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5화 (235/256)

  

105화.

“데, 데리고 나가…….”

상충되는 두 명령 중 굳이 더듬거리는 사브르의 말을 들을 필요성을 느끼지 못한 하인이 그대로 떠났다. 이단이 킬킬대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직접 겪어 보니 권위는 좀 없는 것 같아도 지위의 무게가 좀 되지? 도대체 멋대로 할 수가 없어. 마치 사슬과 같아. 하긴, 지도자를 그렇게 꽁꽁 묶어 두기 위해 우리가 대륙을 뒤엎으며 혁명을 이루어 냈지.”

“이, 이거 노, 놓고…….”

“하지만 나와 아셰는 그 무게 때문에 지금까지 너무 먼 길을 돌아왔거든.”

“하, 하인이 다 봤어. 다, 당신이 지금 날 죽이면, 바, 반드시……!”

“누가 죽인대? 안 죽여, 걱정 마. 황궁은 안전한 곳이니까.”

이단이 어찌나 그의 두 손을 꽉 잡아 쥐었는지 거의 손목이 꺾일 지경이었다. 캄캄한 밤, 모두가 잠들어 있는 시간, 화려한 황궁에는 일하는 사람이 얼마 없었다. 고요한 적막 속에서 이단은 마치 자신이 황제가 된 것 같다는 기분에 킬킬거리며 웃었다. 아버지는 이렇게 한밤중에 밑도 끝도 없이 사람을 죽이곤 했다.

아, 이 황궁에서 조금의 피도 보지 않으려고 다짐했는데. 하지만 아셰는 그의 유일한 예외였다. 그 사실을 알고 있는 사브르의 얼굴이 계속해서 창백해졌다.

“근데 왜 이 안전한 곳에서 넌, 홀로 계속 총을 들고 다녔을까.”

“…….”

“네가 짜고 있는 판을 위해 뒤에서 한 짓이 좀 많지? 아직도 진실을 모르는 피해자가 나뿐일 리가 없지. 찔리는 게 많으니 불안할 수밖에.”

“나, 나는 다니엘 왕의 부탁을 들어준 것밖에 없…….”

“부탁? 왕족이 한낱 정보원한테 판단을 맡길 리가 있나? 정보를 다루려면 각기 다른 사람의 특성 정도는 이해하고 있어야지. 몰랐다고 해서 책임을 피하면 안 돼.”

이단이 들끓는 목소리로 이를 갈았다. 새삼 이제는 돌이킬 수 없는 과거가 떠올라 울컥했기 때문이다. 만일, 그가 아셰의 임신을 제때 알기만 했어도, 어떻게 해서든 데려와 보호했을 것이다. 가장 안전한 곳에 그녀를 두고, 함께 아이의 이름을 고민하고, 그녀가 좋아하는 것들을 온통 방 안에 채우고, 답답해하더라도 잘 때 이불을 덮어 주고. 그 어떤 전쟁 중이더라도 절대로 그의 곁에서 떨어트리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 사브르를 죽이지 않는 것은 앞으로 다가올 또 다른 미래 때문에. 그리고 이단이 사실을 알게 되면 뒷생각을 하지 않고 사브르를 죽일까 봐 5년 동안 안절부절못했던 아셰의 시간들 때문에.

“아무리 예전같이 마력을 마음대로 쓸 수는 없어도, 이 정도는 할 수 있지.”

그가 사브르의 손을 부서질 듯 잡았다.

“보통 사람도 내 마력을 맞으면 꽤 타격이 크거든.”

“지, 지금 뭐 하시는 겁니까?”

사브르의 눈이 커졌다. 마력을 조금도 못 느끼는 그는 자신의 몸에 어떤 변화가 일어나고 있는지 전혀 알 수가 없었다.

“예전에 치료해 보겠다고 다 죽어 가는 스타람인에게 마력을 넣어 본 적이 있었는데, 후유증이 평생 간다고 하더군. 통령은 서명해야 할 일이 많으니 펜을 쥘 정도만 봐 주지.”

“다, 당신!”

“하지만 방아쇠는 못 당길걸.”

사브르의 두 손에 마력을 모두 전달한 이단은 싱긋 웃으며 그의 손을 놓고 뒤로 물러섰다. 사브르의 두 손마디 관절마다 어느새 피가 줄줄 흐르고 있었다. 고통은 없었으나 더한 절망감이 사브르를 덮쳤다. 이단은 싱긋 웃었다.

“운동 신경도 형편없고, 총도 못 쏘고, 숨겨진 적들은 셀 수 없이 많고, 지위의 무게는 무겁고. 앞으로 살아갈 때 조금 힘들겠군.”

사브르가 절망적으로 소리를 지르며 그에게 달려들었으나, 거짓말처럼 목을 조르려던 손가락에는 아무런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이단이 그대로 그의 가슴팍을 발로 차며 씩 웃었다. 그대로 사브르는 바닥에 쓰러졌고, 이단은 그의 명치를 발로 밟으며 그를 오만한 눈으로 내려다보았다.

“사실, 전쟁이 끝난 후부터 네가 마음에 안 들었어. 네가 아셰와 둘이 뭘 한다는 걸 눈치챘을 때부터 죽이고 싶었지.”

숨이 막힌 사브르는 쿨럭대며 이단을 노려보았지만 이단은 섬뜩한 미소를 띤 표정을 조금도 바꾸지 않았다.

“아셰가 네게 아메탄 왕국의 역사를 이야기하려고 했을 때, 네 귀를 베어 버리고 싶었어. 옛날에 나와 침대에서 속살거리던 주제였거든.”

여전히 아셰에게는 할 수 없는 이야기였다. 그는 그녀와의 아주 작은 순간조차 남들과 나누고 싶지 않았다. 사랑하는 여자이기에 들키고 싶지 않은 생각이 있었다. 특히나, 이렇게 황제를 꼭 닮은 것 같은 잔인함이나 누구도 이해할 수 없는 집착 같은 것은.

“내가 황제였다면, 내 결혼식 때 너희 둘이 오랫동안 내 시야에서 벗어났을 때 이미 넌 눈이 뽑혔을 거야. 아니면, 아셰가 너랑 얘기하겠다고 나를 내보내고 싶어 했을 때 혀를 끊어 놓았겠지. 아니지, 아셰를 캐넌에서 데리고 올 때 내 예상보다 늦었으므로 한참 전에 다리가 잘렸겠군.”

“미, 미…… 컥!”

“내게 미쳤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이 세상에서 단 한 명뿐이야, 사브르.”

그리고 그 당사자는 지금 방에서 평안하게 잠들어 있지. 이단은 오랜만에 술을 마시고 잠든 아셰를 생각하며 사브르의 명치를 밟은 발에 더 힘을 주었다. 그는 그녀 몰래 사브르에게 왔고, 앞으로도 오늘 밤에 대하여 말할 생각이 없었다. 그녀가 그 누구도 믿지 않고 홀로 걸었던 길이다. 그녀의 뜻대로 모든 것을 맞춰 주고 기다리는 남자로 남고 싶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무엇보다, 잔인한 자신의 모습을 보여 주고 싶지 않았다.

“오늘은 내가 기분이 좋아서, 여기서 마무리하고 가지만…….”

이단은 낮게 말했다.

“어느 날 내가 기분이 나쁘면, 사브르 키렐은 총 방아쇠를 당기지 못한다는 이야기를 딜라나에게 살짝 흘려야겠군. 2대 통령이 되지 못해서, 지금 널 죽이고 싶을 테니까. 그 외에도 네 적들이야 차고 넘치겠지.”

손가락을 아예 못 쓰는 건 아니니 겉으로 봐서는 아무도 그가 총을 못 쏘는 지경이라고 알아채지 못할 것이다. 사브르가 만일 이단을 고발한다면 스스로 모두에게 자신의 약점을 알려 주는 셈이 된다. 그러므로 역설적이게도 사브르는 이단에게 제발 말하지 말아 달라고 빌어야 했다.

“제, 제발, 이단, 나는 당신을 위해 여러 가지 일을…….”

“어느 날 내가 기분이 더 나빠지면, 네 내장이라도 부술지 모르지. 난 이 황궁의 비밀 통로를 아는 이 세상 유일한 사람이거든. 불안이라는 게 사람을 정말 미치게 하는데, 마치 내 불안을 모두 넘기고 떠나는 기분이라 산뜻한걸.”

마지막으로 이단은 쓰러져 있는 그의 얼굴을 발끝으로 툭툭 두드렸다. 손으로 어깨를 만져 줄 가치조차도 없었다.

“좋은 밤 되길 바랄게, 사브르.”

그는 미련 없이 뒤를 돌아 복도를 나서고, 옆방에서 대기하고 있던 하인에게 기분 좋게 인사까지 해 주었다. 이제 자신의 방에 돌아가 아무 일도 없던 것처럼, 잠에 빠져 있는 아내의 머리카락을 쓸어 줄 것이다. 아무런 잔인함 없이 어느 정도 자비를 베풀어 훌훌 털어 버리고 나가자는 그녀의 결정을 존중한 것처럼. 그에게서 이미 황제의 잔인함은 사라졌기에, 그래서 그녀가 그가 눈이 돌아 버릴까 봐 평생 걱정하지 않도록. 그녀의 말을 듣고 모든 것을 참아 낸 남자인 것처럼.

많이 참은 건 맞지. 그는 손에 배어난 사브르의 피를 아무렇게나 옷자락에 닦았다. 감히 그의 아이를 없애겠다 판단하고, 아셰를 이용하려고 하다니……. 사지를 다 자르고 황궁 밖에 내다 버릴까 치열하게 올라오는 충동을 참고 그는 섬뜩한 미소를 지웠다.

“이럴 줄 알았지. 이불 좀 덮고 자라니까.”

이단은 색색 숨소리를 내며 잠들어 있는 아셰에게 이불을 덮어 주었다. 아셰는 설핏 잠에서 깨어 중얼거렸다.

“이단…… 음, 깼어?”

“잠시 씻고 왔어.”

“옷은 왜 안 입고…….”

“더러운 게 묻어서 버렸어.”

그가 싱긋 웃자 아셰 역시 마주 웃어 준 뒤 다시 뒤척이며 잠들었다. 그녀를 뒤에서 안고, 그가 평온한 표정으로 귓불과 목덜미에 입을 맞췄다. 그러고 보니 사브르의 명치를 밟을 때 무의식적으로 발에 마력을 실은 것 같기도 하고. 더 이상 기억하지 않기로 마음먹은 그는 그냥 생각을 멈췄다. 아셰가 아닌 다른 사람에 대한 생각을 멈추는 건 그에게 전혀 어려운 일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평온하게 잠이 든 그녀를 안으니 희미한 살 내음에 눈이 감겼다. 이대로 잠을 청할 수 있을 정도로 머릿속이 깨끗했다. 내일 아침 일찍부터 이사를 시작하려면 바쁠 것이다.

에필로그

“그래서, 구해 왔어?”

“응. 다 모으는 데에 시간은 좀 걸렸지만.”

이단은 가방 안에 든 얇은 종이 몇 장을 꺼내 들었다. 그가 씩 웃으며 말했다.

“21대 황제 에베른이 가장 사랑했던 비 에스더에게 보낸 편지들이야. 에스더는 에베른의 집착에 지쳐 사촌오빠의 영지인 이 시골로 도망쳐 왔지만 결국 자살했지.”

아셰는 눈을 가늘게 뜨고 몸을 한 번 떨었다. 종이에 쓰인 빼곡한 필체만 봐도 정상이 아닌 것 같았다. 이단은 주위를 살펴보다가, 저 멀리에서 뛰어오는 어린아이를 보고 그대로 팔을 벌려 활짝 웃었다.

“리에!”

그들의 딸, 리에는 이단도 아셰도 닮지 않았다. 붉은 고수머리의 여자아이가 태어났을 때, 이단은 가만히 그녀를 바라보더니 ‘어머니를 닮았군.’이라고 중얼거렸다. 어릴 때부터 밝고 명랑한 성격과 천방지축으로 뛰어다니는 폼이 어렸을 때부터 신중했던 둘을 전혀 닮지 않아 가끔은 신기하기도 했다.

“아빠!”

이단은 힘껏 달려온 꼬마 여자아이를 안고 빙글 돌렸다. 아이를 원하지 않는다며 단언할 때는 언제고, 그는 남들보다 늦게 본 자신의 딸을 끔찍하게 아꼈다. 아셰가 황궁을 나온 뒤 바로 임신했을 때에, 그는 열 달 내내 이름을 고민하며 그녀의 곁을 지켰고 그 옛날에 했던 약속대로 튼튼한 나무 침대를 직접 만들어 주었다. 방 하나에 목화솜과 고급 가죽들을 잔뜩 채웠음은 물론이었다.

“저기서 꺾어 왔어!”

리에가 작은 손으로 보랏빛 꽃을 그의 귀 뒤에 꼽아 주었다. 아셰는 그들을 보면서, 아주 옛날 자신의 선택이 옳았음을 속으로 감사할 뿐이었다. 사브르를 죽이고 그녀마저도 죽었다면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자신의 딸을 얻을 수 없었을 것이고, 이단도 이토록 행복하다는 표정을 평생 지어 보지 못했을 것이다.

[다음 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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