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1화.
“……폴라리스 공화국 2대 통령 선거를 시작하겠습니다. 모두 아시겠지만, 민주적인 절차에 따른 통령 선거는 영지의 대표를 선거로 뽑는다는 공화주의 사상을 대표하는 것이며, 한 사람에 의해 전체가 결정되었던 이전의 제정과 궤를 달리하는 중요한 행사입니다.”
그녀의 낭랑한 목소리가 회의실을 울렸다. 회의실에는 그들뿐만이 아니라 증인으로 선 시민의 대표들과 참관을 신청한 사람들도 자리를 가득 채우고 있었다. 그 어느 때보다도 아름답게 치장한 아셰는 조금도 긴장하지 않고 사람들의 시선을 능숙하게 받으며 또박또박 말했다.
“지도자는 세습이 아닌 선출로 그 권력을 가지며, 권력은 국민에게서 나옵니다. 국민을 대표하고 있는 영주님들께서는 부디 합리적인 판단으로 폴라리아의 미래를 이끌어 주시길 바랍니다. 향후 5년간 폴라리아를 대표할 통령 선거에 앞서 후보자 추천이 있겠습니다.”
능숙하고 매끄러운 진행에 관중들이 박수갈채를 보냈다. 잠시 정적이 흐르고, 딜라나의 측근인 에이슨이 손을 들어 말했다.
“오세른의 딜라나 영주를 추천합니다.”
“저도 동의합니다. 딜라나 영주는 현명한 지도자의 자질을 많이 갖추었습니다.”
“네. 또 다른 추천 없으신가요?”
시튼 쪽 사람들은 가만히 숨을 죽이고 있을 뿐이었다. 바보가 아닌 이상 딜라나가 차기 통령이 되면 제명권과 숙청권으로 그들을 모두 없앨 것이라는 생각은 하고 있었다. 특히나 시튼의 진영에는 변절자인 아톰이 여전히 마음을 정하지 못한 상태였다.
사브르는 흥분된 기분을 가라앉히려고 의식적으로 자꾸만 올라가는 입꼬리를 내렸다. 원하던 바가 바로 눈앞에 있었다.
‘저는 본디 누군가를 이끌고 결정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탐욕스럽지 않은 자를 골라내어 어떻게든 위에 올리는 역할입니다. 저는 새로운 땅에서 제 이상이 실패하지 않도록, 평생 동안 냉정한 눈으로 뒤에서 권력자를 감시할 겁니다.’
그가 전쟁 중에 선택한 지도자, 이단은 시튼과 딜라나보다 몇 배는 역량이 뛰어났고 무엇보다 권력을 탐하지 않았다. 게다가 그의 조력자인 아셰는 생각보다 유능했고, 혁명에 참여하지 않았다는 사실 때문에 가질 수 있는 권력에 한계가 있었다. 그는 지난 5년이 마음에 들었다. 앞으로의 5년도 그의 생각대로 흘러갈 것이다.
독재정이 되어 버린 스타람에 다시 돌아가지 않을 것을 다짐하며, 그는 새로운 공화국에서 평생 감시자로 판을 주도하리라 마음먹었다. 지도자가 아닌 자리에서만 보이는 것들이 있었고, 2인자만이 할 수 있는 일들이 있었다. 모든 것은 지금까지 그의 뜻으로 이루어졌다. 다음 선거에서도, 그다음 선거에서도 그가 선택한 사람이 통령이 될 것이다. 이렇게 평생을, 자신의 뜻대로, 역사에 이름은 남지 않아도 그의 이상을 위해 정치판의 흐름을 통제하는 흑막으로 살 생각이었다.
‘너는 감시자로 남고 싶어 하지. 갈 길이 먼 공화국에서 가장 필요한 존재는 본디 지도자가 아닌 감시자니까.’
리한만이 그가 진정으로 원하는 것을 눈치챘다. 그리고 오늘은 그 첫 번째 성과를 이루는 날, 폴라리아 공화국이 세워진 후부터 전력을 다했던 결과가 이루어지는 순간이다. 심장이 두근거릴 정도로 짜릿했다. 사브르는 미소 짓고 있는 아셰를 한 번 바라본 뒤, 씩 웃으며 말문을 열었다.
“저는…….”
“그렇다면 저도 한 명 추천을 하기로 하지요.”
아셰가 부드럽게 웃으며 끼어들었다. 그녀의 또렷한 목소리가 회의실에 가득 찼다.
“우스터의 영주, 사브르 키렐입니다.”
사브르가 믿을 수 없다는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너무 놀라면 말조차 나오지 않는 법이었다. 사브르가 뭐라고 하기도 전에 아셰의 말이 이어졌다.
“온화한 성품을 지녔고, 정보력과 상황 판단력이 뛰어난 사람이니까요.”
“자, 잠시…….”
“저도 동의합니다.”
이단이 무표정으로 말했다.
“무엇보다도 우리 모두가 인정하는 공화주의자니까.”
그가 나른하게 턱을 괴었다.
“기권 같은 건 없다는 조항이 있더군요. 맞죠?”
사브르는 현실성이 없어 온몸이 떨려 오는 것을 의식한 채, 빠른 눈으로 시튼 쪽 사람들의 눈치부터 살폈다. 시튼을 비롯한 그의 사람들이 황급히 눈짓을 주고받고 있었다. 중립이라고 생각했던 두 사람의 표가 사브르에게 간다는 사실은 갑자기 그들의 계획을 바꾸어 버리는 변수였다. 사브르는 숨이 막힐 것 같은 기분으로 캐시를 바라보았고, 캐시는 그 어떤 사람들에게도 시선을 두지 않은 채 이단의 손끝만 바라보고 있었다.
“개인적으로는, 사브르가…… 다음 통령이 되면 좋겠군요. 마법으로 승리를 이끌어 낸 제국의 후계자 다음으로, 마력에서 아예 자유로운 스타람의 이론가가 뒤를 잇는다면 제 핏줄에 대한 부담감도 줄어들 것 같고.”
이단이 웃으면서 덧붙이자, 캐시는 조심스럽게 그의 눈을 바라보았다. 사브르는 캐시의 눈에 고인 눈물을 보고 그녀가 이단의 뜻을 따르기로 정했다는 것을 눈치챘다. 공화주의 국가가 아니었다면 캐시는 이단에게 충성 맹세라도 했을 것이다. 그게 그녀의 사랑이었으니까. 빠른 계산을 마친 사브르의 얼굴이 순식간에 흙빛이 되었다.
“저, 저는 이단 통령의 연임을 추천하는 바입니다. 이단은 여전히 폴라리아에서 상징적인 인물이고…….”
사브르는 급히 말했지만, 이미 딜라나의 표정까지 굳어 있는 상태였다. 누구나 순식간에 바뀌어 버린 다음 통령을 예상할 수 있는 분위기가 되었다. 그는 식은땀마저 흘리며 주변을 바라보았다. 전혀 예상하지도 못한 상황이라 바로 다음 수조차 생각이 나지 않는데, 설상가상으로 보고 있는 눈이 너무 많았다. 관중들의 시선이 그에게 꽂히고 있었다.
시튼의 사람들은 이미 사브르에게 세 표가 갈 것을 짐작하고 있는 셈이었다. 사브르는 아셰의 말마따나 중립적인 인사로 모두에게 온화했다. 딜라나의 편도, 시튼의 편도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사브르는 당황한 얼굴로 진땀을 닦았다.
‘네가 가장 무서운 건, 통령 자리에 다른 누구도 아닌 네가 앉는 거야.’
아셰의 결혼식 날, 축가를 부르러 온 리한은 그의 두려움을 정확히 판단했다.
‘네가 통령 자리에 앉은 그 순간부터…… 네게는 지옥이 펼쳐질걸.’
그리고 그 자리에는 아셰가 있었다. 그는 믿을 수 없다는 눈으로 아셰를 보았다. 아셰는 그의 눈을 피하지 않고 도도하게 차분한 표정으로 앉아 있을 뿐이었다. 그녀는 그가 누군가의 위에 서는 것을 두려워함을 이미 알고 있었다. 사람들 사이에 묻혀 있어야만 누릴 수 있는 자유와, 그 자유에 숨어야만 볼 수 있는 것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녀가 잠시 아메탄 왕국으로 떠났을 때 대리 집행인 자리마저도 거절한 그였다. 리한이 갑자기 스타람을 떠났을 때 떠맡은 사단장 자리에 쩔쩔맸다는 것은 이단도 알고 있는 바였다.
그럼…… 대체 저 둘이 왜 갑자기…… 언제부터……. 사브르의 시야가 팽 돌기 시작했다. 아셰는 어쨌든 자신이 가장 앉기 싫어하던 자리에 자신을 밀어 넣은 셈이었다. 그 어떤 동기도 없는데 대체 왜? 그는 현실감이 없어 말문이 막혔다.
투표 결과는 누구나 예상한 대로였다. 딜라나 5표, 이단 1표, 사브르 8표로 사브르가 당선된 것이다. 혹시나 이단이 기권할까 봐 넣은 기권 불가의 조항이 그대로 그의 발목을 잡은 것이다. 사브르는 그제야 자신이 걸었던 길이 이단과 별다른 차이가 없었다는 것을 알았다. 시튼의 사람들이 결국 선택할 사람은 중립의 위치에 있는, 표가 보장된 사람이었고 그건 이단이 아니라 자신이어도 상관없는 일이었다.
“그렇다면, 2대 통령은 사브르 키렐입니다.”
게다가 연임 조항도 있었다. 만일 다음번에도 적절한 재목이 없다고 판단된다면 그는 계속해서 통령 자리에 있어야 할지도 모른다. 그때에는 아마 자신이 정말로 다른 사람이 눈에 안 차서인지, 통령 자리를 놓고 싶어 하지 않는 것인지 객관적인 눈으로 볼 수 없을 것이다. 그는 그 딜레마로 몹시 괴로워질 수밖에 없었다. 그가 언제나 경계하던 공화국의 내부에서 오는 적이 자신이 될 수 있다는 두려움……. 살면서 이토록 패닉에 빠져 본 적이 없었다.
이단은 영지를 받지 않았으므로 앞으로 회의에서도 빠질 것이며, 아예 황궁을 나갈 것이다. 아셰는 생긋 웃으며 박수를 쳤고, 모두가 천천히 갈채를 보내며 사브르에게 차례대로 축하 인사를 건넸다.
“아…….”
아셰의 눈빛에 만족감이 어렸다. 그녀는 축하한다며 그를 안은 뒤, 작게 속삭였다.
“결혼을 하고 아이를 만드시지 그러셨어요.”
사브르의 표정이 그대로 굳었다. 그의 얼굴이 백지장처럼 질렸다.
“……그, 그건……. 아니…… 그때 분명…… 전혀 신경 안 쓰신다고……. 오히려 후련하다고…… 범인이 누군지 궁금하지도 않다고…….”
그녀가 차분하게 말했다.
“그럼 타의로 인해 아이가 없어져도 아무렇지 않은 엄마는 없다는 걸 알았을 텐데.”
아셰는 그를 더 꼭 끌어안으면서 서늘하게 말했다. 사브르가 그녀를 고통스러운 선택의 장에 밀어 넣었듯이 그녀 역시 그를 그 갈림길에 몰아넣고 싶었다. 물러날 수도 없고, 물러나지 않을 수도 없는 독재와 이상의 딜레마.
캐넌에서 그녀는 처음으로 미래가 기대된다는 기분을 알았다. 그것을 사브르의 독단적인 결정으로 송두리째 앗아 갔으니 그에게도 미래를 빼앗고 싶었다. 그의 목숨 대신 선택한 방법이었다. 그가 간절하게 세워 둔 미래를 눈앞에서 무너트리고, 앞으로의 방향을 잃게 만드는 것.
“당신을 죽이려고 했지만, 내 아이는 당신에게만 목숨을 빚진 건 아니라서. 그러나 결국 선택을 한 건 당신이야. 그 대가로…… 당신이 가장 앉기 싫어하던 자리에 한번 앉아 봐. 당신이 아카날처럼 되지 않을지 한번 지켜보자고. 그 정도 괴로움은 있어야 수지가 맞을 것 같아서.”
아셰의 푸른 눈은 차가웠고, 사브르는 그녀가 얼마나 자신의 속내를 능히 감출 수 있는 사람인지 알고 있었다. 이상하게 그 때 그의 머릿속을 스친 건 기억도 잘 나지 않는 오래전, 리한이 그에게 한 충고였다.
‘사람 마음을 이해할 수 없으면 결국 큰코다칠 날이 올걸. 이해하지 못하는 정보처럼 위험한 건 없지. 정보는 유용하지만 위험해. 내 충고를 무시하지 않길 바라.’
[다음 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