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99화 (229/256)

  

99화.

사브르는 가만히 그녀를 바라보고 있다가, 목례를 하고 일어섰다.

“통령님께서 찾고 계실 겁니다. 빨리 들어가 보세요. 당분간은 그의 눈치를 보시는 게 좋을 듯합니다. 입의 혀처럼 구시다가, 나중에 부탁하세요. 황궁에 더 있고 싶다고.”

“……네.”

그 순간 그녀의 머릿속에 스친 것은 난생처음 본 흰 눈이었다. 망망대해에서 첫눈을 맞으며, 그녀는 그녀의 아이를 죽인 그에게 복수하겠다 다짐했다. 아이의 죽음에는 그의 죽음을. 하나를 빼앗기면 하나를 빼앗는 그들 나름의 법칙대로. 그러나 그녀는 화풀이로 남의 목숨을 앗는 사람은 아니었다. 여러 사람이 얽혀 있는 일에 한 명에게 책임을 물어 뒤집어씌우는 것은 옳은 일이 아니라는 걸 알고 있었다.

아무리 그녀가 그 아이를 사랑했어도…… 그 아이의 복수를 다짐했어도, 사브르의 목숨값이 아이의 목숨값에 해당하지는 않았다. 그녀는 홀로 테이블에 앉아 한참을 그대로 멍하니 허공만 바라보았다. 윌리엄을 죽인 후 운명이 자신을 여기까지 몰고 왔다고 하면 할 말이 없었다. 아무리 윌리엄이 그녀를 괴롭혔다고 하지만, 그녀는 사람을 죽였고, 그 사실은 변하지 않았다. 그 무게는 그대로 그녀의 발목을 잡아, 숨도 못 쉴 정도로 그녀는 몸을 떨었다.

그렇다면 지금까지 사브르의 독단적인 행동일 것이라고 믿은 채 걸어온 그녀의 길은 대체 무슨 의미가 있는가.

‘아이를 보내 주렴.’

이미 한참 전에, 기억도 잘 나지 않는 오래전에 에곤은 그녀에게 조언했다.

‘이 나이가 들도록 살다 보니, 보내는 것을 제때 보내지 못해 놓친 것들에 대한 후회만이 남을 뿐이야.’

이단과 이곳에서 2년을 함께 보냈다.

‘지금 네게 소중한 사람만을 생각해. 이미 사라진 것 때문에 지금의 행복을 놓치지 마라.’

그녀는 그토록 원했던 사람과 함께 하면서도 대부분의 신경을 다른 곳에 쓰고 있었다.

‘네 곁에 실제로 있어 주는 사람에게 충실해.’

그녀의 곁에 있어 주었던 이단이 무슨 음식을 좋아하는지도 몰랐다. 사랑한다 속삭이고 한방을 썼으면서도 정작 그가 감기에 걸린 줄도 모르고 살았다. 그녀가 열두 명의 영주들을 관찰하며 납작 엎드려 벼랑 끝을 걷는 기분으로 폴라리아 공화국을 위해 쉬지 않고 일했기 때문이다. 언젠가 국지전이 일어나서 그가 떠날 때를 기다리면서.

그가 그녀를 끊임없이 의심하고 믿지 못했던 것도 당연하다. 곁에 있는 것만으로는 채워지지 않는 무언가가 있었을 것이다. 리젠이 언젠가 말했듯이, 그 정의할 수 없는 미묘하고 복잡한 감정들이 언제나 관계의 본질이다. 그가 그녀를 믿지 못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모르고 캐넌을 과도하게 의심했던 그 이유는…… 아마도 그녀에게 있었을 것이다.

‘……행복도 노력해야 해요. 인생에 그저 주어지는 건 없잖아요. 눈을 감아야 할 땐 감으세요. 왕녀님도 부디 노력해서라도 행복해 주세요. 부탁이에요.’

‘결국 내가 할 수 있는 게 네 행복을 바라는 일뿐이라면…… 그것 하나는 들어줄래?’

생각해 보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그녀에게 자신의 행복을 추구하라 했는지. 그녀는 지금껏 사랑과 복수는 하나의 길이라고 생각했고, 당연히 둘 중 하나를 선택하라 한다면 복수를 택하겠다고 다짐했었다. 사랑이라는 것에 한 번도 인생을 걸어야겠다고 생각한 적이 없었다. 꼭 그만한 온도의 사랑이 아니더라도 이미 충분히 이단을 기다렸고, 의리를 다했고, 약속을 지켰다고 생각했으니까.

그러나…… 정작 그녀는 그에게 무심하기 그지없었다. 사브르의 말이 가시처럼 박혀, 이단에게 미안함이 몰려들었다. 그와 함께 했던 2년, 그는 그녀를 데리고 황궁의 밖으로 나들이라도 가고 싶어 했지만 그녀는 언제나 바빴다. 그는 주방에 일러 달콤한 것들을 늘 준비했지만 정작 그녀는 그가 좋아하는 음식조차 몰랐다. 그가 황궁에서 잠을 이루지 못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캐넌으로 먼저 향했다.

나는 그가 시켰던 말들만 앵무새처럼 지키면서 복수심에 눈이 뒤집혀 그 소중했던 시간들을 그대로 흘려보냈구나……. 그 먼 전쟁터에서 대륙을 건너 두 번이나 자신을 보러 온 그 남자에게, 다만 곁에 있어 준다는 명목으로 아무 노력도 하지 않았구나……. 만일 그녀가 그에게 충실한 2년을 보냈다면, 그에게 받은 사랑의 조금이라도 갚으려는 생각을 했었다면, 그가 캐넌의 모든 서신을 불태우라는 명령은 내리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에소트와 벤도 지금 살아 있을 수도 있다.

‘저는 다시 돌아가도 진실을 밝히겠지만, 그날로 돌아간다면 왕녀님의 손을 꼭 잡고, 윌리엄 태자님이 아닌 왕녀님에게 잘 된 일이 맞냐고 물어볼 거예요.’

다시 돌아간다면 그에게 더 잘해 줄 것이다. 그녀는 난생처음으로 자신이 후회한다고 생각했다. 사소한 무신경이었기 때문에 더 마음이 아팠다. 일상적인 사건 하나하나를 되짚을 때마다 미안함에 눈물이 뚝뚝 흘렀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그녀가 망연자실하게 앉아 있는데 궁의 문이 다시 열렸다.

“……찾았어.”

고개를 들지 않아도 누구의 목소리인지 알고 있었다. 노을을 등에 지고 선 이단의 그림자가 붉게 내려앉았다.

“황궁 어디에도 보이지 않아서, 혹시나 해서 여기에 왔는데. 언제부터 이러고 있었던 거지?”

그의 목소리가 떨리고 있었다. 내색하지 않고 있었지만 이단의 표정이 잔뜩 굳어 있었다. 그녀를 찾아 온 궁을 헤매고 다닌 것이 짐작되어 또다시 심장이 내려앉았다.

“……몰라.”

그녀는 천천히 눈을 깜빡이며 중얼거렸다. 그가 그녀에게 다가오며 낮게 말했다.

“왜 여기에…….”

“……모르겠어.”

그녀는 멍한 눈을 들어 그를 바라보았다. 그의 무표정이 그녀를 서늘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화가 나겠지, 화가 날 거야. 전쟁이 끝나고 간신히 데려온 여자는 곁에 있어도 다른 생각뿐이고, 그가 자리를 비운 새에 그가 가장 끔찍하게 여기던 일을 계획해 놓은 채 그토록 싫어하던 남자에게 들렀다 왔다. 그에게 수면제를 먹인 뒤 또다시 사라져 버린 그녀를 그는 어떤 심정으로 찾아 헤맸을까.

그가 그녀의 앞에 선 뒤 그녀의 턱을 치켜들고 눈을 마주쳤다. 그들 외에는 궁에 아무도 없었다.

“네 말대로 하루가 지났어. 이제 말해 봐.”

아셰는 자신도 모르게 한숨을 뱉었다. 그 어떤 원망이라도 각오하고 있었는데, 이 남자는 떨리는 목소리로 겨우 말한다는 것이 어제의 약속이었다.

“…….”

그는 그녀의 의사를 언제나 존중했다. 그가 어떤 마음일지 상상도 가지 않았다. 맨 처음 그녀는 이단이 함께 떠나자고 했을 때에도 아메탄에 남았고, 또 한 번 캐넌에 돌아가지 말라고 했을 때에도 결국엔 캐넌으로 돌아갔다. 그는 그녀가 회의에 참석하겠다고 하니 참석하도록 해 주었고, 이단에게는 끔찍하기만 한 황궁에서도 그녀가 자신의 자리를 찾아가는 모습을 가만히 지켜봐 주었으며, 그토록 화가 났는데도 하루 뒤에 모든 걸 말하겠다고 하자 또 기다려 주었다.

본성이 관대하지 않은 남자가, 그녀를 상대로 얼마나 많은 것을 참고 있었을까.

“이단.”

그녀는 갈라지는 목소리로 말을 꺼냈다. 그의 얼굴을 조금 더 자세하게 바라봐 주었다면 그가 캐넌에서 온 편지를 모두 불태워 버리라는 명령은 하지 않았을까. 처음 그녀가 황궁에 도착했을 때 그는 분명 안정되는 모습을 보였다. 그의 합당한 공허함을 그녀는 집착과 광기라고만 여겼다. 서로를 더 바라볼 수 있었을 그 수많은 시간 동안 그녀는 대체 무엇을 보고 있었던 것일까.

“……무슨 음식을 가장 좋아해?”

예상하지 못한 말에 이단이 잠시 놀라 그녀를 빤히 바라보다가 조용히 대답했다.

“해산물.”

“싫어하는 음식은?”

“……단것.”

왈칵 눈물이 나와 그녀는 잠시 말을 하지 않았다. 억지로 눈물을 참은 뒤 그녀가 중얼거렸다.

“그러고 보니…….”

그녀는 씁쓸하게 웃었다. 4황녀의 궁이었지만 그녀의 궁과도 닮아 있는 곳이었다. 한때 그녀의 작은 궁에서 그에게 매일같이 차를 우려 주던 시기가 있었다.

“너는 내가 우려 준 차를 정말 좋아했는데, 그 뒤로 한 번도 차를 우려 준 적이 없구나.”

“……더 이상 차에 관심이 없는 줄 알았지. 도서관이 그토록 큰데 약초학 책도 보지 않더군.”

이단의 말에 아셰의 두 눈이 또다시 흐려졌다. 잊고 있는 줄도 몰랐던 그녀의 취미를 그는 기억하고 있었다. 그녀의 눈 밑이 떨렸다. 결혼한 지 5년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묻고 싶은 것이 드디어 쏟아지기 시작했다.

“……이단, 취미가 있어? 좋아하는 학문이라도?”

“학문이라면 역사. 군사학도 역사 기반이니까. 취미는 야외 활동이라면 뭐든.”

그를 처음 만난 지 15년도 훌쩍 넘었다. 모두 처음 알았다. 늘 침대에 기대어 두꺼운 역사책을 읽고 있던 그의 모습이 거짓말처럼 스쳐 지나갔다. 영문도 모르는 채 이상한 것을 묻는 아셰를 이단은 그저 가만히 바라보고만 있었다.

“이단……. 내가 황궁에…… 왜 왔는지 알아? 나, 사실은…….”

“내가 있어서.”

그는 단호하게 말했다. 그녀가 입술을 달싹이며 고개를 저으려는데, 그가 단단히 그녀의 얼굴을 고정시키고 속삭였다.

“내가 있어서 온 거야.”

“……잠시만…… 내 얘기 좀 들어 봐…….”

“내가 10년 전 아메탄 왕궁에 갔을 때…… 물론 스타람의 지령이 있었지만, 네가 보고 싶어 간 거야. 너도…… 무슨 일이 있었겠지만, 나 때문에 온 거야.”

아셰는 깊게 가라앉은 그의 눈을 잠시 바라보다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네 말이 맞아.”

그녀는 복수 때문에 이곳에 왔다. 그러나 그것이 전부는 아니었다. 그가 그녀를 부르지 않았던 두 달 동안 그의 사랑이 식었을까 봐 불안감에 휩싸였고 그것이 너무나 서운했다. 그리고 언젠가 리젠이 말했듯이, 그런 것들이 훨씬 중요할 때가 있는 법이다. 이단이 그녀를 빤히 바라보았다.

[다음 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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