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8화 (238/256)

  

108화.

비밀 통로를 걷는 내 발걸음을 멈출 수는 없었지만, 나는 무조건 내 욕망을 숨겨야겠다고 생각했다. 나는 그저 추억을 낭만 삼아 온 옛날의 술친구……. 무료하여 대화 상대를 찾아온 평범한 청년……. 감출 수 있었다. 나는 어머니의 말을 계속해서 되새겼다. 그대로 그녀를 갖고 싶지만 억지로 강요하지 않겠다고. 두 눈을 마주하며 이어지는 대화에 집중하겠다고. 뭐든지 일 대 일로 교환하자는 약속을 지키겠다고.

그리고 그녀는 내게 믿을 수 없는 제안을 먼저 하고 말았다. 남자와 몸을 섞는 기쁨을 알려 달라고? 그녀의 말에 온몸이 부들부들 떨렸던 것은 기뻐서가 아니었다. 그 때, 나의 두 인격이 그대로 갈라지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 미친 듯이 그녀를 가지고 싶다는 욕망과, 대화를 나누며 인간적으로 가까워진 옛 친구를 광증의 대상으로 삼고 싶지 않다는 이성이 거세게 부딪혔다. 그 어느 쪽도 완전히 내가 통제할 수 있는 생각이 아니었다.

이틀 동안 그녀를 찾아가지 않고 나는 온종일 고민하고 갈등했다. 먼저 제안한 것은 그녀였다. 그녀에게 내 욕망을 들키는 것은 죽어도 싫었지만, 어떻게든 감추면 되지 않을까……. 딱 그녀가 원하는 만큼만……. 이것은 내가 아닌 보통의 남자라도 들어줄 만한 부탁이니까…….

나는 내 자신이 끝없는 합리화를 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육체의 갈망과 정신의 거부를 미치도록 왔다 갔다 한 후에야 나는 나를 믿어 보기로 했다. 그녀가 원하는 것만. 딱 그만큼만. 억지로 강요하지 않고, 두 눈을 마주 보고 하는 대화를 피하지 않으며, 약속을 지키면. 내 어머니의 선량한 피가 내 광증을 막아 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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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이 아니냐고 묻는 그녀의 말에 그럴듯한 이유를 둘러대며 어영부영 넘겼다. 그녀를 향한 집착을 조금이라도 티내고 싶지 않았다. 이 모든 정사를 가볍게 여기는 것처럼 보이고 싶었다. 그럴듯하게 숨겨야 할 것은 하나 더 있었다. 그녀가 끈질기게 묻는 네 번째 조건. 이성이 택한 세 가지 조건을 모두 만족하는 여자가 두 명 있을 때 어떤 여자를 선택할 건데? 어떤 조건을 거짓으로 둘러대야 할지 끊임없이 생각했다.

절대로 부정적인 감정은 공유하지 않는 여자? 범죄를 저지르고 나서도 어쩔 수 없었다며 나약한 핑계를 대지 않는 여자? 자신의 삶에 대해서는 담담하게 비극까지 각오한 여자? 자신을 생각하는 사람들에게는 애정을 품을 줄 아는 여자? 영악하지만 남들의 충동적인 실수에 대해서는 너그러운 여자? 그래서 내가 정신을 잃고 욕망에 그녀를 거칠게 안아도 너그럽게 넘어가 주는 여자? 그렇기 때문에 속을 짐작하기가 더 어려운 여자?

아니, 그냥…… 웃을 때 눈이 반달처럼 휘어지는 여자? 새초롬한 표정을 지을 때 뭐라도 다 해 주고 싶은 여자? 집중하여 차를 우릴 때 살짝 다문 입술이 귀여운 여자? 너무 많은 조건들이 생각났지만, 결국엔, 또다시……. 그냥…… 그냥 그 모든 것이 자꾸만 생각이 나는 여자. 자꾸 생각할수록 무슨 대답을 해야 할지 몰라 말을 넘겨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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꽤나 연기를 잘했다고 생각한다. 그저 평범한 욕망을 가진 남자로, 그녀의 부드러운 몸에 정신 못 차리는 혈기 왕성한 청년으로. 그녀와 나누는 대화는 언제나 즐거웠고 그만큼 심리적으로도 가까워졌다. 생각해 보면 그녀는 내 유일한 친구기도 했다. 머릿속에 펼쳐지는 모든 망상을 무시하고 나는 그녀를 딱 ‘정상’적으로만 안았다고 생각했지만…… 그녀의 생일에 그녀는 너무나 담담하게 죽음을 말했다.

순간적으로 상상이 커다랗게 내 머릿속을 잠식했다. 아니, 상상이라기보다는 망상이었다. 이 빌어먹을 아메탄 왕궁을 모두 부수자. 끔찍한 재앙을 만들자. 나는 황족이고, 그만큼의 마법은 눈 감고도 할 수 있었다. 그녀에게 모욕적인 언사를 하던 태자의 부인도, 그녀에게 결국 사형 선고를 내릴 아메탄의 왕도, 저 응접실 밖을 지키고 있는 그녀의 시녀도 모두 죽여 버릴 것이다. 그녀를 결국 죽음으로 몰고 갈, 천 년 동안 제국의 눈치를 보고 있던 쥐새끼 같은 아메탄을 그대로 멸망시킬 것이다.

폐허가 된 왕궁에는 그녀와 나만 남을 것이다. 그녀는 처음엔 무서워하겠지만, 나는 그런 그녀를 껴안고 얼러 줄 것이다. 너를 가두고 괴롭히던 사람들은 내가 다 죽였어, 그러니 넌 내 품에서 모든 걸 잊고 그저 날 받아들여. 나는 작은 그녀의 궁이 아닌 파란 하늘 아래에서 자유로워진 그녀를 안을 것이다.

온갖 망상이 나를 더 몰아붙이기 전에 나는 급히 그녀를 안았다. 이 모든 상상을 멈출 수 있는 것은 역설적이게도 결국 그녀뿐이었다.

“너 하나 데리고 나가는 건 일도 아니야.”

결국 이런 말을 하게 되다니.

“나와 함께 가.”

모두 그녀의 의사대로 해 주려고 했는데.

“말해 줘. 널 데려가라고, 함께 가자고.”

내가 그녀에게 위험한 상대라고 생각하여 어지간하면 곁에 두려고 하지 않았는데, 그래도 그녀가 죽는 것보다는 낫지 않을까. 정사로 인해 어느 정도 정신을 차린 나는 내가 또 혐오스러워졌다. 억지로 강요하지 않겠다고 했는데 결국엔 미친 듯이 그녀를 안아 버렸고, 함께 떠나자고 몇 번이나 말했다. 움직이면 움직일수록 몸을 말아 오는 거미줄에 걸린 기분이었다. 그녀를 원할 수도, 원하지 않을 수도 없고. 그녀를 억지로 데려갈 수도, 그렇다고 이대로 놓고 갈 수도 없고. 그녀를 살릴 수도, 죽일 수도 없고.

그녀는 내 두 눈을 똑바로 보며 말했다. 가지 않겠다고.

그리고 또, 그녀가 말했다.

“……그동안, 널 정말로 사랑했어.”

사랑이라니.

나는 벼락을 맞은 것처럼 가만히 앉아 있었다. 사랑이라고? 사랑? 너와 짐승처럼 몸을 섞고 국제 정세에 대한 대화나 나눈 것이 사랑? 이런 것에도 사랑이라는 이름을 붙여도 돼? 너는 이걸 사랑이라고 생각해? 나는 감히 내 욕망이 추악하고 더럽고 두려워서 그런 이름을 붙이지조차 못했는데? 사랑이라면 ‘정상’적인 사람이 하는 것 아냐? 내게 너는 한 번도 ‘정상’인 적이 없었는데.

내밀한 욕망이 뱀처럼 머리를 들었다.

사랑인 척하면 되잖아. 지금까지 정상인 척했듯이. 그 모든 망상과 욕망을 참으면서 그녀를 조심스럽게 안았듯이, 또 속이면 되잖아. 아주 오래전부터 집착하고 있다는 사실을 숨기면 되잖아. 사랑이라는 이름 아래 곁에 두면 되잖아. 한 달 동안 ‘정상’인 척한 것처럼, 어쩌면 평생 그럴 수도 있잖아. 혁명이 성공해서 내가 통령이 되어도 법이 내 위에 있듯이, 그 사실을 이미 내가 받아들였듯이, 그녀를 곁에 두어도 그녀의 뜻을 무엇보다 존중하면 되잖아.

나는 잘하고 있잖아, 지금까지. 혁명군이 황족인 나를 총독으로 삼을 정도로, 그녀가 먼저 몸을 섞는 것을 제안하고 스스로 사랑을 말할 정도로. 그렇다면 지금 해 왔던 것처럼만 하면 된다. 이 정도의 선만 유지하면 그녀는 내 감정 역시 사랑임을 믿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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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이라는 이름을 붙이면 모든 것이 아름다워졌다. 나는 희망에 번득이는 내 눈을 차마 거울 속에서 바라볼 수가 없었다. 사랑한다면 곁에 둬야지. 영원히 곁에 두려면 결혼해야지. 이 대륙의 모든 사람에게 나와 그녀가 함께 한다는 것을 알려야지. 나는 그녀의 남편이 되어야지. 그녀를 갖고, 만지고, 입 맞추고, 그녀의 이야기를 듣고, 내 이야기를 해 주고, 끌어안고, 다른 남자를 보지 말라 하고, 나를 떠나지 말라 하고, 언제까지나 곁에 있어 달라고 해도 추악하지 않다. 매일 아침 그녀의 얼굴을 질리도록 바라볼 거야. 밤에는 마치 한 사람이 되는 것처럼 그녀를 몇 번이고 안을 거야. 그녀의 모든 것을 보고 듣고 느끼고 또 가질 거야. 나의 모든 추악한 갈등과 고통은 평생 뒤로 미뤄 둔 채, 그저 정신적으로 건강하기 그지없는 남편의 위치를 누릴 것이다.

한 여인에게 집착하여 모든 결말을 파국으로 몰고 간 역대 황제들의 기록들을 나는 억지로 머릿속에서 지웠다. 나는 달라. 나는 황제가 아니라 통령이 될 테니까. 내 지위의 위에 법이 있고, 내 욕망의 위에 존중이 있을 거야. ‘사랑’이라는 이름을 붙이고 ‘정상’으로 곁에 있어 줄 거야. 황제의 피를 이어서 네가 그 광증의 대상이라는 건 평생 숨길 거야. 미칠 것 같은 망상에 휩싸일 때면 그대를 꼭 끌어안아 부드러운 입술에 입을 맞출 것이다. 아메탄 왕궁을 부수고 싶었을 때 그녀를 안고 진정되었듯이.

나는 여러모로 정신을 바짝 차려야 하는 입장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녀를 반려로 얻는 상상을 멈추기가 어려웠다. 억지로 강요하지 않아. 그녀가 가지 않겠다고 하니 이곳에 두겠다. 그녀를 이곳에 가둔 그녀의 오라비에게 감사할 지경이었다. 청혼을 하면 받아들이겠다며, 그녀가 감사하다고까지 말했다. 나의 모든 세상이 일렁이기 시작했다.

9

그녀의 사랑은 정상적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녀가 말한 사랑에 그 어떤 구속력이 없음도, 그녀에게 그래서 사랑이란 하찮은 감정이라는 것도. 그래서 그녀가 캐넌으로 갔을 때 나는 정말 불안했다. 내가 손을 내밀었을 때 그녀가 오지 않는 상황을 상상만 해도 두려웠다. 이성적으로는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내 자신이 무서웠다.

온갖 황제들은 그가 원하는 여자를 억지로 가두고, 가지고, 마음대로 되지 않으면 죽였다. 마치 아버지가 자신의 뜻대로 움직이지 않은 어머니를 죽인 것처럼. 나는 내가 그렇게 될까 봐, 그래서 우리의 이야기가 ‘사랑’이 아닌 ‘비극’으로 끝날까 봐 초조했다. 그녀가 나를 거부했을 때, 내가 내 아버지처럼 미쳐서 모든 것을 파괴해 버리면 어떡하나. 문제는 내게 그럴 만한 힘이 있다는 것이었다.

나는 그녀만 아니라면 정말로 정상이었다. 군 기밀을 잔뜩 알고 있는 리한이 아메탄 왕국으로 다시 보내 달라 해서 보내 주었다. 약속한 바였기도 했고, 타인에게 억지로 특정한 삶을 강요하면 안 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아무리 가장 윗자리에 앉아 있다고 해도 나는 개인의 삶을 존중하는 공화정의 총독이었다. 역설적이지만 나는 완전한 공화주의자조차 아니었기 때문에 영원한 권력 같은 것에도 관심이 없었다. 어쩌면 공화국의 시작보다는 제국의 끝에 관심이 있어 이 길을 걸었다.

그러나 그녀가 내 인생의 변수로 나타나면……. 혹시라도 그녀가 나를 거부한다면…… 떠나 줘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는데 그렇게 할 수 있을지가 내 스스로도 자신이 없었다. 그녀를 만나고 난 뒤 언제나 내 세상은 두 개였다. 부드럽게 서로를 끌어안고 사랑하는 평범한 연인의 세상과, 그녀가 다른 것들을 보지 못하게 모든 것을 파괴해 버리고 싶은 괴물의 세상.

[다음 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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