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5화.
그녀가 황궁에 도착했을 때에는, 이단이 이미 모든 사람을 물리고 홀로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녀는 천천히 그녀를 호위했던 사람들에게 감사 인사를 전하고, 아메탄으로 돌아가는 뒷모습까지 바라본 뒤 이단을 바라보았다. 그가 무표정으로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그녀는 그의 새까만 눈을 보고, 이미 그가 모든 것을 알고 있음을 알았다. 그가 돌아왔을 때 어쩌지 못하게끔 커져 버린 통령의 엄청난 권한도, 그리고 그것이 무엇을 뜻하는지도. 게다가 그녀가 어디서 오는지.
“네가 안 올 수도 있다고 생각했어.”
이단은 그녀를 노려보며 말했다. 그녀가 기운이 없는 표정으로 대답했다.
“약속했잖아.”
“…….”
그는 무뚝뚝하게 뒤를 돌아 어두운 황궁의 안으로 들어갔다. 그녀는 가만히 그를 따라 복잡한 길을 걸었다. 긴 침묵이 흘렀다. 그는 복도를 지나 그들의 방으로 향하고 있었다. 아셰가 천천히 말문을 열었다.
“사브르를 만나고 싶어. 혹시 궁에 있어?”
“네가 만나야 할 건 그가 아니라 나야.”
“나중에 얘기해.”
“……안 돼.”
“일단 사브르부터 만나고…….”
그가 뒤를 돌아 그녀의 팔을 낚아챘다.
“내가 이곳의 주인이었다면 네가 지금 어떻게 되었을지 알겠지.”
그녀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를 노려보았다.
“난 네 남편이야. 황제가 아니더라도, 이 정도 권리는 네게 있어.”
그가 그녀의 팔을 잡고 빠르게 발걸음을 옮겼다. 그의 보폭이 커서 아셰는 거의 끌려가다시피 했다. 그녀는 그의 눈이 벌겋게 충혈된 것을 보았다. 가슴 깊은 곳에서 울컥하는 연민이 솟아올랐다. 그는 계단을 성큼성큼 오르고, 그녀를 그들의 방 안에 던져 넣다시피 했다. 방문이 쾅 닫히는 소리가 복도에 울렸다.
“……설명해.”
아셰는 붙잡혔던 팔을 문지르며 숨을 몰아쉬었다.
“내 승전을 몰랐지? 내가…… 내가 황궁에 돌아오고 있는 걸 모르고, 정말로 네 어머니의 유해를 묻으러 캐넌에 간 거지?”
“…….”
“내가 돌아오는 걸 알았다면, 내게 왔겠지?”
“…….”
“물론 대륙을 건너며 내 귀환을 네가 몰랐을 리 없겠지만…… 여러 가지 사정으로, 못 들었던 것 맞지? 어쩔 수 없었겠지? 그러니 결국엔 내게 왔던 것이겠지? 그렇지?”
“…….”
“뭐라고 말 좀 해.”
그가 그녀에게 다가오지 않은 채로 말했다. 얼마나 힘을 주었는지 테이블을 짚은 그의 손가락이 하얗게 질려 있었다. 그녀는 팔짱을 낀 채 말했다. 이미 목소리에 물기가 어려 있었다.
“……왜 내게 서신을 전하지 않았어?”
“뭐?”
“2년 전…… 캐넌에 전염병이 돌았을 때.”
이단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사람들이 죽어 간다며…… 캐넌의 의원이 내게 서신을 계속해서 보냈을 텐데…….”
“…….”
그가 그녀의 눈을 피했다. 그녀의 목소리에 분노가 섞였다.
“왜 그 서신을 내게 숨겼어?”
“아셰, 난…… 그게…….”
“그 서신을 제때 받기만 했어도, 한 사람이라도 살릴 수 있었을지 몰라. 네가 싫어했다면 난 캐넌에 가지도 않았을 거야. 그냥, 그냥 답신만 하면 됐었어.”
그녀의 눈에 결국 눈물이 흘렀다.
“청혼서를 받은 날 안절부절못하며 자기 일처럼 신경 써 주었던 집사도 죽었고, 마을에서 무두질을 가장 잘하던 청년도 죽었어.”
“아셰, 난…… 진정하고 들어 봐.”
“2년 전이면 우편과 행정 체계가 이미 완벽했을 때야. 내가 직접 손을 봤다고. 그런데…… 나는 이 황궁에 앉아 그 영지의 무고한 사람들이 다 죽는 것도 모른 채…… 엔리히의 의료학교나 세우고 있었어. 말이 돼? 내게, 내게 치료법을 묻는…… 그 서신을…… 너는…….”
“물론 내 잘못이야. 하지만 오해가 있어.”
이단은 미간을 찌푸리고 그녀의 어깨를 잡았다.
“캐넌의 그 영주가 혼자가 되었다는 소문을 들었어. 내가 그 소문을 굳이 네게 알리고 싶지 않았단 건 이해하겠지.”
“……내가 지금 리디아가 죽었다는 걸 몰랐다고 이러는 것 같아?”
“그 이후…… 혼자가 된 그 영주가 얼마나 내게 불안함으로 남았을지 모르겠어? 넌 이곳에서 전혀 행복해 보이지 않았어. 2년, 그래, 2년이야. 2년 동안 넌 나와 이 황궁에 있으면서 언제나 딴생각이었어. 시간이 지나면 괜찮아질 줄 알았는데, 너는 여전히…….”
이단은 한마디 한마디 분노를 삼키며 이를 갈았다.
“2년…… 2년간 나의 곁에 있었지만, 넌 내게 마음을 주지 않았어. 그를 두고 와서, 외국의 체계를 세우는 일에 몰입할 정도로 마음이 공허했어? 캐넌을 떠올리며 이브나 흉내나 내고 싶어지게?”
“그래서 캐넌의 사람들을 다 죽이고 싶기라도 했어?”
“내가 여기서 점점 미쳐 가고 있는 건 나도 잘 알고 있지. 그래도 네 앞에서는 티를 내지 않으려고 노력했는데, 네 눈에는 내가 이미 그런 괴물로 보여?”
아셰는 그가 상처 받았음을 알고 잠시 멈칫했다. 이곳은 다른 곳이 아니라 황궁이었고, 그가 정신적으로 약해질 수밖에 없는 장소였다.
“네게 언제나…… 언제나 이성적으로 대했는데…… 네 눈엔 여전히 내가 그럴 사람으로 보여? 왜? 내가 황제를 많이 닮았다고 네게 솔직하게 말해서? 널 믿고 나의 광기를 고백해서? 아주 옛날 너와 캐넌에서 마주했을 때, 그 사람들을 다 죽이고 싶었다고 고백해서?”
이단의 눈에 두려움이 스쳤다. 아셰는 본능적으로, 그가 자신에게 솔직히 말했던 것을 후회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챘다. 이단은 그의 그녀를 향한 집착이 정상적이지 않음을 충분히 인지하고 있었고, 그래서 정신적으로 건강하기 그지없는 켄을 의식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는 광장에서 많은 사람들이 켄을 칭송하는 것을 모두 들었다.
정작 아셰는 자신의 생각이 멈추지 않는다는 이단의 고백에 별다른 두려움을 느끼지 않았는데, 이단은 그녀가 자신에게서 혹시나 황제의 모습을 보고 그를 징그럽게 여길까 봐 겁이 나는 듯했다. 그녀는 화제를 돌리며 냉정하게 물었다.
“그런 말이 아니잖아. 그럼 대체 왜 서신을 전하지 않은 건데?”
“……내용은 보지도 않았어. 그저 캐넌에서 오는 서신들은 모두 불 질러 없애 버리라고 사브르에게 명령한 것뿐이야.”
“……뭐?”
“만일 켄 카세튼이 네가 그립다는 내용의 서신이라도 보낸다면…… 내가 그놈을 죽이지 않을 자신이 없었거든.”
이단의 말에 아셰는 말문이 막혔다. 맞아, 이 남자는 이런 사람이었다. 자신을 통제하지 못할 것 같으면 아예 진실조차 외면하는 사람. 혹시나 캐넌에서 가져온 것 중 켄의 흔적이 있을까 봐 묻지도 않고 모두 없애 버리는 사람. 그 옛날, 자신의 자식을 죽인 사람이 다니엘이라면 그녀의 가장 친한 오라비를 죽일 것 같다며 아예 진실을 아는 것을 거부했다.
“나는 합리적인 권력을 대표하는 사람이고 그랬다가는 혁명의 사상적 배경이 무너져. 통령은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니니까. 하지만 나는 여전히 이해가 안 돼.”
그가 그녀의 눈을 똑바로 바라본 채 말했다.
“왜 전염병을 네게 묻지? 네가 의원도 아닌데.”
“난 아메탄에서 대학을 다녔고, 예전부터 약초학에 관심이 많았어. 약초학은 의학과 떼려고 해도 뗄 수 없는 관계고, 캐넌에 있을 때 종종 사람들의 질병에 대해 조언을 해 줬어. 불행하게도 그곳의 의원은 실력이 별로 좋지 않았으니까.”
그제야 이단은 캐넌 사람들이 의원인 리트와보다 작은 마님에게 가야겠다고 농담을 던지던 그날 밤을 떠올렸다. 그땐 켄 옆에서 편안한 표정을 짓고 있던 아셰를 살피는 데에 바빠 그런 상황을 깊이 생각하지 않았다.
“……젠장, 내가 그런 것까지 어떻게 예측해?”
아셰가 숨을 몰아쉬었다. 그녀의 눈에 눈물이 고였다. 눈앞의 이 남자는 리디아가 죽었다는 사실을 듣고 결국엔 그녀를 또 믿지 못한 것이다. 그녀가 혼자가 된 켄에게 달려가 버릴까 봐, 다시 그 영지로 돌아갈까 봐 사브르에게 ‘캐넌에서 오는 모든 서신은 불태워 버리라’고 명령했다니. 지독히 그에게 어울리는 처사였다. 그녀가 그의 가슴을 천천히 밀면서 말했다.
“대체 왜…….”
“…….”
“왜 나를 못 믿어? 네 곁에 있겠다고 했잖아. 왜 나를 못 믿고 상황을 이 지경까지 만들어?”
“……너를 믿은 대가를 알려 줄까.”
그가 피식 웃으며 낮게 이를 갈았다.
“……너를 믿고, 모든 권한을 네게 넘긴 채 전쟁터에 떠난 대가를 내 입으로 말해 줄까.”
그녀의 눈동자가 불안함에 흔들렸다.
“내가 떠난 것과 동시에 사브르와 판을 잘도 짰더군. 아무도 예상하지 못하고 있지만, 내가 그 정도 수도 파악하지 못할 것 같아?”
“…….”
“이제 선거까지 두 달 남았어. 이제 슬슬 사브르도, 너도 상대편에게 흔들리는 척 여지를 주겠지. 이제 통령의 과도한 권력이 무서워진 그들은 상대에게 통령이 넘어가는 것이 불안할 거야. 차라리 서넛으로 갈라진 게 낫지, 둘로 갈라진 것은 최악이니까. 너와 사브르가 입의 혀처럼 굴며 곧 줄 것처럼 약속했던 그 권한이 뒤통수를 때릴 걸 당연히 눈치채겠지.”
그녀는 마른침을 삼켰다.
“결국 차선을 선택하게 될 거야. 너와 사브르는 내게 표를 던진다는 말만 하면 돼. 누군가 불안한 쪽이 일단은 차선을 선택하겠지. 적어도 3년이라는 시간이 지나 이 조항을 없애고 다시 투표를 하고 싶어 하는 게 바보가 아니라면 정상이야.”
“…….”
“……사브르는 날 계속 붙잡고 싶어 해. 알고 있어. 시튼이나 딜라나는 아카날과 똑같은 사람이니까. 그런데 도대체 넌 왜?”
그가 그녀의 허리를 붙들어 끌어당기며 속삭였다.
“내가, 너를 기다리는 일주일 동안…… 머리가 아프도록 생각했어. 도대체 넌 왜? 대체 네가 왜? 사브르는 네가 이곳에서 행복해서 그렇다고 하더군. 아메탄에 있는 네 오라비에게 복수하고 싶어 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심지어 네가 원하니 나보고 5년을 더 남아 달라는 수작까지 부리던데 사브르는 그 말을 믿을 수 있어도 난 아냐.”
“…….”
“나는 명쾌한 사람인데, 너는 언제나 너무 나를 헷갈리게 해. 대체 너는 왜? 권력도 정치도 싫다던 너를 내가 잘못 알았나? 정말로 그렇다면 네가 이곳에서 너무 행복해 보이지 않았는데. 대체 네가 왜? 사브르는 네 표정을 읽지 못해도, 나는 네 기분을 본능적으로 알아.”
“……다음에 말해 줄게, 다음에. 진정해, 이단. 제발. 일단은 사브르부터 만나고…….”
그녀는 받아들여지지 않을 걸 알면서도 정신없이 말했다. 그의 얼굴에 이성이라고는 남아 있는 것 같지 않아 무서웠다. 이대로 이 남자가 정말 미쳐 버리면 어떡하나 싶어서 겁이 덜컥 났다. 언제나 두려웠다. 이단이 이곳에서 진실로 정신을 놓는 일. 그가 그녀의 몸을 더 깊숙하게 밀어붙이며 이를 갈았다.
“나와 단둘이 살게 되는 게 무서워?”
“어?”
“내가 황제처럼 미칠까 봐…… 두려워?”
[다음 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