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4화.
그녀는 멀뚱히 그를 보다가, 한 번 소리 내어 웃고 나무 컵에 술을 따라 마셨다. 그녀가 눈을 가늘게 뜨고 말했다.
“만일 네가 황자가 아니고, 내가 왕녀가 아니었다면…… 열다섯과 열여섯에 우리는 무슨 대화를 했을까, 여기서? 적어도 죽이고 죽는다는 말이 왔다 갔다 하지는 않았겠지.”
“그래도 비슷했을걸.”
그가 그녀의 입에 살짝 입을 맞추고 말했다. 달큼한 와인 향이 퍼졌다.
“마음에 든 여자에게 남자들이 할 수 있는 말이란 비슷하니까. 이상형 같은 걸 물어봤겠지. 나는 그때 결혼 상대의 조건을 물어봤지만.”
“그때부터 뭔가 너한테 끌려간 기분이야. 키스도, 결국 날 위한다고 네가 해 주는 셈이었지만 네가 더 좋아했잖아.”
그녀는 곱게 눈을 흘기고, 컵에 남아 있던 술을 모두 마셨다. 술을 마신 지 너무나 오래된 것 같았다. 기분 좋은 몽롱함이 몸에 퍼졌다.
“늘 그랬지. 네 궁에서는 안 그랬는 줄 알아?”
그가 키득대며 웃었다. 그녀는 입을 삐죽대다가 취기에 몸을 맡기며 나른하게 말했다.
“괜히 제국의 황자가 아니야. 나보다 한 수 위였다니까.”
“내가 황자가 아니고, 네가 왕녀가 아니었다면…… 조금 더 모든 게 수월했을지도 모르지.”
그는 그녀의 머리카락을 쓸어내리며 밤하늘에 먼 시선을 던졌다.
“누군가를 죽이라고 충고하는 게 아니라, 당장 내일 만나자며 약속을 잡았을지도 모르는 거고. 제국엔 아름다운 곳이 많다며 수작을 부리지 않았을까.”
“흐음.”
“결혼하고 싶은 상대의 조건 대신, 네가 정말 좋아하는 것과 싫어하는 것을 물었겠지. 음식이나 꿈, 색깔이나 취미 같은 것.”
아셰는 눈웃음을 치며 그를 올려다보았다. 그녀가 그의 허리를 끌어안으며 말했다.
“……이단.”
“왜?”
“아주 많이…… 정말 많이 늦었지만…… 대륙을 몇 바퀴 돌 정도로 돌아왔지만…….”
그의 검은 눈이 그녀를 빤히 바라보았다. 그녀가 배시시 웃으며 말했다.
“수작을 좀 부려 볼게, 내가.”
그는 어디 구경 좀 해 보겠다는 표정으로 다시 술병을 들었다. 그녀가 작정하고 그에게 눈웃음을 칠 때마다 그는 다 알면서도 그녀에게 다시 한 번 반할 수밖에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음식은 해산물을 좋아한다고 하고, 꿈은 제국의 역사를 기록하는 박물관을 설립하고 싶다고 했고, 취미는 역사서를 읽거나 신체를 단련하는 것이고…… 좋아하는 색깔은 뭔데?”
그가 술을 마시다가 크게 웃었다. 그녀는 그에게서 술병을 받아 나무 컵에 쪼로록 따랐다. 한 병을 가져왔지만 거의 다 바닥나고 있었다. 그는 잠시 생각하다가 대답했다.
“음, 금빛?”
“좋아하는 동물은?”
“여우.”
“좋아하는…… 어머!”
그녀가 컵에 술을 마시다가, 취기에 그만 컵을 놓쳐 버렸다. 그녀의 몸에 붉은 술이 그대로 쏟아지고, 나무 컵은 데굴데굴 굴러 지붕 끝에 걸렸다. 울상이 된 그녀가 한숨을 쉬며 손가락에 맺힌 와인 방울을 핥았다.
“……내려가서 목욕을 한 번 더 해야겠다……. 우리 어디까지 했지?”
그가 그녀의 목덜미를 타고 흐르는 와인 방울을 풀린 눈으로 바라보았다. 그녀는 고개를 갸웃하다가 말했다.
“싫어하는 것으로 넘어가 볼까? 싫어하는 것은 뭐야?”
“……음.”
아셰의 말에 그가 다가와 그녀의 입술을 핥았다. 아주 오래전, 첫 키스를 하던 소년과 소녀처럼 그들은 오랫동안 입을 맞추었다. 이제 아셰는 그때처럼 그녀의 몸을 밀어붙이는 그를 피하지 않았다. 그대로 지붕의 빗면에 몸을 기댄 그녀는 그가 천천히 그녀의 옷을 끌어 내리고 몸에 흐른 와인 방울을 핥는 것을 지켜보았다.
“싫어하는 것은…….”
그가 그녀의 가슴골에 흐른 와인을 혀로 천천히 핥으며 말했다.
“플라토닉.”
그녀는 그의 장난기 어린 눈을 보고, 자신도 모르게 깔깔 웃었다. 그의 혀가 이미 부푼 그녀의 유두를 핥았다. 그의 손이 어느새 그녀의 허벅지 사이를 벌리고 있었다.
“제국엔…….”
어쩌면 그 옛날 소년 시절에 하고 싶었던 말을 드디어 입에 담으며, 그가 씩 웃었다.
“……멋지고 아름다운 곳이 많아. 아메탄과는 비교가 되지 않지. 수도 엔리히만 해도 아메탄의 전체 면적보다 넓거든.”
“하아, 아…… 그러신가요, 황자님? 아…….”
그의 손이 그녀의 골반과 허리를 타고 천천히 그녀를 감았다.
“아주 오랫동안 상상했어. 나를 옭아맨 모든 것에서 해방된 채 네게 정식으로 말하는 순간을. 그 시간들을 참지 못해 너를 어떤 상황에서도 곁에 두려고 제정신이 아니었지만…….”
그의 눈은 그녀를 바라보며 웃고 있었지만, 이상하게 목소리에 긴장이 묻어나고 있었다. 마치 열다섯 소년처럼.
“나, 이제 아무런 권력도, 뛰어난 마법도 없어. 너를 위해 이제는 국경을 아무렇게나 넘지 못해. 그냥 네 앞에 선 한 남자일 뿐이야. 어쩌면 여전히, 조금 정상이 아닐지도 모르는.”
“…….”
“그래도 난, 네가 뭐든지 해도 좋은 아름다운 성을 하나 가지고 있어. 네게 자유롭고, 외롭지 않고, 평온한 삶을 약속할 수 있는데.”
그가 한쪽 손을 들어 긴 손가락으로 그녀의 입술을 훑고, 천천히 볼을 감쌌다. 그녀의 몸을 안고 눈을 마주친 그의 얼굴에 다정함이 가득했다.
“너를…… 너를 진심으로 사랑해. 우리의 삶은 이제 많이 달라질 거고, 더 행복해질 거야. 혼자 걷는 길을 오늘로 끝냈다면, 앞으로 네 길에 항상 내가 있었으면 좋겠어.”
“나 이제 딱히 걷고 싶은 길이 없는데?”
“그럼, 역대 황제들의 흔적을 찾으러 가는 나의 여행길에…… 같이 가지 않을래? 내 손을 잡고 세상 구경이나 실컷 하는 건 어때?”
아셰의 푸른 눈에 살짝 눈물이 고였다. 진정으로 함께하자며 손을 맞잡기까지 너무 오랜 시간이 걸렸다. 왜 늘 사랑한다고 생각했으면서도 그를 만난 것이 평생의 가장 큰 행운이라는 것을 몰랐을까. 그의 손이 점차 허벅지 안쪽으로 들어와 부드럽게 긁어냈다. 어느새 가슴에 자리 잡은 다른 손은 돌기를 쓸어 냈다.
“대답 안 해 줄 거야?”
장난스러운 목소리에 열기가 담겼다. 짙은 숨결이 쇄골, 목, 귀, 볼, 입술을 향해 흩어졌다. 능청스럽게 핥아 올리는 혀의 감촉에 아셰는 몸을 움찔거리며 신음을 뱉었다.
“아…… 아읏…….”
“대답할 때까지 안 놔줄 건데.”
음핵 주변에서 지분거리는 손길에 그녀는 허리를 바르르 떨었다. 결국 그녀는 그의 목에 팔을 감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보다는 조금…… 나이가 들었지만, 아직 넌 젊고 잘생겼으니까.”
그녀의 속삭임에 그가 살짝 웃으며 그녀의 아랫입술을 꾹 물었다. 아셰는 그의 손에 몸을 맡기며 눈을 감았다.
“아, 근데…… 대답해도 안 놔줄 거긴 해.”
그녀는 웃을 정신도 없었다. 가쁘게 숨을 내뱉느라 살짝 벌어진 입술 사이로 그의 혀가 단번에 밀고 들어왔다. 그녀의 입 안을 부드럽게 파고들며, 그는 못 참겠다는 듯이 다급하게 그녀를 끌어안았다.
더 이상 아셰는 이루고 싶은 것도 지키고 싶은 것도 없었지만, 이상하게 지금에 와서야 정말로 그녀의 인생을 사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의 몸을 받아들이며 갑자기 떠올린 것은 네 장의 카드였다.
‘끝났구나.’
언젠가부터 걸어왔던 외로운 길도, 안정과 신뢰 없이 치열하게 빠져들었던 불꽃같은 사랑도, 마음을 둘 수 없어 홀로 헤매던 이방인의 위치도. 게다가, 이곳에 다시 돌아올 때까지 자유롭지 못했던 타고난 혈통까지. 그녀는 모든 것이 이제 끝났다는 생각을 했다.
* * *
한밤중, 굳게 닫힌 문이 거세게 부서졌다. 잠이 들지 못해 충혈된 눈으로 안절부절못하던 사브르는 덜덜 떨면서 총을 그대로 문을 향해 겨눴지만, 순식간에 달려온 하인 때문에 차마 방아쇠를 당기지 못했다.
“새로운 통령이 이렇게 겁쟁이여서야.”
문을 부순 장본인, 이단은 싸늘하게 웃었다. 급히 달려온 하인에게 이단이 말했다.
“마지막으로 다음 통령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어서 찾아왔는데 문이 잠겨 있지 뭐야.”
“아, 그러셨습니까…….”
“보다시피, 술이 좀 취해서. 몇 번 두드리니 부서지더군. 수리비는 내고 떠날 테니 걱정하지 마.”
하인은 쭈뼛거리며 부서진 문을 살폈다. 이단은 잔해를 넘어 그대로 사브르에게 향했다. 덜덜 떨리는 손에서 총을 그대로 빼앗아 아무렇게나 침대에 내동댕이쳤다.
“리한 카드민이 언제나 널 형편없는 군인이라고 불렀지. 예상대로 총이 없으면 몸싸움조차 제대로 못하는군.”
“이, 이거 놓고…….”
“왜 못 쐈어?”
그가 사브르의 두 손을 잡으며 속삭였다. 그의 악력이 너무나 세서 꼼짝도 할 수가 없었다. 사브르는 아무런 말도 할 수가 없었는데, 그 옛날 전쟁터에서 보았던 그의 잔인함이 그대로 느껴졌기 때문이다. 이단의 번득이는 눈 속에서 곧 미쳐 버릴 것 같은 사람의 위압감이 느껴졌다. 피가 모조리 빠져 나갈 것 같은 기분에 몸이 굳었다.
“네가 첫 발을 쏘지 못하면 더 끔찍한 일이 벌어질 걸 알고 있잖아. 그런데 왜 못 쐈어?”
스산한 이단의 목소리가 천천히 이어졌다. 그가 웃고 있었기에 더 소름이 끼쳤다. 마치 황제를 죽이고 그들에게 다시 합류했을 때처럼 끔찍한 살기가 느껴졌다. 저 싸늘하고 음영이 뚜렷한 얼굴은 정말로 사람을 죽이겠다고 다짐했을 때 나오는 표정이었다. 그의 여자인 아셰는 죽을 때까지 모를, 모든 것을 쓸어버리겠다고 외치는 황제의 얼굴.
“최초의 스타람인 출신 통령이 임기 첫날부터 사람을 죽이면 안 되잖아. 그렇지? 그것도 단순히 잠긴 문을 부수었다는 이유만으로. 그럼 이제 다시는 스타람인이 통령 자리에 오를 수 없을지도 모르는데 말이야.”
“……다, 당신, 지, 지금…….”
그의 두 손을 그대로 맞잡은 이단의 눈이 기괴하게 휘어졌다. 사브르가 더듬거리며 하인에게 큰 소리로 말했다.
“저, 전 통령을 데리고 나가라. 술이 많이 취해…….”
“그래도 제정신이니 걱정 마. 별일 있으면 부를게. 단둘이 할 말이 있는 것뿐이고, 마음이 놓이지 않으면 거기 계속 서 있어도 된다.”
하인은 난처한 듯이 둘의 표정을 살피다가, 묘한 긴장감과 위압감에 못 이겨 방을 나가기로 결정했다. 그는 문을 한 번 더 살피고, 꾸벅 인사를 했다.
“옆방에 있겠습니다. 필요하면 부르십시오.”
[다음 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