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화.
“……네가 빌어먹을 이곳에 나를 박아 두어도, 나의 행복에는 전혀 관심이 없어도…… 그냥 내 곁에 있으면 돼. 더…… 바라지 않을게. 너는 원래부터 약속한 것만 내게 주었으니까. 더 바라는 건 욕심이야. 그 어떤 아셰 아메탄도 괜찮다고 맹세한 건 난데.”
“…….”
“결국 내게 왔으면 됐어……. 여전히 너는 내게 갈증이 나는 상대지만, 너와 함께 지낸 2년이 내게는 가장 행복한 시간이었으니 됐어.”
“이단…….”
이 모든 말들을 준비하기 위해 그는 얼마나 많은 감정들을 누르고 이곳에 왔을까.
“어제…… 화내서 미안해.”
아셰는 그가 어제 얼마나 그녀를 보며 화를 참았는지 직접 느꼈다. 다리가 덜덜 떨릴 정도로 느껴지는 분노였다. 그랬던 그가 지금 이렇게 말할 수 있을 때까지, 얼마나 마음을 가라앉히려고 노력했을지 느껴졌다. 아마도 그는 그녀를 찾아 온 황궁을 헤매면서 이미 그녀를 용서했음이 틀림없었다.
행복도 노력해야 된다고. 그를 위해 눈을 감을 땐 감아야 한다고. 리젠은 그녀에게 진심을 다해 부탁했다. 부디 사랑을 택하라고. 켄도 그녀에게 말했다. 자신 역시 행복을 선택한 거라고. 그러니 아셰 역시 행복했으면 좋겠다고. 그 많은 사람들의 부탁을 외면하고 그녀는 여기까지 왔다. 이단이 그녀가 곁에 있는 것을 그 무엇보다도 바라는 걸 알면서, 복수한다는 이유만으로 심지어 자살까지 생각했다.
이단이 1대 통령의 명예를 해치지 않기를 바랐다. 그러나 그녀가 정말로 이단에게 줄 수 있는 사랑이 그게 최선일까? 복수를 위해 달려온 것은 어쩌면 쉬운 일이었다. 정말로 어려운 것은 소중한 것 중에 하나를 선택하는 일. 리젠이 우정과 진실 중 진실을 택했던 것처럼. 그녀에게는 복수와 사랑 중 하나를 선택하는 것이 가장 어려웠다.
어쨌든 그가 그녀에게 바란 것이 그저 곁에 있어 주는 것이었다면, 그녀가 이제 그에게 줄 수 있는 것은 단 하나, 진실뿐이었다.
“널 사랑하니까, 됐어. 껍데기라도 내 옆에 있으면 돼. 대신 날 떠나지 마. 어떻게 해서든 내 곁에 있어. 내가 있는 곳이 지옥이더라도 나는 널 놓아주지 못해.”
그가 떨리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아셰는 천천히 그를 바라보다가 한숨을 쉬었다. 5년간 믿지 않았던 그를 믿을 것이다. 그는 이유 없이 미치지 않을 것이다. 지금도 화내지 않고 그녀에게 차분하게 말하고 있으니까. 지금 이 상황에서도 그는 미치지 않고 있으니까.
“이단, 있잖아.”
그동안 그녀가 그에게 진실을 말하지 않았던 것은 그가 미쳐서 혹시라도 자신을 대신해 비극을 만들까 봐 무서워서였다. 그 역시 스스로를 믿지 못해 ‘차라리 알지 않는다’라는 결론을 내리지 않았던가. 그러나 그녀는 처음으로, 그가 지정해 준 범위 밖의 그를 믿어 보기로 했다.
그는 그 오랜 시간 동안, 그녀의 무관심을 조용히 견딜 정도의 남자였으므로.
“우리 하나만 더, 서로 약속할래? 마지막으로.”
“……뭘?”
“우리가 그동안 못했던 것…….”
그녀는 느릿하게 말했다. 그녀가 사랑하는 새까만 눈을, 맨 처음 시야에 들어왔던 검붉은 머리카락을, 볼 때마다 안타까웠던 눈 밑의 작은 흉터까지 처음 보는 것처럼 눈에 담았다. 나름 호쾌했던 열다섯 소년은 이제 잘 보이지 않을 정도로 달라진 그녀의 음울한 남편을.
“……서로 믿기.”
“…….”
“날 믿어 줘. 나도 널 믿을게.”
언제나 그의 이성을 믿을 수 없었다. 혹시라도 그녀가 막을 수 없는 일이 생겨 버릴까 봐. 그러나 그는 그녀가 눈을 보고 부탁한 것들은 모두 들어주었다. 그러니 그조차 믿을 수 없다던 그를 그녀는 믿어 줘야지. 그녀가 조곤조곤 얘기하고, 사랑을 약속하고, 곁에 있겠다고 다짐하면 그가 분노에 미쳐 비극을 만들지 않을 것이다. 아주 예전부터 했어야 하는 일, 그에게 솔직하게 말하고 같이 방법을 강구하는 일.
‘저는, 다른 사람을 위해 생각을 바꿀 수 있다는 걸 믿어요.’
특히 이토록 그녀가 딜레마에 빠졌을 때, 진심으로 조언을 구하는 일……. 그녀는 그 누구에게도 자신의 일을 의논해 본 적이 없었다. 모두 혼자 결정하고, 혼자 시행했다. 아무도 믿을 수 없기에.
그녀는 윌리엄에게 맞으며 제국에 가라고 협박을 당했을 때, 리젠이나 다니엘에게 한 번도 그 사정을 말한 적이 없었다. 그녀에게 어차피 인생의 길은 홀로 걷는 것이었고 고난은 혼자 헤쳐 나가는 것이었다. 만일 그때, 그녀의 소중한 사람에게 속내를 털어놓았다면 무언가 조금이라도 바뀌었을까?
‘왕녀님도 이단을 위해서 왕녀님의 무언가를 바꾸실 수 있을 거예요.’
이단은 그녀를 위해서 많은 것을 바꾸었다. 아셰는 앞으로 그를 위해서 조금 바뀌기로 했다. 상대를 전적으로 믿고, 함께 손을 잡은 채 앞으로의 삶을 의논하는 것. 단 한 번도 생각하지 않았던, 누군가를 완벽하게 의지하며 동반자라고 여기는 것.
“……아주 복잡한 이야기가 될 거야.”
아셰는 문득 고개를 들어 창문을 바라보았다. 어느새 해가 모두 지고, 학자자리의 여덟 개 별이 뜨고 있었다. 지난 모든 시간 동안 별자리는 매일 밤 성실하게 떠올랐다. 그녀가 볼 때도, 보지 않을 때도, 맨 처음 그들이 만났을 때도, 그리고 앞으로도. 늘 같은 자리에 떠오르는 별마저도 부럽던 시기가 있었다. 그 어느 곳에서도 그녀의 자리는 없었으니까.
“나, 네게 나의 이야기를 하고 싶어.”
그녀는 떨리는 손으로 이단의 손을 잡았다. 마음이 만신창이로 찢겨진 것 같았지만 이 남자만 할까. 문득 그녀는 이단이라면 자신의 이야기를 듣고도 자신을 징그럽게 여기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른 모든 이가 자신을 이해하지 못하더라도 어쩌면 그만큼은 그 옛날처럼 자신의 모든 발걸음을 이해해 줄 것 같았다.
“너를 많이 사랑해서, 네 ‘이단 엔리히’라는 이름을 지켜 주고 싶었어. 내가 아는 사랑이라는 건 그런 거라서. 그런데 있잖아, 나, 이제는…….”
문득 울컥하여 그녀는 한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이단이 천천히 그녀의 앞에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아 눈을 마주쳤다.
“내가 아메탄에서 네게 이야기를 해 주었듯이…….”
그가 피식 웃으며 그녀의 눈가를 닦아 주었다.
“너도 황궁에 왔으니 네 이야기를 하면 되겠군.”
“…….”
“마침 목동자리도 떴겠다…….”
“학자자리라니까.”
이단은 어깨를 으쓱했다.
“무슨 상관이야.”
그가 그녀를 천천히 일으키며 말했다.
“너와 내 사이에 그 어떤 풍파와 사연이 얽혀 있을지라도, 내게 너는, 의미가 아닌 존재 자체가 중요한 사람이야.”
“…….”
“네가 내 곁에 있는 것은 바뀌지 않아. 그럼 된 거지.”
너무나 오랜 과거가 되어 버린 황궁의 어느 날, 함께 맨 처음 여덟 개의 별을 보았던 날부터 지금껏…… 그 어떤 이유를 대고서라도 그들은 서로에게 갔다.
“그리고 약속할게. 널 믿을 거야.”
그 이유가 계략이든, 사랑이든, 복수든, 그 무엇이든…… 그는 그녀의 모든 것을 원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가 지금 곁에 있는 것만으로도 더는 바라는 게 없다고 말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런 그에게, 그녀는 너무 늦었지만 지금이라도 밤새도록 할 이야기가 있었다.
* * *
몇 달 뒤, 통령의 선거가 있었다. 통령의 자리에 오르고 나서 국경과 법률을 정돈하고 이런저런 자질구레한 전투를 치르느라 반년이 흘러 있었고, 2년 동안 정세를 보살피나 했더니 2년간 전쟁터로 떠난 이단은 돌아오자 몇 달 되지 않아 임기 5년을 채웠다. 그 후에는 새롭게 확장된 영토에 지금까지의 행정 체제를 도입시키는 데에 나머지 몇 달을 보냈다.
사브르는 아셰와 함께 예전의 계획대로 미묘하게 시튼과 딜라나 사이를 왔다 갔다 하며, 이번에 통령 선거에서 지면 모두가 숙청당할 수 있다는 위험을 감지하도록 했다. 시튼은 자신이 차차 밀리고 있다는 것을 인지하고, 점차 중립을 지키는 사람들에게 한 번 더 임기를 양보하고 다음에 통령의 너무 큰 권위를 조금 낮춘 다음 차차기를 노려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계획대로입니다.”
선거 전날 밤, 사브르는 아셰에게 흡족한 듯 말했다.
“시튼은 아톰을, 딜라나는 세린을 믿지 못하고 있습니다. 아마 한두 표 차이로 상대방에게 영원히 숙청당하느니, 중립 쪽에 표를 줄 겁니다. 제가 이단을 추천하면, 영부인님께서 지지한다는 의사를 밝혀 주세요. 말씀하신 대로, 이단 통령님도 동의하셨습니까?”
“네.”
아셰는 조용히 말했다.
“황궁에 더 있고 싶어 하는 제 마음을 이해해 주었어요. 동의했어요.”
“그럼 이단 통령님 뜻대로 캐시는 이단에게 표를 줄 겁니다. 그건 누구나 알죠. 네 표가 이단에게 오면…… 세 명만 이단의 이름을 써도 절반입니다. 하지만 제가 비밀리에 알아본 바, 이미 시튼 쪽에서는 이단을 모두 뽑기로 결정한 모양입니다. 아무래도 다들 아톰은 딜라나의 편으로 돌아선 것 같다고 생각하고 있으니까요. 하지만 제가 보기엔 아톰도 이단을 쓸 것 같습니다. 딜라나와 시튼 사이에서 아직 마음을 정하지 못한 것 같더군요.”
사브르는 긴장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이단에 대한 캐시의 마음을 계속해서 부추긴 것도 그였다. 아셰와 이단은 사이가 좋지 않다, 이단은 항상 자신의 편을 들어주는 여자를 원하지만 아셰는 그렇지 않다, 결국엔 둘은 헤어질 것이다……. 하지만 그런 말들이 없어도 캐시는 그 어떤 회의에서든 이단의 뜻에 모두 따랐다. 그게 그녀가 생각하는 사랑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초대 통령인 이단의 임기 마지막 날이 지나고 2대 통령을 뽑는 선거의 날, 열두 명의 영주를 비롯해 아셰와 이단까지도 회의실에서 긴장된 얼굴로 앉아 있었다. 햇살이 따스하게 드는 봄날이었다. 아셰는 사회를 맡았고, 진행을 위해 일어서면서 잠시 심호흡을 했다. 그녀는 잠시 이단의 얼굴을 보았고, 그는 표정을 알 수 없는 잔잔한 검은 눈으로 그가 지긋지긋하게 싫어했던 회의실 중앙을 응시하고 있었다.
[다음 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