는 작은 영지의 미망인일 뿐인데. 나는 안 불안할 것 같아?” 

불안하다고. 내가 불안하다고. 나는 그 불안함이 얼마나 사람을 미치게 하는지 알고 있었다. 맞아, ‘정상’적인 사람이라면 고작 한 달 몸을 섞은 것으로 이 혼란스럽기 그지없는 시대에 평생을 약속하지 않는다. 지도자의 자리에 올라 옛 연인을 잊은 사람들은 역사적으로도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았다. 내가 지금까지 느낀 그 끔찍한 불안함을 그녀 역시 지니고 살 줄은 몰랐다. 하지만 당연히 그럴 수밖에 없구나. 나는 숨을 몰아쉬었다.

묻어 두고 싶은 진실이라 할지라도 절대 외면하지 않고 똑바로 직시하는 이 여자가 순진하게 내 사랑을 믿을 리가 없지. 그녀가 나처럼 불안해하는 것은 싫었다. 그 불안이 얼마나 고통스러운지는 내가 가장 잘 아니까.

그녀는 숨겼던 아이의 일을 3년이나 지나서 내게 말했다.

나는 10년이 지나서 숨겼던 내 광증을 고백했다.

내 고백으로 나는 두 배는 더 불안해지겠지만, 너는 조금도 나를 불안해하지 말라고. 언제 어디서든 내가 찾아올 수밖에 없는 그 필연성을, 그게 질환이라고 할지라도, 어쩌면 ‘사랑’이라는 이름을 차마 내가 먼저 붙일 수조차 없을 만큼 징그러울지라도, 그 어쩔 수 없음을 말해야 했다.

평생을 숨기려고 했어. 너만 내 곁에 온다면, 영원히 네게 말하지 않으려고 했어. 그러나 그 대가로 우리 아이에 대해 3년 동안이나 내가 모르고 살았다면, 결국 말하지 않아 만들어진 틈이 너를 더 불행하게 한다면 고백해야 했다. 그녀를 안고 나서 진정되어 맑은 정신에, 나는 마지막으로 그녀에게 떠날 기회를 주었다.

그리고 그녀는 말했다.

“괜찮아.”

있잖아.

“너도…… 내가 내 오라비를 죽인 여자여도 괜찮다고 해 줬잖아. 내 고국의 사람들 앞에서 내 편을 들어 주었잖아.”

네가 망설임 없이 내게 그렇게 말해 주었을 때, 나는 정말로 소리 내어 울 것 같았어.

나는 너를 알아. 너는 밝고 순수하지도, 사랑이 누군가를 구원한다고 생각하지도 않지. 어쩌면 그런 건 하지 말아야 한다고 아주 어렸을 때부터 냉소적인 태도를 가지고 있었을지도 몰라. 네 말들이 정말로 나를 진정시킬 수 없다는 것도 알고 있겠지. 그런 말 몇 마디로 가라앉을 광기라면 대륙을 쑥대밭으로 만들지도 않았다.

“나는…… 나는 괜찮아. 네가 조금 정상이 아니라고 할지라도…… 아니, 그 정상의 기준조차도 우리는 영원히 알 수 없을 거야. 그러니까 괜찮아. 우리 약속했잖아. 내가 약속을 지키면, 넌 날 해치지 않을 거지? 황족의 피조차 끊어 낸다는 너를 내가 못 믿을 리 없잖아.”

그럼에도 불구하고, 네가 그렇게 말해 주었을 때…….

“내가 널 이해한다는 말을 해 줄 수 없어서 미안해. 하지만 괜찮다는 말은 할 수 있어.”

너를 진심으로 사랑한다고 생각했어. 

내 인생에 너만 한 연인은 없고, 너만 한 친구는 없고, 너만 한 사람은 없다고. 

나조차도 괜찮지 않은 내게 망설이지 않고 황제를 조금 닮았어도 괜찮다고 해 준 유일한 사람.

“널 사랑하고, 기다리고, 또 너와 결혼할게.”

그냥 알 수 있었어. 이건 사랑이라고 느꼈어. 지금까지 ‘사랑’이라는 단어에 합리화하여 내 모든 욕망을 누른 것과는 달랐어. 그 때 세상 사람들이 왜 다 사랑에 미치는지 이해할 수 있었어. 사랑이라는 건 누가 이름 붙여 주는 것도 아니고, ‘이게 사랑일까’ 하며 의심하는 것도 아니고, ‘이게 사랑일 거야’라며 합리화하는 것도 아니고, 짐승처럼 미친 듯이 교합하는 것도 아니더라. 바로 지금 이 순간, 이 감정, 이 느낌, 이 확신. 이게 사랑이구나. 한 치의 의심도 들지 않고 번개를 맞은 듯 선명한 것.

나의 위태로운 감정을 눈치 빠르게 포착한 그녀는 생긋 웃으며 말했다.

“새 치맛단을 잘라 줄게. 지금의 것은 너무 너덜거리고…… 사실 좀 비위생적인 것 같아.”

나를 바라보며 짓던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예쁜 미소와 그 발랄한 어조를 나는 평생 잊지 못할 것이다.

“3년 동안 세탁은 했니?”

생각날 것이다. 그녀가 떨리는 목소리로, 이런 나라도 괜찮다고 했던 오늘 밤이 영원히 생각날 것이다. 내가 정상이 아니라고 해도 괜찮다고 해 주었던, 세상에서 나를 가장 징그럽다고 욕해도 되는 단 한 사람이 나를 받아 주었던 이 밤으로 나는 수많은 시간을 버틸 수 있게 될 것이다. 거부할 수도 없고, 후회할 수도 없고, 그 어떤 길을 헤매더라도 결국 이 순간에 나는 돌아와 멈출 것이다.

죄책감 없이 너를 곁에 둘 거야. 평화가 찾아오고 내 핏줄에 끔찍한 힘이 사라지면 평범한 남자들처럼 투정을 부리며 네 어깨에 얼굴을 묻고 눈물이라도 흘릴 거야. 너를 절대로 해치지 않을 거야. ‘정상’적으로 너를 사랑할 거야. 저 지극히 정상적인 영주처럼 네 곁에 오랫동안 있어 주면…… 그 영주가 가진 네 모든 시간들도 내게 흡수되겠지.

나는 너를 그 작은 성에 두고 떠나면서 터져 나오는 독백을 참을 수 없었다.

너를 사랑해.

11

아버지와 형을 죽였을 때, 거짓말처럼 마력을 통제할 수 있는 힘도 멈췄다. 신화는 진실이었고, 나는 더 이상 성을 파괴하고 바다의 흐름을 멈추고 수없이 많은 사람을 죽일 수 있는 신의 후예가 아니었다.

그렇지만 그녀에 대한 생각은 멈추지 않았다. 아니, 슬프게도 황궁에 들어서자마자 오히려 극도의 불안감을 느꼈다. 그녀는 이 황궁에서 황제가 자신의 여자를 베는 것을 보았다. 그리고 그렇게 되기 싫다며 친오라비를 독살했다. 그녀가 내게 올까? 그녀는 지나치게 영리했다. 만일 내게 그날 괜찮다고 한 것도, 내가 미쳐서 그 영지를 다 초토화시켜 버릴 것을 염려해서 먼저 선수를 친 건 아닐까.

황궁에 들어오니 내 상태가 점점 더 악화되는 걸 느꼈다. 그날 밤 캐넌에서 보았던 온갖 망상이 끔찍하게 떠돌았다. 그놈은 내가 갖지 못한 것을 가지고 있었다. 유대감과 신뢰가 쌓일 정도의 오랜 시간, 그 어떤 트라우마도 없는 선량한 내면, 오랫동안 가슴에 남을 법한 희생, 지극히 정상적인 사랑. 반면 황궁은 내게 끝없는 트라우마와 같은 장소였다. 어머니가 죽고, 동생이 죽고, 아버지를 죽이고, 형을 죽이고. 그녀가 절대로 오고 싶지 않아 했던 끔찍한 곳.

[다음 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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