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3화 (233/256)

  

103화.

회의가 끝나면 뒤도 돌아보지 않고 즉시 황궁을 떠날 줄 알았던 이단은 하루 종일 황궁을 오가면서 짐을 싸기에 바빴다. 다음 날 아침에 출발하기로 한 그는 황궁에서의 마지막 밤, 와인 한 병을 들고 그녀의 손을 이끌었다.

“마지막으로 갈 곳이 있어.”

그녀는 처음엔 멀뚱하게 뒤를 따르다가, 연회장이 가까워 오자 씩 웃었다. 그들은 나란히 손을 잡고 익숙한 정물화를 밀어, 좁은 계단을 기어 올라갔다. 헉헉댈 정도로 높은 계단을 모두 오르자 그들이 처음 만났던 지붕의 풍경이 그대로 펼쳐졌다. 아메탄과는 비교할 수도 없이 넓게 펼쳐진 평원, 그 험준함을 짐작조차 할 수 없는 거대한 산맥, 그리고 검은 밤하늘에 흩뿌려진 수많은 별.

“그대로네!”

얇은 실내복 하나만 입고 온 아셰가 그 때 그 자리에 걸터앉아 탄성을 질렀다. 이 모든 일들은 이곳에서 시작되었다. 어디론가 시집가는 것이 무서웠던 한 소녀가 치기 어린 마음으로 타국의 비밀 통로를 이용했을 때부터. 이상하게 황궁에 온 다음에 그도 그녀도 찾지 않았던 곳이었다. 그가 나무 컵을 하나 건네며 웃었다.

“마실래?” 

처음 만났을 때 건넨 그의 무심한 말에 아셰가 깔깔대며 웃었다. 이단이 그토록 바라던 아무런 의도가 없는 밝고 솔직한 웃음이었다. 그녀는 향이 좋은 와인을 단숨에 마시고 그의 어깨에 기대어 중얼거렸다.

“……15년 정도 지났나?”

이단은 아셰의 옆에 앉아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술을 마셨다. 아셰는 편안하게 앉아 밤하늘을 바라보았다.

“그동안, 정말 수많은 일이 있었는데…… 여기 다시 오니까 모든 게 다 똑같네. 얄미울 정도로 여덟 개의 별은 그대로 있고 저 멀리 평원이 보이는 것까지 똑같아.”

“15년 후에도 똑같을걸.”

그가 그녀의 어깨를 두르고 중얼거렸다. 아셰는 그의 체온을 느끼며 말했다.

“그렇게 떠나고 싶었던 황궁을 떠나니까 어때?”

이단은 술을 몇 모금 마시고, 그녀의 머리카락에 살짝 입 맞춘 뒤 대답했다.

“후련해. 이제야 모든 게 끝난 것 같고, 얼떨떨할 지경이야.”

아셰가 진실을 말하고 다시 사랑을 약속하고 나서, 그 이후 그는 거짓말처럼 많이 안정되었다. 마치 그동안 그토록 정신적으로 불안정했던 것은 황궁과 아셰, 둘 다에게 책임이 있었다는 듯이. 그가 그녀의 옆모습을 바라보며 말했다.

“사브르는 내게 말했어. 네가 이곳에 너무 잘 어울리는 사람이라고. 부정하지 못하는 내가 짜증났지. 공화주의자도 아니고, 혁명 동지도 아니면서 회의에 그토록 잘 녹아든 사람은 앞으로도 네가 전무후무할 거야. 사실 정말 몇 년 더 있었다면 이브나 왕비처럼 공화국의 역사에 남을 수도 있었을 텐데.”

아셰는 그 말에 먼 밤하늘에 시선을 둔 뒤 새침하게 웃었다. 그녀 역시 비슷한 생각을 한 번도 안 해 본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그녀의 표정에는 어떤 아련함마저 묻어났다. 그녀는 손에 쥔 컵을 빙빙 돌렸다.

“나도 내가 좀 똑똑하다고 생각해. 낙후된 지역에서 살아 본 영리한 왕녀니 잘할 수밖에 없지 않겠어? 잘 할 수 있는 일이라 조금 재미있었던 것도 사실이고, 인정하기는 싫지만 보람 있을 때도 꽤 있었어.”

이단은 더 이상 그녀와 대화하며 말을 참지 않았다. 마치 아메탄의 궁에서 그녀를 품에 안고 속삭이던 것처럼 그가 편안히 물었다.

“아쉽지 않아? 넌 이제 영부인이 아니고, 다시 아메탄에 간다면 국빈 대우 같은 건 받지 못할 수도 있어. 혹시나 황궁을 나가고 싶은 내 이기심에 네 행복을 망치는 건 아닐까 가끔 생각했는데.”

“하나도 안 아쉬워. 여긴 내 자리가 아닌 걸 처음 온 순간부터 알고 있었거든.”

“……왜?”

“네가 행복한 곳이 아니니까.”

그녀의 말에 이단은 그녀를 빤히 쳐다보다가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나 감동받은 것 같아.”

“감동받으라고 한 거야.”

그녀가 발랄하게 웃었다. 그의 웃음기 어린 눈에 그녀가 가득 담겼다. 이단이 이런 표정을 짓는 줄 아는 사람은 아마 그녀 외에 세상에 아무도 없을 것이다.

“당장 내일부터 뭘 할 건데? 대륙 구석의 그 큰 성에서.”

“난 하고 싶은 것이 있었어.”

“……응?”

“전쟁이 끝나고, 통치도 끝나고, 자유가 되면 하고 싶었던 것.”

그의 목으로 와인이 천천히 넘어갔다. 그가 자의적으로 끊은 뒤 오랜만에 마시는 술이었다. 스스로 판단하기에 이제는 술을 마셔도 되는 상태라고 생각한 듯했다. 그녀는 그의 단단한 가슴에 기대어 생각했다. 대체 뭘 하고 싶은 건지 짐작도 가지 않았다.

“나는 엔리히 황조의 마지막 황자이고, 초대 통령이니까.”

아셰는 가만히 그의 낮은 목소리를 들었다.

“내 손으로 무너트린 제국이지만 제국은 천 년의 역사를 가지고 있어……. 아버지는 내 손으로 죽였지만, 제국의 역사마저 없애는 것은 내 선조에 대한 의무가 아니야.”

그가 ‘제국의 역사’라는 열 권짜리 책을 스무 번도 넘게 읽었다며 툴툴대던 기억이 갑자기 스쳤다. 아셰는 그동안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지만, 함께 황궁 도서관에 갈 때면 그는 항상 역사책을 찾았었다. 그리고 아주 옛날, 아셰의 궁에서 들려주었던 이야기들도 모두 역사에 기반한 설명들이었다. 그녀가 도서관에 틀어박힐 때마다 곁에서 황제들의 기록을 뒤적이던 모습도 생각났다.

“공화국에서는 재산의 세습을 인정하니…… 황궁의 물건은 내 것이지.”

“어머.”

아셰가 잠시 눈을 크게 뜨고, 기가 막힌다는 듯이 웃었다.

“이단 엔리히, 제국에서 제일 부자가 되겠다. 심지어 영지를 안 받은 대신 보상금도 많이 받았다면서.”

“국고는 어차피 아버지가 거덜 내었으니 폴라리아의 것이고…… 기껏해야 황족의 유물이란 보석이나 책들이겠지.”

“보석과 책? 그게 얼마나 큰 건지 알아?”

“내 소유가 아니고, 선조들이 대를 이어 내게 물려준 거야. 안 팔아.”

이단은 그녀의 머리카락을 쓸며 어깨를 으쓱했다.

“다 모아서 내가 직접 보관할 거야. 모두가 제국을 기억하도록 말이야. 그 끔찍했던 마무리까지. 난 제국을 없앤 것이지 제국의 역사를 없앤 건 아니니까.”

“어…….”

아셰는 머리를 한 대 맞은 것 같았다. 지금까지 생각하지 못했던 사실이었다. 이단은 황족인 것을 싫어한 것이 아니라, 마지막 황족의 손으로 광기에 휩싸인 엔리히 황조를 끝내고 싶어 했던 것 같았다. 결국 마력이 떨어져 제국의 황족이 폭정을 휘두르다가 약하고 처참하게 최후를 맞이하지 않도록, 지저분하게 끝을 보기 전에 자신의 손으로 마무리한 셈이다. 언젠가 그가, 엔리히 황조는 마력의 감소와 함께 천천히 비참하게 끝나고 있는 중이라고 말한 것이 기억났다. 

이단은 그동안, 그토록 싫어하던 황궁도 역사적 장소라며 불태우지 않았고, 제국의 모든 기록물을 그대로 보존했다. 만일 이단이 아닌 다른 사람이 황궁을 점령했다면 가장 먼저 제국을 역사에서 지우려 했을 것이다. 스타람 섬에서는 아카날이 권력을 잡은 뒤 스타람 왕조의 흔적을 모두 없앴으니까.

그는 병들어 가는 황조의 힘을 스스로 끊음으로써 황족의 역사를 지켜 냈다. 그 역설에 아셰는 입술을 깨물었다. 그가 국경 끝까지 쫓아가 황제의 후예를 자처하는 제국군들을 토벌한 것에도 모두 이유가 있었다. 모든 것을 혼자서 마무리한 마지막 황족의 무게를 지고, 그는 조용히 말했다.

“아버지가 여기저기에 팔아 흩어진 유물들도 모을 거야. 역사서도, 건국신화부터 내가 다시 편찬할 거고. 황족들에게만 구전되어 내려오는 이야기가 있으니까. 나는 폭군이었던 아버지를 죽였지만 엔리히 황조를 부정하지는 않아. 굉장한 성군도 많았어.”

“그동안…….”

아셰는 살짝 망연자실한 눈으로 그를 보았다.

“왜 내게 말하지 않았어?”

“……네가 관심이 없었으니까. 물었다면 얘기했을 텐데.”

그를 볼 면목이 없었다. 황궁을 뛰쳐나가고 싶어 하는 줄만 알았지, 정작 무엇을 하고 싶은지는 묻지 않았다. 그녀는 황궁에서 할 일이 있다고 생각하여 이단은 일단 뒷전이었던 것이다. 

“내 삶의 무게를 나도 알고 있어. 마지막 황족과 초대 통령의 명예를 망치기 싫었다던 네 마음을 이해하긴 해. 네가 나를 못 믿었던 건 다 내가 부족했다는 뜻이겠지.”

“그게 아니고…….”

“너는 내 모든 것을 흐릿하게 만든 순간을 지닌 사람이라…… 네게는 이성적이지 못했어. 아마 네가 사브르를 죽여 달라고 부탁했다면 망설임 없이 바로 그를 죽였을 거야.”

“흐릿하게 만든 순간?”

“……네가 나를 괜찮다고 해 주던 순간. 캐넌의 그 끔찍한 방에서, 나를 뒤에서 끌어안고. 황제를 좀 닮았어도 괜찮다고 해 주던 그 순간.”

말문이 막힌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그가 말했다.

“그렇게 하고 싶었던 복수를 하니 어때? 넌 그에게 적절한 응징을 했어. 사실은 우리의 복수지. 너뿐만이 아니라.”

“……후련하고…….”

그녀는 눈을 가늘게 떴다. 그래, 이거면 됐어. 조금 아쉬운 면이 없지 않아 있었지만 그녀는 어쨌든 그녀가 결정한 끝에 더 이상 미련을 두지 않기로 했다. 사람을 직접 죽이는 것은 확실히 당사자에게도 상처가 된다는 사실을 이미 윌리엄을 통해 알고 있었다. 에곤이나 리젠 말대로, 적당히 눈을 감고 이제 앞을 보면서 살아야지. 그 정도는 변할 수 있었다. 아셰는 살짝 미소 지었다.

“……길을 잃은 느낌이야.”

“길?”

“응. 나는 계속 길을 걸어왔거든. 언제나.”

그녀가 손가락을 들어 그의 단단한 다리에 죽 선을 긋는 시늉을 했다.

“어릴 때에는, 어느 이상한 외국에 끌려가 불행해지지 않으려고 온갖 짓을 다 했고. 뭐, 그러면서 이복 오라비도 죽이고.”

“…….”

“아이가 있을 때에는, 그 아이를 지키기 위해 그 어느 곳이라도 갔었고. 그게 68세 당숙에게 시집을 가는 길이어도 말이야.”

길……. 언젠가 하녀가 봐 준 카드점에서 가장 먼저 나온 카드이기도 했다.

“아이를 잃고 나서, 근 10년간 나는 그 사람에게 스스로 죗값을 치르게 한다는 목표뿐이었지. 딱 오늘 모든 것을 이루었으니, 드디어 갈 길이 사라졌어.”

아셰는 한숨을 쉬고 다시 밤하늘을 바라보았다. 그에게는 미안하지만 한 번도 사랑이 그 길이 된 적은 없었다. 이제는 정말로 아이를 보내 주고, 그만큼 행복하기로 결심했다. 그를 위해서 살아남기로 결정했다. 그에게 해 주고 싶은 것들이 아주 많아서. 그와 함께 살고 싶은 새로운 삶이 간절해서. 그가 그녀의 어깨를 더 세게 감싸며 피식 웃었다.

“길을 잃은 게 아니라, 도착한 거야. 네 자리에.”

[다음 편에 계속....]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