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96화 (226/256)

  

96화.

이단의 말에 아셰는 숨이 막혔다. 그는 자신의 광기를 고백한 이후 너무 불안해하고 있었다. 그녀가 그에게서 황제를 보고 도망갈까 봐. 아셰가 천천히 고개를 젓는데, 그가 그런 그녀를 보며 참담하게 말을 이었다.

“아니면 또 켄 카세튼이야?”

“……뭐?”

“내가 통령의 이름을 가지고 있는 한, 나는 그 무엇도 강제할 수 없어. 왜냐하면 나는 제멋대로 하던 황제와 전혀 다른 정치관을 가지고 있는 이 공화국 사상의 대표이기 때문에.”

“…….”

“내가 통령의 이름만 버리고 자유가 되면…… 그 의무에서 벗어나고 평범한 사람이 되지. 만일 내가 통령일 때에, 네가 이혼을 선언하고 캐넌으로 달려가면…… 나는 널 붙잡지 못해. 개인의 의지를 중시하는 내게는 공화국의 초대 통령이라는 무게가 있으니까. 그 무게를 내가 가볍게 여기지 않는다는 걸 너는 잘 알고 있지. 그렇지만 통령이 아니라면…… 내가 자유가 된다면…….”

그녀는 어이가 없어서 헛웃음을 지었다. 켄에 대한 그의 질투가 얼마나 무시무시한지 그녀는 그동안 짐작조차 못하고 있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와 대화를 한 번 나누고 언제나 그 첫 욕망을 생각했던 남자였다. 켄에게서 느낀 첫 번째 질투심은 얼마나 그의 머릿속에 깊게 뿌리내리고 있을까.

“난 단언할 수 있는데, 내 아내를 데려간 그놈을 최대한 고통스럽게 죽여 버릴 거야. 그 옛날처럼 널 보내 주겠다는 말은 못해. 넌 나와 5년간 부부였어.”

“……너 미쳤구나.”

아셰가 속삭였다. 그녀가 그에게 정말로 ‘미쳤다’라고 한 것은 처음이었다.

“너 진짜, 미쳤어. 정말로. 나도 정상은 아니지만, 너도 미쳤어.”

“그걸 몰랐어?”

그는 거칠게 그녀의 입술에 입을 맞춘 뒤, 싸늘하게 웃으며 중얼거렸다.

“내가 어떻게 안 미쳐? 너는 내가 이곳에서 얼마나 불행한지 알고 있어. 네가 캐넌으로 달려갔을 때, 내가 황궁으로 오고 있다는 걸 넌 분명히 알았을 거야. 난 네가 없으면 이 빌어먹을 곳에서 잠도 제대로 못 자. 네가 나를 조금이라도 생각했다면 무조건 내게 왔어야 했어.”

“…….”

“넌 내게 거짓말을 하지 않아. 날 사랑하고, 내 곁으로 결국 돌아오지. 그런데 그게 다야. 서로에게 과도하게 바라지 말라는 그 말 그대로, 넌 딱 약속만 지켜. 자꾸만 이런 사실들이 나를 미치게 하는 거야. 넌 켄 카세튼의 행복을 바라면서, 내 행복은 조금도 생각하지 않아. 진작에 알았지만 난 기다렸어. 약속했으니까 기다렸다고.”

“이단, 제발 진정해. 일단 잠부터 자. 응?”

“그런데 넌 조금도 내게 더 가까이 오지 않아. 내가 기분이 상해 보이면 어린애를 달래듯 안기며 웃어 주고 다시 돌아서. 그렇지 않으면 날 이 황궁에 묶어 놓으려는 사브르의 말을 들어주었을 리가 없어. 너는 내가 네게 미쳤다는 걸 의식해서, 켄 카세튼을 보호하기 위한 가장 좋은 방법은 나를 통령에 앉히는 것이라고 생각한 거지?”

그녀가 시선을 내리깔았다. 그가 숨을 몰아쉬며 말했다.

“……제발 아니라고 말해. 나를 납득시킬 다른 말을 해 봐, 제발!”

“이단, 일단은 좀 자자. 네 눈의 혈관이 다 터졌어. 제발…… 내일 설명할게. 일단은 좀 자. 너, 지금 손도 떨리고 있어.”

“내 짐작이 말도 안 되는 거라고, 제발 말해. 날 납득시켜. 내가 상상하지도 못할 이유가 있다고, 사실은 사정이 있다고. 날 이 거지같은 황궁에 묶어 놓은 사람이 네가 아니라고. 사브르에게 협박 받았어? 아니면 누구 죽이고 싶은 사람이라도 있어? 날 통령에 앉혀서 제명권으로 캐시라도 없애고 싶은 거야? 그렇다면 내가 지금 당장이라도…….”

“……이단, 내가 부탁할게.”

그녀가 무릎을 꿇었다. 일단 그를 진정시키는 것이 먼저였다. 이단은 그녀의 앞에서 단 한 번도 이렇게 이성을 잃은 채 화를 낸 적이 없었다. 여기서 무언가 설명했다가는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몰라 그녀는 두려웠다. 캐시마저 당장 죽이겠다고? 정말 한계까지 간 것 같은 그의 발언에 그녀가 그의 다리를 붙잡은 채로 울면서 말했다.

“제발 내게 하루만 시간을 줘, 제발. 다 설명할게. 그런데 하루만…… 내일 사브르를 한 번만 만나게 해 줘. 그리고…….”

최악의 상황이 오더라도 사브르는 죽이고 싶었다.

“사브르를 만나서 대체 또 무슨 뒷공작을 하려고!”

그가 마침내 참지 못하고 소리를 질렀다.

“네가 비밀을 품고 황궁에 들어온 건 알고 있었어. 사브르와 모종의 거래를 하는 것도 진작에 알았지. 그래도 네가 날 이런 식으로 배신할 줄은 몰랐어. 내가 원하는 건 단 하나, 네 손을 붙잡고 이곳을 나가는 것뿐인데!”

“…….”

“애초에, 내가 내 아버지처럼 미쳐서 그를 죽일까 봐, 나에게서 켄을 지키기 위해 내게 온 건 아니겠지……. 나는 너무 오랫동안 그 두려움으로 살았어. 대답해. 오자마자 내게 총을 요구한 것은 정말로 나를 죽이기 위해서야?”

대체 이 남자는 어디까지 생각한 걸까. 그녀가 왜 총을 요구했는지 끝까지 묻지 않은 것은 이런 의심에 기반한 것일까. 아셰는 그가 어떤 지옥 같은 마음으로 자신의 곁에 있었는지 상상조차 되지 않았다. 이렇게까지 자신을 믿지 않는데 대체 어떻게 같은 방을 쓰고 사랑한다고 속삭일 수 있었던 거지? 대체 그가 말하는 사랑이 뭐기에? 그녀의 눈에 눈물이 고였다.

“함께 지낸 2년간, 넌 나와 몸을 섞고 같은 방을 썼지만 정신없이 일에 미쳐 있었지. 캐넌에서도 넌 영지의 안주인이었지만, 그땐 모든 걸 켄에게 맡기지 않았었나. 그래도 내게는 가장 행복한 2년이었지만, 과연 너도 그랬을까.”

그의 팔이 부들부들 떨렸다. 아셰는 심호흡을 삼키며 말을 골랐다. 그러나 이미 하얘진 머릿속으로는 논리적인 말을 할 수 없었다. 결국 그녀가 할 수 있는 말은, 어쩌면 마지막으로 그에게 줄 수 있는 말은…….

“사랑해…… 진심이야. 나, 널 정말로 사랑해.”

그녀가 그의 다리를 끌어안은 채 울음 사이로 말했다. 제발, 제발 그가 진정되기를 바라면서. 어느 젊은 날 그가 광기를 고백했을 때, 그녀는 겁내지 않고 그의 곁에 있겠다고 약속해 주었다. 그 어떤 이단 엔리히여도 괜찮다고, 곁에 있겠다고.

“널…… 기다렸어…….”

그가 거세게 테이블을 주먹으로 쳤다.

“너랑 결혼했잖아…….”

어두운 방에 그녀의 훌쩍임과 함께 또렷한 말소리가 울렸다.

“너만을 사랑해…….”

“…….”

“언제나 네 곁에…… 네 곁에 있을게. 내 목숨이 붙어 있는 한.”

그가 한숨을 쉬며 화려한 방의 높은 천장을 바라보다가, 벌겋게 충혈된 눈을 감았다.

“내게는…… 내게는…….”

그녀는 끅끅거리며 끝까지 말했다.

“……내게는 정말로 너뿐이야.”

밤이 깊게 가라앉고 있었다.

“영부인님, 제정신이십니까?”

사브르가 쪽지를 손에 쥐고 헐떡이며 궁에 들어왔다. 아셰는 가만히 앉아서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곳은 예전에 아셰가 이단과 함께 산책하면서 한 번 들어왔던 4황녀의 궁이었다. 그는 땀에 푹 젖은 쪽지를 내밀며 한숨을 쉬었다.

“통령님께 들키면 저는 죽은 목숨입니다. 이런 걸 심지어 궁에서 일하는 사람들을 시켜 전달하시다니요.”

쪽지에는 아셰의 필체로 또렷하게, 혼자서 4황녀의 궁으로 당장 오라는 글이 써져 있었다. 아셰는 느긋하게 의자에 등을 기댄 채 말했다.

“이단은 자고 있어요. 아메탄에서 제가 가져온 수면제를 좀 먹였거든요. 오랫동안 잠을 자지 못해서, 오늘 오후까지는 잠에 빠져 있을 거예요.”

“아니, 게다가…… 캐넌이라뇨.”

그가 따지듯이 말했다.

“통령님이 캐넌에 얼마나 예민한지 아시면서, 승전하시고 돌아오시는 길에 캐넌을 들러요? 어리석은 선택이라는 건 당연히 아실 겁니다. 지금 통령님은 가뜩이나 배신당했다는 것 때문에 화가 나 계셔요. 어르고 달래도 모자랄 판에…….”

“…….”

“막상 폴라리아를 돌보다 보니 5년으로는 부족하다고, 저 사람들에게 맡길 수 없다고, 5년만 더 있자고 애원하자고 했잖습니까! 그럼 이단은 당신을 사랑하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받아들였을 거예요. 그런데 이 시기에 캐넌이요?”

“캐넌에 갈 수밖에 없었어요.”

그녀가 차분하게 말했다.

“……누가 캐넌에서 온 서신들을 모두 태워 버려서.”

“그건 통령님의 명이었어요.”

“그리고 당신은 저보다 통령님의 명이 더 중요하다 생각했을 테니까요. 그렇죠?”

아셰는 피식 웃으며 말했다. 사브르는 한숨을 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어쩔 수 없었습니다. 이해하시겠지요.”

“이해하죠.”

사브르는 그게 중요한 게 아니라는 표정이었다. 그가 천천히 아셰의 앞에 앉아 몸을 낮추고 말했다.

“통령님은…… 물론 몹시 분노해 계시지만…… 영부인님에 대한 이유 없는 집착을 생각해 보면 잘 넘어갈 수 있을 겁니다.”

그가 급히 속삭였다. 그의 무심한 눈이 아셰의 온몸에 자리한 거친 정사의 흔적을 훑었다.

“황궁이 너무 좋았다고, 이곳을 떠나는 게 싫다고 속삭이세요. 아직 못한 것들이 많다고, 이브나에 비견될 훌륭한 사람으로 역사에 남고 싶다고 지금이라도 빌어 보세요. 영부인의 이름으로 아메탄을 방문하니 너무 좋았다고 말해요. 아마 받아들일 겁니다.”

“……그럴까요.”

“보통 남자였다면…….”

아셰의 무표정에, 사브르는 살짝 한숨을 쉬었다.

“지금 영부인님은 이렇게 멀쩡하게 새벽에 빠져 나오지 못하셨을 거예요. 그토록 사랑하던 여자가 자신을 배신한 걸 알면…….”

“당신이 먼저 제의한 거잖아요.”

그녀는 담담하게 말했고, 사브르는 싱긋 웃었다.

“저야…… 맨 처음부터…… 당신이 사랑 때문에 이곳에 온 게 아니라는 걸 알았으니까요.”

[다음 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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