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7화 (237/256)

  

107화.

외전1. 이단

1

“어머니.”

어린 내가 두려움에 휩싸여 물었다.

“저도 황제 폐하처럼 되면 어찌합니까?”

어머니는 황궁의 궁녀였고, 어쩌다 황제의 눈에 들어 열여섯에 나를 낳았다. 젊고 선량했던 어머니는 나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속삭였다.

“괜찮습니다. 황자 전하께는 어미의 피도 절반이 흐릅니다.”

신분이 천했던 나의 어머니는 차마 내게 반말도 쓰지 못했다.

“정당한 명분 없이 황자 전하의 기분에 따라 다른 사람에게 무언가를 억지로 강요하지 마세요.”

어머니의 말을 똑똑히 기억하고 있다.

“황자 전하의 두 눈을 보고 말하는 사람들의 의견을 잘 들어주세요.”

왜냐하면 몇 시간 뒤 연회에서 어머니가 돌아가셨기 때문이다.

“그리고…… 약속한 것은 반드시 지키세요. 제가 꼭 황자 전하를 옳은 사람으로 키우겠습니다.”

나는 내가 정상이라고 믿었다. 아니, 믿고 싶었다. 어린 시절부터 역사학을 좋아하여 황궁 도서관에 있는 거의 대다수의 책을 읽은 나는 수많은 황제 중 폭군들의 기록에서 특이한 광증을 발견했다. 아마도 다른 인간들과 다르게 주어지는 압도적인 힘과 함께 유전되는 핏줄의 특징일 것이다. 슬프게도 내 아버지인 제국의 황제는 전형적인 광증을 앓고 있었다. 환청, 환각, 거미줄처럼 촘촘하게 뻗어 나가는 망상. 만일 내게 환청이나 환각의 증세가 나타난다면 나는 스스로 목숨을 끊을 생각을 했다.

어머니가 죽고 난 뒤 나는 연회라면 구역질이 올라왔다. 자꾸만 어머니가 죽었던 그 순간이 떠올랐고, 혹시라도 환청이 들릴까 봐 두려웠다. 그래서 대충 자리를 지키다가 지붕으로 기어 올라가곤 했다. 연회장을 벗어나서도 혹시 어머니의 비명 소리가 귀를 맴돈다면 그대로 뛰어내릴 셈이었다. 아버지처럼 미치기 전에 스스로 죽겠다고 치기 어리게 생각하던 소년 시절이었다. 평소처럼 지붕에 올라서 혼자 술을 마시던 어느 날, 그녀를 처음으로 만났다.

별처럼 반짝거리는 머리카락에 새초롬한 눈매를 가진 그 여자애를 보고 첫눈에 꽤 예쁘다고 생각했던 건 사실이다. 나는 연회에서 어지간하면 여자들과 춤을 추지 않았고 그래서 또래 여자애들과 깊은 대화를 나눠 본 적이 없었다. 남의 기분을 잘 맞춰 주는 아메탄의 막내 왕녀와 술을 마시며 이야기하는 것은 나름 재미있었다. 

그러나 그녀와 입을 맞추고 난 순간, 나는 내 온몸을 감싸는 욕망에 스스로가 놀랐다. 한 번도 구체적인 여자를 대상으로 이토록 선명한 욕망을 느껴 본 적이 없었다. 머리가 빙글빙글 돌았다. 그녀의 손목을 붙잡고, 다시 넘어트리고, 입술이 아닌 다른 곳에 입 맞추고, 영혼과 육체를 모두 남김없이 맞추어야만 파도처럼 밀려오는 갈망을 채울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러나 당황스러워하는 그 여자애의 푸른 눈을 보고 나는 바보같이…… 그저 너무 좋아서 멈추기가 어려웠다고 변명처럼 중얼거렸다.

사실은 다른 말을 하고 싶었다. 한 번 더 하자고, 아니, 나는 키스로는 부족한 것 같다고. 온몸이 불타는 것 같은, 머리가 하얘지는 것 같은 이 절망적인 소유욕을 혹시 너도 느끼고 있냐고. 내게는 많은 말이 맴돌았지만, 그녀는 이제 가 보겠다고 했다. 나는 일단 고개를 끄덕였다. 어머니는 다른 사람에게 무언가를 억지로 강요하지 말라고 했으니까.

“그럼 어리고 잘생긴 남자랑 키스해 봤다며 미련 없이 죽지 말고, 끝까지 잘 살아남아 봐. 죽고 싶다는 생각이 들면 그 죽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한 사람을 죽여. 혹시라도 먼 훗날 마주치면 내가 대답해 주지.”

나 역시 죽음을 가까이 생각하고 있는 주제에, 그 여자애가 자꾸 죽음을 말하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아서 나는 나름 간절하게 덧붙였다. 그러나 그 여자애가 비밀 통로로 사라진 이후에도 열기가 식지 않았다. 아무래도 안 되겠다 싶어 급히 연회장으로 내려가 그 애의 뒷모습을 바라보았을 때…… 나는 내가 믿기지 않았다.

음악도 사라지고, 연회장도 사라지고, 그 여자애의 머리를 쓰다듬고 있는 오라비도 사라지고…… 오로지 그 여자애를 그대로 넘어트리고 다시 입술을 마주 댄 내 모습이 촘촘한 망상이 되어 머릿속에 펼쳐지기 시작한 것이다.

2

난생처음 느껴 본 구체적인 대상에 대한 성욕이라 그런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 순간부터 나는 그 애를 단 한 번도 잊어 본 적이 없었다. 그때의 그 욕구가 머릿속에 늘 자리 잡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떨리던 그 애의 속눈썹, 부드러운 살결, 벌어지던 입술의 감촉, 팔에 감기던 가냘픈 허리, 붉게 달아오른 뺨 같은 것…… 어리고 잘생긴 남자가 좋다며 깔깔대던 발랄함과 오랜 애정결핍에서 오는 어쩔 수 없는 우울한 내면까지.

이제 내가 ‘정상’이 아니라는 건 알고 있었다. 그 어떤 남자도 잠시 대화를 섞고 입을 맞춘 여자애에 대해 이토록 꾸준히 생각하지 않는다. 시간이 지날수록 그녀에 대한 생각은 멈추는 것이 아니라 더 구체적으로 깊어졌다. 나는 추억이 오염되었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오염된 추억의 망상은 점점 더 찬란하게 변했다.

그녀를 보고 싶어 아메탄의 연회에 가 볼까 고민한 적도 많았으나, 내가 그 어느 연회도 좋아하지 않는 것을 알고 있는 황궁의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나를 명단에서 제외했다. 나는 주체적으로 아메탄에 가겠다는 말을 할 생각은 없었다. 내 망상의 대상이 끈질기게 한 명이라는 것은 순정이라고 부를 수 없었다. 광증과 집착이지 ‘정상’이 아니라는 건 내가 가장 잘 알았다. 그녀를 원했지만 동시에 피하고 싶었다. 그녀만 피하면 나는 ‘정상’이니까.

나는 온갖 기록을 찾아보았다. 황제들이 기이하게 집착하기 시작한 여자들은 모두 불행한 결말을 맞았다. 집착은 의처증으로 이어지고, 그녀들은 결국 황제를 피해 도망치다가 잔혹하게 죽었다. 역사 속의 황제들은 한번 집착하기 시작한 여자들을 절대 놓아주지 않았다. 나는 내게 흐르는 피가 두려웠다.

3

내 아버지가 그녀에게 혼담을 넣은 뒤 내가 황궁에 더 이상 머무르지 못한 건 필연적이었다. 그녀가 황제의 비가 된다고? 나는 결말을 예상할 수 있었다. 혹시나 내게 광증이 발현될까 두려워 그동안 그녀를 보러 가지 않았다. 그런데 그녀가 이 황궁에 온다고? 그것도 아버지의 여자로? 수천 가지 상상이 머릿속을 떠다녔지만 그 결말은 언제나 비극이었다. 어떻게 되어도 나는 미칠 테고, 나는 미치느니 죽어 버리고 싶었다.

나는 그녀에게 건넸던 조언을 떠올렸다. 죽고 싶거든, 죽고 싶다고 생각하게 한 상대를 죽여……. 내게 그 상대는 어쩔 수 없이 아버지였다. 그녀가 얽히지 않았어도 몇 번이나 세상에서 없어져야 할 존재라고 생각한 사람이었다. 반쯤은 자포자기한 심정으로 제국의 구석진 영지에서 황제를 없애고 공화정을 이룩하자는 반란군 무리에 합류했다. 그리고 믿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났다. 길이 보이기 시작한 것이다. 지도자의 위에 법이 있다는 눈이 번쩍 뜨이는 논리였다.

아무리 남의 위에 있어도 함부로 사람을 죽이면 안 된다, 기분대로 하면 안 된다, 모든 사람들이 합의한 규칙을 지켜야 한다……. 나는 아무리 황족의 피를 타고났어도, 절대 마음대로 사람들에게 억지로 강요하거나 약속을 어기지 않을 것이다. 아주 어릴 때부터 내가 마음에 새기고 있던 신념과도 비슷한 논리에 나는 마치 내게 맞는 옷을 입은 것 같았다.

황궁과 황궁의 밖을 모두 겪어 본 나는 알 수 있었다. 시간의 문제일 뿐이지, 결국 이 사상은 제국을 무너트리고 말 것이다. 엔리히 황조의 끝을 확신한 내게 그다음으로 들었던 생각은 황궁에 보관되어 있는 천 년의 역사였다. 그 모든 역사가 사라지는 것은 마음 아픈 일이었다. 어차피 무너지는 제국이라면…… 그 역사가 새로운 정복자에 의해 흔적도 없이 사라지는 것은 싫었다. 그리고 역설적으로 그 역사를 지킬 수 있는 사람은 나뿐이었다.

4

아메탄의 태자가 죽으며 혼담이 취소되었다는 소리를 들었을 때 나는 안도했고, 태자를 죽인 사람이 제국에 가기 싫어했다던 그녀라는 소식을 들었을 때에는 한참 동안 소리 내어 웃었다. 그 때 터져 오르던 환희를 말로 표현할 수가 없었고, 이미 내가 광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스타람에서 제안이 왔다. 아메니티의 마력을 빼앗으면 지원군을 보내 주겠다는……. 나는 왕궁에 직접 침투하지 않는 이상 어렵다고 대답했다. 그리고…… 스타람은 리한과 루벤을 통해 내게 정말로 왕궁에 갈 수 있는 길을 열어 주었다.

혁명군 내에서는 내가 가는 것이 너무 위험하다며 말리는 사람들도 있었다. 하지만 나는 대의를 위해서는 모험을 해야 한다며 의연하게 대답했다. 하지만 나 자신을 속일 수는 없었다. 아주 오래전부터 기다렸다. 내 의지가 아니지만, 어쨌든 어쩔 수 없이 필연적으로 그녀를 만나러 갈 기회가 찾아오는 것. 내가 그녀를 보겠다고 국경을 넘으면 망상에 미친놈이지만, 기회가 생겨 겸사겸사 그녀를 보는 것은 어린 날 추억에 대한 적당한 낭만이기 때문이었다. 나는 ‘정상’을 가장하고 싶을 정도로 간절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황제를 암살하러 간 황궁에서 나는…… 끔찍한 대화를 나누게 되었다.

생각이 멈추지 않아 사람들을 죽이고 또 죽일 수밖에 없다고. 황제가 만들어 낸 이 모든 참상은 그저 머릿속에 맴도는 생각들 때문이라고.

어머니가 배우자감을 물어보던 어린 시절부터 나는 알고 있었던 것이다. 내게도 ‘생각이 멈추지 않는 상대’가 나타날 수 있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누가 가르쳐주지도 않았는데, 그 어린애가, 아직 생각이 나는 상대조차 없으면서, 그저 미친 혈관에 흐르고 있는 피가 속삭이는 대로 순진하게.

그리고 그 상대는 7년 전 한 번 입을 맞추었던 아메탄의 그 여자애. 정말 비참하게도, 다른 여자가 눈앞에 있어도 그 애의 생각이 전혀 지워지지 않았다. 끔찍하고 두려웠던 가설은 그대로 맞아떨어졌다. 그 여자애는 핏줄로 이어지는 내 광증의 대상이자, 내가 아버지를 닮았다는 증거였다.

5

7년 만에 그녀를 회의장에서 처음 보던 날, 나는 시선의 끝에 그녀를 가둘 수밖에 없었다. 사실 그날 이후 단 하루도 너를 생각하지 않은 날이 없다고 말하면 나를 얼마나 징그럽게 생각할까. 별다른 이유는 없고, 그냥 네가 내 욕망의 첫 상대였기 때문에. 마치 짐승이 처음으로 포착한 먹잇감을 오랫동안 예의주시하듯이. 그러나 안색이 좋아 보이지 않으면서도 꼿꼿하게 앉아 있는 그녀가 안쓰러웠다. 말해 주고 싶었다. 괜찮다고, 잘한 거라고, 그러니 고고한 표정 뒤에 그런 쓸쓸함을 숨기지 말라고.

[다음 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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