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98화 (228/256)

  

98화.

순식간에 머릿속에 의심이 걷잡을 수 없이 퍼졌다. 사브르는 아이의 죽음이 다니엘 탓이라고 암시하고 있었다. 그녀는 그 말을 한 번에 부정할 수가 없었다. 아셰가 숨을 죽이고, 속삭이듯 말했다.

“저는…….”

그녀는 그 어느 때보다, 자신이 아슬아슬한 줄을 타고 있다고 생각했다. 리젠이 틀렸다고? 말도 안 된다. 리젠은 확신 없이 무고한 사람의 이름을 댈 사람이 아니었다.

“……당신이…… 죽였을 것이라고 짐작했어요.”

사브르와 그녀 사이에 정적이 흘렀다. 사브르는 아주 오랫동안 갈등했고, 이제 한배를 탄 사이에 비밀이 있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는지 조심스럽게 말문을 열었다. 일전에 아셰가 다 잊었다고, 아이는 신경 쓰지 않는다고 했던 말들을 믿어서이기도 했다. 만일 그녀가 그 책임을 묻고 싶었다면 이미 이단에게 말해 자신은 죽은 목숨이었을 것이라고 여긴 그가 체념한 듯 말했다.

“그 당시 제 정보원들은 지금보다 훨씬 더 형편없었습니다. 특히 아메탄은 당신 같은 사람도 제게 정보를 숨기는 데 능했지요. 제 정보원들은 회의의 내용만 전달하는 것도 힘에 버거워했습니다. 당신이 캐넌에 가기 싫다고 울부짖었다는 정보를 저희는 그대로 믿었습니다. 에곤이 청혼하여 끌려간다고요. 그런데 당신이 임신했다는 사실을 제가 어떻게 알았겠습니까?”

아셰의 동공이 정처 없이 흔들렸다.

‘아메탄 왕궁을 누구보다도 잘 아는 내가 장담하는데…… 그 스타람 정보원은 아마 다니엘이 외부에 보여 주고 싶어 했던 정보만 수집할 수 있었을걸.’

심지어 이단에게 그녀의 입으로 단언하지 않았는가. 만일 사브르에게 말을 전달한 사람이 다니엘이라면, 카이든은 그 사실을 끝까지 리젠에게 숨겼을 것이다. 카이든 역시 리젠이 영리하다는 것을 모르는 바 아닐 테고, 리젠의 추론이 절대 다니엘에게 닿지 않도록 주의했을 테니까. 수사국의 사람들은 국왕의 비밀을 그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는다. 아셰는 아찔함에 머리가 핑 돌았다.

“수사국의 사람이 의도적으로 저희 정보원에게 접근하고…… 에드와? 아드와? 그런 이름의 시약을 전달해 주었습니다. 아메탄의 시약이지요. 스타람 사람인 제가 알 만한 약은 아니었습니다.”

스타람 사람은 마법을 아예 쓰지 못한다. 스타람의 풀들은 마력이 없어 시약의 제조가 어렵다. 올리타마저도 왕궁이어서 구할 수 있다고 언급했던, 정확히 아이만 없애는 고급 시약을 스타람 사람인 그가 대륙 한복판에서 그토록 신속하게 구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그녀가 멍한 얼굴로 물었다.

“다니엘이…… 당신에게 명했나요? 내 아이를 죽이라고?”

“명하지는 않았습니다. 하지만 갑자기 아이를 존재를 알리고 아이를 없애는 시약을 전달했다는 건, 저보고 그 아이를 직접 처분하라는 뜻 아닙니까? 차마 아메탄에서 명령하기는 힘들었나 보죠.”

아셰는 머리를 한 대 세게 맞은 것 같아 숨조차 멈추었다.

“그때 저는 당신을 위해 시카 성을 마법으로 산산조각 내는 총독님을 보았습니다. 그게 공화주의 사상과 충돌한다는 걸 충분히 그는 알았어요. 저는 그때…… 공화주의고 뭐고, 그에게는 당신이 확실한 우선순위라는 걸 알았습니다. 그의 폭주를 막기 위해서, 다니엘 국왕의 뜻을 따라 주지 않을 이유가 없었습니다.”

‘통령은 왕과 달라. 그에게 충성하는 사람은 없어. 그걸 몰라서 나는 예전에 크게 실수한 적도 있어.’

아셰는 사브르의 옅은 갈색 눈을 보며 충격에 휩싸였다. 사브르는 진심으로 다니엘이 자신에게 배 속의 아이를 처분하라는 부탁을 한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왕족인 그녀는 알 수 있었다. 애초에 다니엘은 사브르에게 정보를 전달한 것이 아니라 이단에게 전달한 것이었다.

‘그 개자식이…… 결국에는…… 넌 그 아이를 지키기 위해 캐넌까지 갔는데…….’

아마 다니엘은 사브르가 이단에게 즉시 보고했을 것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왕정 국가에서 자란 다니엘은 정보원이 윗사람에게 충성하지 않는다는 개념 자체를 상상할 수 없었을 테니까. 그가 언급했던 실수란 이 일을 말하는 것이겠지. 아셰는 할 말을 잃었다. 

그녀도 똑같은 실수를 한 적이 있었다. 사브르가 캐넌으로 그녀를 데리러 왔을 때 그의 태도로 이단의 태도를 추론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왕정에서의 개념을 바탕으로 아랫사람을 무조건 권력자의 수족이라고 여긴 탓이다. 그러므로 다니엘의 사고 과정을 이해할 수 있었다.

만일 사브르가 이단에게 말했다면 이단은 당연히 그녀를 데려와 어떻게든 지켰을 것이다. 다니엘은 이단에게 아이의 존재를 알려 준 것과 동시에…… 혹시나 이단이 그녀를 성가시다 판단해 없애 버릴까 두려워 아이를 지우는 시약까지 준 셈이었다. 어쩌면 그녀를 살리기 위해 다니엘이 택할 수 있는 가장 현명한 길. 아메탄에서 위험을 감수할 수는 없지만, 진정으로 아셰를 사랑한다면 데려가서 책임지고 아이와 네 여자를 지켜라, 아니라면 아셰라도 살려 달라.

다니엘은 진정으로 이단이 아이를 없애는 결정을 했다고 알고 있었을 것이다. 나중에, 조금 더 알아보고 사브르의 단독 소행이라는 걸 눈치챘겠지. 그녀의 망연자실한 표정을 바라보며 사브르는 눈을 마주치지 못하고 고개를 돌렸다.

“왜…… 왜 이단에게 알리지 않았어요?”

“그때 이단은 너무나 위험하고, 당신에게 있어서는 너무나 불안정하고, 나는 당신을 잘 모르고…… 당신이 이 아이에게 황제의 핏줄을 물려주자고, 그 어마어마한 힘을 주고 싶다고 할까 봐 두려웠죠. 세습을 부정하는 공화주의 사상에서 권력자의 아들, 그것도 세습으로만 이어지는 힘의 사슬이 얼마나 위험한지 당신은 아실 것 아닙니까.”

리젠의 말은 맞았다. 사브르가 그녀의 아이를 죽인 것은 사실이었다. 그녀에게 아이를 없애는 시약을 억지로 먹이도록 결정하고 시행한 사람은 사브르였으니까.

그러나 그 아이의 목숨값이 과연 사브르만의 책임일까. 사브르 말대로, 아이의 존재를 알려 주고 그토록 쉽게 그 아이를 없앨 수 있는 시약을 준 것은 다니엘이었다. 그는 갑자기 얻은 정보와 처리 방법에서 다니엘의 의도가 명확하다고 판단했고, 그래서 사브르는 진심으로 그가 그저 다니엘의 뜻에 따른 것이라 생각하는 듯했다.

“그럼…… 왜 그냥 나를 죽이지 않았어요?”

그녀의 푸른 눈에 눈물이 고였다.

“왜 아이만…….”

사브르가 이마에 손을 짚었다. 이렇게까지 진실을 토로할 생각은 없었지만, 어차피 총을 준다는 건 목숨을 주는 일이기도 했다. 게다가 그녀가 어느 정도 짐작하고 있었던 것 같아 숨기는 것이 의미가 없다고 판단했다.

“당신을 죽이면 이단 총독이 무너질 테니까요. 당장 리스로 달려갈 것이 뻔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었습니다. 아뇨, 이단 통령은 당신이 없으면 미쳐 버릴 겁니다. 바로 지금도.”

“그는 통령이고, 아마 그 이름을 위해 절대로 미치지 않을…….”

“그를 과대평가하시는군요. 아마 당신 앞에서 어떻게든 미친 모습을 보여 주고 싶지 않았나 봅니다. 하긴, 그러니까 도망치듯 전쟁터로 떠난 거겠죠.”

“…….”

배를 보내 사람을 시켜 아이를 없앤 사람은 사브르가 맞았다. 하지만 그 상황들이 그의 단독 행동이라고 볼 수는 없었다. 그녀는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지만, 너무 여러 가지 기억들이 머리에 얽혀서 복잡했다. 만일 그 약만 없었더라도, 사브르는 아이를 없앨 줄 몰랐을 것이고, 또 후환이 두려워 그녀를 없애지 못했을 것이다.

‘신념과 주관이 없는 자가 중도를 걷겠다 다짐하면 파악이 너무 어려워진다. 오직 네 오라비이기 때문에 선택하는 그 중간의 길이 모두를 혼란스럽게 해.’

이단이 언젠가 다니엘에 대해 평가했던 말이 떠올랐다. 우유부단하여 한쪽으로 치우친 결정을 내리지 않고 언제나 선택권을 남에게 넘겨 버려서 책임 소재를 흐릿하게 만든다. 맨 처음 이단을 아메탄 왕궁에 들일 때도 왕명을 내리는 대신 굳이 죄인 신분인 그녀까지 불러내서 결국엔 다수결을 만들었다.

마찬가지로 그는 그녀의 아이를 직접 없애는 대신, 다른 이에게 선택권을 넘기는 결정을 했다. 죽일 것인지, 아니면 그 모든 위험 부담을 감수하고 살려서 지켜 줄 것인지. 그게 이단이 아니라 사브르였다는 것만 짐작하지 못했을 뿐.

‘너도 내게는 소중했어. 정말로, 언제나.’

다니엘은 그녀를 분명 아꼈으나 그의 조카는 아니었다. 그녀는 그의 형제를 죽였으니 그 역시 그녀의 핏줄을 앗아 갈 수 있었고, 그 아이는 아메탄 왕국에 큰 위험 요소가 될 수 있었다. 게다가 그 아이는 그를 배신하고 아메탄에 큰 혼란을 가져온 공화주의자의 피를 받았다. 그녀는 아메니티의 7일간 혼란을 겪은 뒤 그가 딱히 이단에게 별다른 보복을 하지 않았음을 기억해 냈다. 스타람이 밀수로 재미를 좀 봤다고 해서 바로 상도덕을 어기고 기술국을 설립한 그가…….

그녀의 시야에 어지럽게 떠돌기 시작한 환영은, 아주 옛날 그녀가 짚었던 카드 한 장이었다.

‘고귀한 혈통과 관련된 문제가 생길 수 있으니 특별히 유의하는 것이 좋겠어요. 이 카드는 액면 그대로 왕의 카드이기도 하지만, 왕녀님이 어떻게 할 수 없는 거대한 권력과 핏줄을 뜻하기도 해요.’

주의한다며, 경고의 의미를 말하던 왕의 카드. 그녀의 아이를 죽인 것은 눈앞의 이 남자뿐만이 아니었다. 아이의 아버지가 이단이어서, 황족의 피를 타고 태어났기 때문만도 아니었다. 그녀가 왕녀이고, 왕을 이복 오빠로 두어서이기도 했다. 

그 아이를 위험하다고 판단한 사람은 많았다. 그러나 정말로 악의를 가지고 없애겠다고 다짐한 사람이 있었을까? 다니엘과 사브르 사이에는 왕과 공화주의자라는 서로에 대한 몰이해가 있었고 그건 변화하는 시대에 어쩔 수 없는 나락이었다.

“사브르.”

그녀는 가까스로 억지웃음을 지어 보이며 말했다. 어차피 오늘은 다시 총을 뺏겼으니 그를 죽일 수 없다. 아니, 조금 더 솔직해지면 아셰는 자신이 선택의 기로에 드디어 섰음을 알았다. 한 번도 의심해 보지 않았다. 그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사브르를 죽이겠다고. 그러나 지금 이 상황에서, 그를 죽이는 게 정말로 정당한 생각일까?

“……말해 줘서 고마워요…… 가 보세요.”

[다음 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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