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6화.
이단은 대륙 구석의 작은 성을 하나 구매하여, 그곳에 제국의 역사서와 옛 황제들의 흔적을 모으기 시작했다. 그는 박물관장이라며 스스로를 칭했고 구경하러 오는 손님들이 있으면 가끔 직접 설명을 하기도 했다. 밤이면 새롭게 역사서를 편찬하느라 바빴고, 날이 좋은 계절에는 이렇게 옛 황제들의 흔적을 찾기 위해 다른 지방까지 여행을 떠나오곤 했다.
“저기 성이 엄청 커!”
리에는 이단의 뒤에 있는 성을 손가락질하며 소리쳤다. 이단은 옛 생각이 난다는 듯이 슬쩍 웃고, 아셰를 바라보았다.
“시카 성이야.”
“아, 그래?”
아셰는 별 감흥 없이 반응했지만, 이단은 리에를 안은 채로 그녀에게 다가와 짧게 입을 맞추었다.
“네가 캐넌에 끌려갔다는 이야기를 듣고, 바로 함락시킨 곳이야.”
“응?”
“널 보기 위해서는 저 성과 연결된 히치 해협이 가장 빠른 길이었거든. 그동안은 혁명군 내에서 마법을 쓰지 않았는데…… 저 성을 함락시키려고 마법을 썼지.”
그는 리에를 안은 채로 동쪽 성벽을 가리키며 말했다.
“저 성벽을 아빠가 혼자 다 무너트렸어.”
“정말?”
리에의 입이 벌어졌다.
“거짓말! 성벽을 혼자 무너트릴 수 있는 사람은 없어!”
“진짠데.”
이단은 딸의 볼을 아프지 않게 꼬집으며 말했다.
“네 엄마를 몇 시간 보기 위해서였지.”
아셰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의 옆모습을 바라보았다. 그토록 혼란스러운 시절이 있었다. 성벽 하나를 무너트리지 않고서는 도저히 연인의 얼굴을 볼 수 없는 사정이 있었던 혼돈의 시대. 그녀의 딸이 그 혼돈을 겪지 않아서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고 생각했다. 이렇게 서로의 얼굴을 아무렇지도 않게 지겹도록 볼 수 있고, 함께 가고 싶은 곳들을 갈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축복받은 일인지.
그가 이 성을 무너트리는 순간 사브르는 그녀의 아이를 지우기로 결심했겠지. 그러나 아셰는 그런 생각들은 억지로 지울 것이다. 그런 것들에는 적당히 눈을 감고, 행복을 위해 노력하기로 했으니까. 누구나 완벽한 상황이어서 행복한 것은 아닐 것이다.
그들은 의식적으로 다니엘이나 사브르에 대한 이야기는 피했다. 그녀가 황궁에 있을 때만 해도 사브르는 몹시 건강했는데, 통령이 되자 불면증에 시달리며 종종 호흡 곤란으로 발작을 일으킨다는 소문이 온 대륙에 자자했으나 굳이 이단에게 묻지 않았다.
“그럼 또 해 봐.”
리에가 눈을 반달로 휘며 이단에게 매달렸다. 아셰가 웃음을 터트렸다.
“이제 못해.”
이단은 난감하다는 듯이 대답했고, 리에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콧방귀를 꼈다. 아빠가 거짓말을 한다고 생각하는 것이 뻔했다. 버둥거리는 리에를 놓아주자, 리에는 다시 냇가로 뛰어갔다. 리에에게는 어릴 때부터 사랑을 듬뿍 받은 아이들의 특징이 그대로 살아 있었다. 상처 받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고, 순수한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았으며, 그 어떤 어두움 없이 밝고 명랑했다.
“그래, 풀은 실컷 봤어?”
“실컷 봤지.”
아셰는 손에 든 한 아름의 붉은 꽃을 보여 주며 말했다.
“근데 우점종이 바뀌었어. 스타람의 풀들이야.”
“스타람의 풀이라고? 그게 왜 여기에 있지?”
“스타람과 교역을 하면서 씨앗들이 물류에 섞여 오니까 그렇지.”
그녀가 씁쓸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옛날 스타람의 풀들은 마력이 없어서 대륙에 씨를 뿌리지 못했어. 그런데 이제 마력이 사라지면서, 스타람의 풀들이 다른 풀들보다 더 잘 자라고 있는 거야. 아마 아메탄의 전기 기술도 영원하지는 못할 거야. 풀들의 마력을 쓴다던데.”
“어쩔 수 없지. 영원한 건 애초에 없어.”
이단은 그녀의 어깨에 손을 얹으며 말했다.
“엔리히의 힘은 정말 사라진 거야. 이제 오롯이 인간만의 문명을 세울 때가 됐어.”
그녀는 꽃을 한 아름 안고, 냇가에서 물장구를 치는 리에를 바라보았다. 그들의 딸은 엔리히의 성을 타고 태어났지만 마법에 능하지 못했다. 그들 말고도 요즈음에 마법을 능하게 쓰는 사람들은 거의 없었다.
“마법구가 없어도 전구가 있으니 늦게까지 책을 읽을 수 있고, 전축으로 음악도 들을 수 있잖아. 난 리에의 세상에 마법이 없어도 상관없어.”
아셰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가 붉은 꽃으로 시선을 내리깔며 말했다.
“그래, 스타람 풀들도 차를 우릴 때에는 나쁘지 않아. 색깔도 예쁘고 향도 좋거든. 차에는 마력이 필요하지 않으니까.”
그녀는 성의 가장 전망이 좋은 곳에서 작게 찻집을 운영하고 있었다. 그녀의 차 우리는 솜씨는 여전히 뛰어나서, 아주 멀리서도 아셰의 차를 마시러 손님들이 오곤 했다. 특히 박물관의 방문객들에게는 이미 명소로 소문이 나 있기도 했다. 리젠이 한 번 놀러 와서, 이런 곳으로 은퇴하고 싶다는 소망까지 밝힐 정도였다.
가끔 과자 굽는 것을 배운 이단이 티푸드를 하라며 쿠키를 구워 주곤 했는데, 그럴 때마다 아셰는 지금 죽어도 좋을 정도로 행복하다고 생각했다.
“이단.”
아셰는 낮게 그의 이름을 불렀다.
“신념이 있다고 했잖아. 아주 오래전에.”
“……응.”
“넌 공화주의자였잖아. 이 세상에 만족해?”
그녀의 하나로 묶은 풍성한 금발 머리가 바람에 살짝 휘날렸다.
“난 공화주의자는 아니지만…… 그래도 황궁을 벗어나 보니, 위에서 열두 영주가 치고받고 하는 건 아무런 신경이 안 쓰이던데. 적어도 그런 게 네가 꿈꾸던 세상은 아닐 것 아냐.”
“한 번에 이상향이 올 수는 없어. 예전보다 나아지면 일단은 그걸로 된 거지.”
이단은 한숨을 쉬었다.
“사브르의 말이 맞아. 다수의 생각은 다르고 그러다 보면 최선의 길에서는 멀어져. 네가 약초학을 잘하고 내가 군사학을 잘하는 것처럼 나라를 이끄는 것도 다수보다 훨씬 더 잘하는 한 사람이 분명 존재할걸. 그 사실은 인정해야만 해.”
아셰가 눈을 가늘게 떴다. 모두가 카를 왕과 이브나 왕비의 이야기를 말하며 ‘해피엔딩’이라고 좋아하지만 역사에서 끝은 없다. 이단의 말처럼 한 번에 이상향이 올 리 없고, 그 어떤 논란도 없는 ‘좋은 세상’이라는 것은 영영 인간의 역사에 나타나지 않을 가능성이 높았다.
“그래도 더 이상 내 아버지 같은 미친 폭군은 공화정 역사에 없을 거야. 무능하고 멍청한 사람이 지도자가 될 수는 있어도, 무고한 희생은 없을 테니까. 최선은 아니어도 최악은 피할 수 있다는 데에 의미를 두지. 공화정부를 내 발로 떠났어도, 난 리한 카드민 같은 회의주의자는 아냐. 평범한 인간으로서 난, 리에가 공화국에서 자랄 수 있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해.”
그는 다시 뛰어오는 리에를 보고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뭐든지 한 발짝으로 완성되는 건 없어. 그래도 네 덕에 다음 세대들이 체계적으로 교육받고 있으니까 스타람보다는 나을 거야. 공화정은 뭐든지 느릴 수밖에 없지만, 그래도 계속해서 나아간다는 게 중요한 거니까.”
“좋은 책을 써.”
아셰는 싱긋 웃으며 말했다.
“역사만큼 좋은 교훈은 없으니까 말이야. 스타람에서 공화정이 어떻게 실패했는가도 써 봐.”
“그건…….”
이단은 고개를 저었다.
“리한에게 이미 선수를 뺏겼어. 리한 카드민보다 더 잘 쓸 자신도 없고 말이야.”
* * *
“에른 오빠!”
리에는 제 아버지의 품에서 아등바등하며 내려와, 그대로 여덟 살배기 아이에게 안겼다. 단정한 반곱슬 갈색 머리를 한 소년이 자신에게 안기는 리에를 안아 주며 본능적으로 이단의 눈치를 보았다. 이단은 표정 관리를 못하고 선한 초록색 눈의 소년을 노려보고 있었다. 아셰가 재빠르게 끼어들었다.
“에른, 오랜만이야.”
“방학이 끝나 다시 엔리히로 가는 길에, 고모님께 인사를 드리고 싶어 왔습니다. 아버님께서도 안부 전하셨고요.”
어른스러운 에른의 말에 아셰가 웃으며 갈색 머리를 쓰다듬었다. 에른은 켄의 아들로 1년 전부터 수도 엔리히의 의료학교에 다니고 있었다. 나이가 어린 데도 불구하고 성적이 좋으며 성실하다고 교사들의 칭찬이 이어졌다.
“켄은 잘 지내니?”
“건강하십니다. 형도 잘 지내고 있어요.”
더 이상 켄에 대한 이야기를 했다간 이단이 참지 않을 것 같아서, 그녀는 황급히 화제를 바꿨다.
“그래, 학교 기숙사에는 언제 들어가니?”
“이틀 후요.”
“그럼 그동안 머무르다 가렴.”
리에는 고개를 흔들며 쫑알거렸다.
“싫어. 열 밤 자고 가.”
리에가 매달리자 에른은 난감하다는 듯이 웃었다. 이단은 아셰의 어깨를 감싸며 속삭였다.
“저 자식 열다섯부터는 이 성에 못 오게 해.”
“뭐?”
아셰가 기가 막힌다는 듯이 노려보자 그가 낮게 중얼거렸다.
“열다섯이면 여자한테 수작 걸 나이란 말이야.”
에른과 리에는 손을 잡고 성의 정원에서 함께 놀기 위해 뛰어나갔다. 아이들의 뒷모습을 보며 아셰가 그의 팔을 아프지 않게 때렸다.
“리에가 에른에게 수작을 걸면 몰라도…… 난 아무리 우리 딸이어도 에른이 아깝다고 생각해.”
“무슨 소리야?”
이단은 생각만 해도 마음이 무너진다는 듯이 미간을 찌푸렸다. 아셰는 그가 이럴 때마다, 아이를 원하지 않는다고 꾸준히 말해 왔던 젊은 날의 이단이 못 미더울 지경이었다.
“에른이 대체 뭐가 어때서? 어디가 부족한데?”
“다 싫어.”
그가 짜증을 냈다.
“제 아비를 똑 닮아서 보기만 해도 기분 나쁘다고. 리에가 저놈을 좋아하는 것도 싫어.”
그 말에는 할 말이 없었다. 에른은 켄을 닮아 키가 훤칠했고, 부드러운 갈색 머리에 선한 초록색 눈을 가지고 있었다. 게다가 무엇보다도 몇 마디 말만 섞어 보아도 배려가 깊고 선량하여 아셰는 늘 기특한 마음에 웃음 짓곤 했다.
“들어가자, 들어가.”
아셰는 그의 등을 떠밀며 한숨을 쉬었다. 아무래도 풀어지지 않는 그의 표정을 바라보며, 그녀가 그의 허리를 껴안으며 방으로 향했다.
“널 꼭 닮은 아들을 낳아서 내가 에른보다 예뻐해 줄게. 그럼 되겠니?”
그를 달래려는 기색이 역력한 아내를 보며 이단은 피식 웃을 수밖에 없었다. 그가 그녀의 볼에 입 맞추며 재미있다는 듯이 웃었다.
“네가 그런 말을 하면 더 이상 짜증을 낼 수가 없어.”
“그래, 애들은 애들 놀라고 두고…….”
그녀가 방문을 닫으며 눈웃음을 쳐 보였다. 한때, 열다섯의 나이에 그를 홀렸던 바로 그 반달 모양 눈웃음이었다.
“우리도 우리끼리 놀면 되잖아.”
“알지?”
그가 그녀의 유혹에 그대로 응하며 거세게 체중을 실어 그녀를 침대에 쓰러트렸다.
“난 아내랑 놀 때, 플라토닉 싫어해.”
“나는 이제…….”
아셰는 그의 목에 손을 감으며 속삭였다.
“너에 대해서는 다 알아.”
아메니티도, 황궁도 아닌 이 작은 성에서 그들은 그동안 편안히 잠들었고 쏟아지는 햇살을 받으며 언제든 손을 맞잡은 채 산책을 했다. 오랜 시간 동안 쌓여 있던 대화는 성의 곳곳에서 이루어졌다. 그들이 함께 하고, 또 떨어져 있던 그 많은 시간 동안 각자의 이야기가 쌓여 갔기 때문이었다. 꿈결 같은 시간들을 함께 살면서, 아셰는 난생처음으로 이곳에 평생 살다가 이대로 묻혀도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아, 생각해 보니 굳이 여기에 묻히지 않아도 괜찮았다. 그냥 이단이 곁에 있으면 그걸로 되지 않을까 싶었다. 자신의 자리가 어디일까 생각한 지도 너무 오래되었다. 아마도 어디에서든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상관없어졌기 때문일 것이다. 어쩌면 아무것도 고민하지 않아도 되는 그곳이 그녀의 자리 아닐까. 예를 들어 그의 옆자리 같은 것.
<完>
[다음 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