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7화.
“네?”
그 말에 아셰는 살짝 놀랐다. 그동안 사브르는 그런 말을 한 적이 한 번도 없었다. 생각해 보니 이단이 그녀를 사랑한다는 요지의 말은 많이 했지만, 그녀가 그를 사랑한다는 이야기를 한 번도 언급한 적이 없었다.
“제가 캐넌에 갔을 때부터 당신은 이루어진 사랑의 약속에 행복한 여자의 얼굴이 아니었습니다. 결혼식 때 다과회를 준비하겠다고 할 때부터 딱히 통령님에게는 관심이 없구나, 싶었지요. 그렇다면 여기 왜 왔겠습니까? 약소국의 왕녀 출신이니 원하는 것이야 뻔하지요. 권력 아니겠습니까?”
“……무슨, 무슨 말이지요?”
“통령님은 단것을 절대 안 드십니다.”
아셰의 말문이 그대로 막혔다. 한 번도 생각해 보지 않았다. 그러고 보니 그가 다과를 즐기는 모습을 본 적이 없었다. 말하지 않아 몰랐다. 아니, 정말 말하지 않았을까?
‘순식간에 어머니의 시체는 이름 모를 자들이 치웠지. 난 그날 이후로 달달한 건 잘 못 먹어.’
희미한 기억 속에 아주 옛날에 했던 그의 말이 떠올랐다. 그녀는 가만히 사브르를 바라보았다.
“황궁에 오고 나서도, 정작 이단 통령님의 행복에는 관심이 없었지요. 당신이 그를 진심으로 살핀다는 생각은 못해 봤습니다. 그러니 화려한 황궁을 나가 이단 통령님과 단둘이 살고 싶어 할 리가 없지요.”
떨리는 손으로 옷자락을 잡으며 그녀가 부드럽게 말했다.
“그…… 그래도, 저는 그를 오랫동안 기다렸고, 또 늘 그의 곁에 있었어요. 결혼식에 그저 다과회를 준비했다는 이유만으로…….”
아셰의 말에 다소 절박함이 보였는지, 사브르는 땀을 닦으며 천천히 말을 이었다.
“통령님은 단것을 싫어하시지만, 당신을 위해 늘 식탁에 쿠키를 올렸죠. 당신이 통령님을 조금만 관찰했다면 그가 쿠키에 손을 안 대는 걸 아셨을 텐데……. 영부인님이 직접 준비한 그의 생일 저녁 식사 때 단것 천지였던 것이 기억나십니까?”
“…….”
그녀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함께 지낸 2년간, 넌 나와 몸을 섞고 같은 방을 썼지만 정신없이 일에 미쳐 있었지.’
어젯밤 그가 했던 말의 의미는 이런 것이었나. 2년간 남들의 의심에서 벗어나고 이단이 언젠가 내란을 진압하러 갈 때에 자신에게 전권을 줄 것을 계산하여 무리한 건 사실이었다. 그리고 그렇게 함으로써 그를 도울 내면적 이유까지 생겨서 사브르를 속일 수 있었다.
“또, 겨울마다 통령님은 감기를 가볍게 앓고 지나가십니다. 당신에게 옮길까 봐 그럴 때마다 회의실에서 밤을 지새우셨어요. 당신은 아무 생각 없었겠지만, 캐시는 그의 목소리만 들어도 감기를 앓고 있다는 걸 눈치챌 정도였습니다. 정작 영부인님의 신경은 항상 어딘가로 향해 있었지요. 캐시가 2년간 이단을 놓지 못한 건 우연이 아닙니다.”
캐시에 대해서도 신경 쓰지 않았다. 그 조용하고, 이단과 눈도 못 마주치는 여자가 왜 그토록 이루어지지 않는 사랑에 여전히 마음 졸이나 한심해했을 뿐이었다.
“실제로 제게 많이 말했죠. 이단 통령님을 더 사랑하는 건 자신이라고. 딱히 부정할 수는 없었습니다. 적어도 캐시는 언제나 이단 통령님을 살폈거든요.”
아셰의 충격 받은 얼굴을 보고 사브르가 황급히 말했다.
“아, 물론 이단 통령님을 어느 정도 좋아하신다는 건 압니다. 매력적인 남자지요. 하지만 사랑이 전부가 아닌 여자들은 언제나 있었고, 학문을 무엇보다 중시하는 나라의 왕녀로 태어나 제왕교육까지 받았는데 당연히 하고 싶은 게 많으셨겠죠. 하지만 그러니…….”
전혀 모르던 얘기였기 때문에 그녀는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겨울마다 그가 가끔씩 회의실에서 밤을 새는 건 알고 있었다. 가끔 회의 시간에 집중을 못하는 그였던지라 별로 의심하지 않았다. 심지어 그가 무슨 음식을 가장 좋아하는지도 기억이 나지 않았다.
제 3자인 사브르의 눈에도 이런 것들이 보이는데 당사자인 이단은 얼마나 그녀의 무심함을 피부로 느꼈을까……. 그가 그토록 캐넌에 집착했던 이유를 알 것 같았다. 그녀는 숨을 몰아쉬었다. 세상에, 바보같이 눈물이 날 것 같아 그녀는 입술을 깨물었다.
‘사실은 그게 훨씬 더 죄송해요. 단단히 마음먹었던 커다란 사건보다, 고의는 아니었지만 무심했던 순간들이. 참 이상하죠? 왕녀님을 고발한 주제에, 말 한마디가 더 죄송하다고 말을 하지 못해서 언제나 숨겨 왔지만.’
언젠가 리젠이 했던 고백이 생각나 그녀는 말을 잇지 못했다. 그를 거의 5년 동안 속이면서 이 길을 걸어온 것은 미안하지 않은데, 예상하지 못한 무심함은 마음이 아리도록 미안했다. 심지어 그녀는 그에게 종종 쿠키를 가져와 달라 부탁하며 그가 좋아하는 것으로 들고 와도 좋다고 선심 쓰듯 덧붙였다. 그 말을 들으며 이단은 무슨 생각을 했을까.
‘별로 관심 없는 것에 대해 무심한 건 당연한 것 아냐?’
한때는 그의 작은 표정만 보고도 눈치 빠르게 그가 원하는 바를 다 해 주었는데, 황궁에 오고 나서는 남들이 다 아는 것도 신경 쓰지 않았다. 마치 캐넌에서 한참 동안 켄이 자신을 좋아했던 것을 몰랐던 것처럼 우선순위가 아예 바뀌어 있었던 것이다. 그의 분위기가 정말 위태로울 때에나 선을 넘지 않도록 눈웃음을 치며 안겼다.
“……제가 이런 걸 알려 드리는 건, 당분간 좀 통령님 비위를 맞춰 드리라는 겁니다. 통령님은 해산물을 좋아하십니다. 내일 주방에 말씀 드려서 직접…….”
“사브르.”
그녀가 마음을 다잡고 부드럽게 말했다. 일단은 이 외진 곳에 아무도 모르게 그를 부른 이유가 있었다.
“……제가 돌아오면, 당신이 제게 주신다고 한 게 있었는데요.”
“아. 급히 오느라 영부인님 것은 가져오지 못했습니다. 다만 일단 제 것을 보여 드리지요.”
사브르가 한숨을 쉬었다. 그가 천천히 늘 지니고 있던 기다란 총을 조심스럽게 꺼내 들었다.
“이곳은 안전한데…… 왜 갖고 싶어 하시는지 아직까지 모르겠군요.”
“어떻게…… 쏘는 거예요?”
“간단합니다. 장전이 되어 있으니, 이 방아쇠를 손가락으로 당기기만 하면 됩니다. 하지만 쏘지는 마세요. 소리가 큽니다. 황궁에 울릴 거예요.”
“장전은 어떻게 하는 거죠?”
“여분의 총알을 가져오지 않아 장전하는 법을 가르쳐 드릴 수는 없겠군요. 예상하지 못하고 급히 오는 바람에, 나중에 몰래 영부인님의 총을 장전해서 드리겠습니다.”
“아…….”
사브르는 그녀의 뒤에 서서 그녀에게 총을 쥐는 법을 가르쳐 주고, 방아쇠에는 손가락도 걸치지 못하게 하며 미간을 찌푸렸다.
“절대, 실수로라도 방아쇠를 누르면 안 됩니다. 상당히 위험해요. 웬만하면 쓰지 마시길 바랍니다. 한 번 총알이 나가면 반동 때문에 온몸이 흔들립니다. 이렇게 체구가 작은 여성은 크게 뒤로 밀릴 겁니다.”
“손가락을 걸치고, 당기기만 하면 된다고요?”
생각보다 너무 쉬운 작동법에 그녀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기술은 이렇게 발전하여 사람이 사람을 죽이는 것을 이토록 쉽게 만들어 놓았다. 총구를 사브르에게 아직 겨누지 못한 그녀가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사브르, 이런 무기를 왜 늘…….”
“불안해서요.”
“뭐가요? 당신은 딱히 지켜야 할 소중한 사람도 없지 않나요?”
“말씀 드렸잖아요. 공화국의 완성이 제 유일한 목적입니다. 소중한 사람이라면 가족 말씀하시는 건가요? 그런 건 별로 제 인생에 도움이 될 것 같지 않군요. 이제 와서 말이지만…….”
사브르는 그녀의 뒤에서 다소 긴장한 목소리로 물었다.
“……영부인님도 자식에 대해서는 별생각이 없으신 거죠? 자식이 없으신 건…….”
“임신이 어려운 몸이라 들었어요.”
“그건…… 몰랐군요.”
아셰의 숨소리가 떨렸다. 어차피 오늘 죽일 생각은 없었다. 총을 하나 받으면, 이단의 임기가 끝나고 나서 황궁을 떠날 때에 일을 치를 예정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대로 몸을 돌아 방아쇠를 당기면 모든 것이 끝난다는 생각에 발에 힘이 들어갔다. 비상을 타는 것과는 또 다른 의미로 잔뜩 몸이 긴장되었다. 그녀가 숨을 고르고 있는데 뒤에서 사브르가 말했다.
“아이를 한 번 잃으셨다고 들었습니다.”
“……예. 괜찮습니다. 이미 너무 오래전 일이고, 그땐 낳아 키울 상황이 아니었으니까요.”
사브르가 뒤에 있었기 때문에 그의 표정을 볼 수가 없었다. 아셰는 눈을 내리깔고 있다가, 먼저 화제가 나온 김에 충동적으로 한 발짝 더 나아가 보기로 했다.
“혹시…… 별로 신경 쓰고 있지는 않지만, 누가 아이를 없앴을까요? 그건 궁금했습니다.”
사브르는 잠시 망설이다가, 나지막하게 중얼거렸다.
“짐작은 하고 계시겠지요.”
“……어느 정도.”
“용서하셨군요. 하긴, 그 자리에 올라섰으니 이해하실 수 있을 겁니다.”
“……네?”
아셰는 고개를 들었다. 용서와 이해라니? 한 번도 생각하지 못했던 단어였다. 사브르는 착잡한 듯이 중얼거렸다.
“그 아이는 너무 위험한 핏줄이었고, 상황은 막 혁명이 시작되었을 때였습니다. 아메탄에서는 어쩔 수 없었을 겁니다.”
“아…… 아메탄이요?”
그녀는 깜짝 놀라 뒤를 돌았다. 총 방아쇠에는 손가락도 걸치지 못한 상태였다. 총을 든 그녀의 몸이 휘청거리자 사브르가 기겁을 하며 총을 재빨리 받아 들었다.
“제국의 귀에라도 들어가면, 이단 황자님을 숨겨 준 사실까지도 들킬 수 있었으니까요.”
그녀는 갑자기 정신이 멍해지는 것 같았다. 그녀는 다니엘을 잘 알고 있었다.
‘난 윌리엄의 죽음에 책임이 있어.’
‘……잊지는 않아.’
하지만 리젠이 틀린 말을 할 리가 없었다. 리젠이라면 허술한 추론을 하느니 그녀에게 알려 주지도 않았을 것이다. 대체 어떻게 된 일이지? 하지만…….
‘이제는 잊었어. 진심이야.’
마지막 만남에서 윌리엄을 죽여서 미안하다고 했을 때, 그는 또렷하게 말했다. 그 말은 이미 그가 그녀의 아이를 죽인 데 일조했음을 인정하는 말이었다. 심지어 그는 샤틴을 끝까지 돌봐 주고, 좀 더 시간을 끌 것이라고 생각했던 전기용품 교역도 아셰의 입지를 위해 순식간에 승인해 주었다.
그녀의 눈이 천천히 깜빡였다. 그러고 보니, 망망대해에서 이단을 만났을 때, 그는 그녀가 꼼짝없이 늙은 영주에게 끌려간 것이라고만 알았다고 말했다. 그녀가 임신했다는 사실은 리젠마저도 몰랐던 비밀로, 막 첩자를 보내기 시작한 스타람의 어설픈 정보원이 접근할 수 있을 만큼 수사국은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그녀는 리젠의 말을 기억해 냈다.
‘일부의 정보가 누락되거나, 의도적으로 그가 제게 숨겼을 수도 있어요.’
[다음 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