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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4화 (224/256)

  

94화.

다니엘은 그녀에게 호위 무사들을 붙여 주었다. 그들은 황궁까지 그녀를 호위할 사람들이었기 때문에 따로 묵을 곳이 필요했다. 성에 무장한 외국인을 들일 수는 없었기에 그녀는 작은 아셰의 집에 그들을 두고 성에서 오랜만에 사람들과 따뜻한 전통주를 마시며 회포를 풀었다. 켄의 말대로, 아셰가 걱정한 것처럼 그녀를 원망하는 사람들은 아무도 없었다. 모두 리스의 끔찍하게 느린 행정에 대해 잘 알고 있었고, 그들은 켄의 양자 허가증이 5년 동안 내려오지 않은 것들을 기억했다.

“제국, 아니 폴라리아 공화국은 나라가 바뀐 지 얼마 안 되었잖아요. 마님이 저희를 모른 척할 리가 없지요. 기억 안 나세요? 영주님이 가두었는데도 제 등을 뛰어넘고 화리트의 방에 들이닥친 거?”

에타가 유쾌하게 말했다. 화리트가 킬킬거리며 말을 이었다.

“서신이 그 넓은 땅덩이를 횡단하며 없어졌을 수도 있죠. 어마어마하게 넓다면서요. 그래도 마님의 친구 분이 늦게나마 서신을 보내 주어 다행이었어요. 제가 그것 때문에 살았다 아닙니까.”

아무도 벤에 대해서 얘기하지는 않았다. 그녀는 그녀의 곁을 마지막으로 지킨 집사, 벤을 생각하며 잠시 쓸쓸해졌다. 그들에게 이야기하지는 않았지만, 2년 전에 그녀는 이미 공화국의 우편과 행정 처리를 철저하게 손봐 두었다. 리스의 서신이 황궁에 도착하지 않을 리 없었다. 여전히 이곳에서는 촛불을 썼고, 타닥타닥 타는 모닥불 소리가 정겹게 울렸다.

술자리는 한밤중까지 이어졌다. 호위 무사들이 묵는 그녀의 집에 갈 수는 없어서, 그녀는 그녀가 쓰던 넓은 방에서 하루를 묵고 떠나기로 했다. 오랫동안 방이 비어 있었다며 켄이 혹시나 물이 새는 곳이 없나 잠시 들어와 천장을 살폈다.

“아이들…… 예쁘더라.”

그녀는 벽에 바람이 드는지 확인하고 있는 켄을 보며 문에 기대어 말했다.

“모두 널 닮았어. 초록색 눈부터 갈색 머리까지.”

아셰는 예의바르고 밝은 쌍둥이들에게 자신을 ‘고모님’이라고 부르게 했다. 이 성에서 뛰어다니는 아이들을 보니 옛날, 자신의 아이가 이렇게 컸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던 시절이 떠올랐다.

“리디아가 갈색 머리였어. 엄마를 닮았을 수도 있지.”

“이제 세 살이라고?”

“응. 다들 건강해. 그것만 해도 다행이지. 잘 봐서, 동생 놈은 수도에 올려 보낼까 생각 중이야. 리트와도 많이 늙었으니, 이 영지에 젊은 의원이 필요하거든.”

“……가능하다면 폴라리아에 유학을 보내. 내가 추천장을 써 줄게. 엔리히에 굉장히 큰 의료학교가 있어.”

그녀의 말을 듣고 켄이 가만히 서서 그녀를 바라보았다. 촛불에 그의 초록색 눈이 일렁이고 있었다.

“벤에게 이야기 들었어.”

“……뭘?”

“공화국에서 널 데려갔다고. 아메탄의…… 무슨 기술이 필요하다며 끌고 갔다고 하던데.”

“아. 그렇게…… 알고 있었구나.”

“늘 면목이 없었어, 네게.”

켄이 한숨을 쉬며 커다란 창가에 기대어 말했다.

“내가…… 마지막에 널 모른 척한다고 하지만 않았어도…… 네가 떠나지 않을 수도 있었을 텐데, 이런 생각을 많이 했어. 어떻게 내가 혼인을 하러 간 사이에 청혼서가 도착했을까. 늘 그런 중요한 문서들은 내 편이 아니었지, 뭐야.”

그는 쓸쓸하게 웃었다.

“양자 허가증만 해도 그렇고.”

아셰는 가만히 그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고개를 천천히 저었다. 그에게 이단에 대해 다 설명하고 싶지는 않았으나, 괜한 죄책감을 남기게 할 수는 없었다.

“켄.”

그녀는 자신의 손을 들어 보였다. 검지에 항상 자리하고 있던 금반지가 달빛에 비쳐 반짝였다.

“이단, 그러니까 통령은 이 반지의 주인이야.”

“……응?”

“내가 기다렸던 사람이 지금 내 남편이야.”

켄은 믿기지 않는다는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잠시 그녀를 바라보다가, 그가 헛웃음을 지으며 바닥을 내려다보았다.

“……그렇구나.”

“나는…… 나는, 그러니까 억지로 끌려간 게 아니야. 그냥 중간에, 음, 어떤 사람이 껴서 오해가 있었던 것뿐이야. 죄책감 같은 것 갖지 마.”

“그런데…….”

그는 천천히 그녀에게 다가와, 그녀의 긴 머리카락을 쓸었다.

“왜 이렇게 행복해 보이지가 않을까……. 이곳에 있었을 때보다 더 공허해 보여.”

“잠을 잘 못 자서 그래, 그동안.”

“아니…… 그냥 달라.”

아셰는 그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이단 역시 그녀가 행복해 보이지 않는다고 했다. 그럴 만도 했다. 그녀는 항상 바빴으니까. 켄은 한숨을 쉬며 손길을 거두고, 짐짓 밝게 웃어 보였다.

“뭐, 억지로 끌려간 게 아니라면 다행이야. 나는 항상 네가 갈 곳이 없을까 봐 그게 걱정이었어. 네 어머니는 이곳에 묻혔고, 피는 섞이지 않았지만 나의 성도 너의 어머니와 같은 카세튼이야.”

그녀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여긴 네 친정이야. 너는 말했듯이, 언제나 캐넌의 축복이고.”

“……켄.”

아셰는 멍한 눈으로 자신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나…… 사실 좀 지쳤나 봐.”

그 말을 꺼내기 전에는, 그녀는 자신이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 줄도 몰랐다. 한번 터져 나온 속마음 속에 울음이 감겼다.

“…….”

켄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피로해 보이는 그녀의 얼굴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그래서 이곳에 오고 싶었나 봐. 물론, 너와 마을 사람들에게 해명해야 했지만……. 그냥 내 마음이, 여기에 오고 싶었나 봐.”

그가 가만히 손을 뻗어 그녀를 안으려다가, 그대로 툭 내렸다. 아셰는 한숨을 쉬었고, 자신의 숨에 달큼한 취기가 맴돌고 있음을 알았다. 그러고 보니 그녀는 이단이 떠난 후 황궁에서 그동안 단 한 모금의 술도 마시지 않았다.

“다니엘과 나는…… 많이 닮았어. 둘 다 속을 잘 숨기고 정치적인 감각이 타고난 사람들이지만 그걸 즐기지 않았지. 다니엘이 늘 피로하다고 한 만큼 나도 똑같이 피로했어. 아무에게도 말하지 못했지만…… 그 누구도 응원하지 않는 나의 길을 간다는 건 너무 힘든 일이었는데…….”

“아셰…… 누워. 넌 잠을 좀 자야 돼. 내일 떠날 텐데, 몇 시간이라도 눈을 붙여야지.”

그는 그녀의 팔을 끌어 침대에 눕혔다. 그가 촛불을 끄자 캄캄한 어둠이 내려앉고, 달빛만이 침대의 곁에 앉은 그의 실루엣을 비췄다. 그녀는 침대에 누워 눈을 감았다. 그가 자신이 잠들 때까지 곁에 있을 것이라는 예감이 들었다. 아주 옛날, 그녀가 아이를 잃고 고통스러워할 때 그는 이렇게 3일 동안 그녀의 머리맡을 지켰다.

“나, 다 왔거든…….”

밑도 끝도 없는 아셰의 말에 전혀 끼어들지 않은 채, 그는 그녀에게 이불을 덮어 주었다.

“정말, 다 왔어……. 이 외롭고 오랜 나의 길이…… 나만이 아는 끔찍한 슬픔의 끝이…… 나를 이 캐넌에 오게 하고, 또 이 캐넌을 떠나 괴롭게 향하도록 했던 것이…… 이제 그대로 공화국에 돌아가면, 곧 모든 게 끝나.”

켄은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그녀의 머리카락을 넘겨 주었다. 그의 떨리는 손가락에서 그녀는 여전히 그가 자신을 사랑함을 알 수 있었다. 눈물이 맺힌 채로 그녀가 천천히 말했다.

“……켄, 나는 그 사람을 사랑해.”

“…….”

“그런데 내 인생에…… 사랑은 언제나 우선순위가 아니었어. 그럴 인생이 아니었거든. 그런 걸 어떻게 생각하며 살 수 있겠어? 어렸을 때부터 내가 배운 건 행복해지는 법 같은 게 아닌데.”

그의 손이 그녀의 눈물을 닦았다.

“그래도 나는…… 나는, 마지막 발걸음이 겁나. 그래서 이곳에 왔어.”

그에게 말하지는 않았지만, 아셰는 상황이 극단적으로 갈 경우 자신의 목숨까지도 버릴 각오를 하고 있었다. 커다란 일을 앞두고, 리젠도 다니엘도 모두 보았으니 마지막으로 켄이 보고 싶었다. 그런 마음으로 왔는데, 막상 그를 보니 자신이 몹시 지쳐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샤틴은 묻혔지만, 그녀는 영원히 묻히지 못할 이 땅에 한 번은 더 발을 디디고 싶었다. 그녀에게는 아메니티만큼이나 의미가 있는 곳이었고…… 몸과 마음이 지치지 않았던 유일한 장소였다. 다만 이곳에서는 하염없이 기다려야 했다. 아마도 이곳도 그녀의 자리가 아님을 알아서였겠지.

“아셰.”

켄이 나지막하게 말했다.

“네 인생에 사랑과 행복이 가득하기를 바라. 그건 나도, 그 남자도 줄 수 없고 단지 네가 결정해야 할 것들이야. 너를 사랑해서 괴로웠지만, 네가 그 일로 괴로웠을지도 모르지만, 수많은 사람들 앞에서 네 편을 들 수 있어서 내가 행복했듯이.”

“……네 인생에 내가 없었다면 더 좋았을 텐데.”

“아니, 난 너와 함께할 수 있어서 행복했어. 물론 좋은 기억만 있는 건 아니지만, 그런 것들은 일부러 잊었지. 너를 더 소중히 여길 수 있도록. 잊지 않아서 행복한 사람은 세상에 없을 거야. 오히려 포기해서 행복해지는 경우가 많지.”

“…….”

“난 어머니도, 아버님도, 부인도, 너도, 소중한 마을 사람들도 많이 보냈지만 지금 행복해. 넌 모르겠지만 옛 제국에 지원군을 보낼 때, 명단을 내가 직접 작성했어. 그중 돌아오지 않는 사람들이 태반이었지. 누구나 그늘을 지고 살아가. 잊을 건 잊고, 너도 나만큼이나 행복해지기를 바라.”

“…….”

“나는 너를 오랫동안 사랑해서, 수많은 실수를 하고…….”

그의 낮은 목소리를 듣자 마음이 가라앉는 것이 느껴졌다. 바깥에서 파도 소리가 자장가처럼 밀려왔다.

“또 충동적인 결정을 하고…….”

“…….”

“그러고도 결국엔 너를 보낼 수밖에 없었는데…….”

“…….”

“네게 뭐든지 주고 싶었지만…… 정말로 줄 수 있는 게 없었지.”

“…….”

“결국 내가 할 수 있는 게 네 행복을 바라는 일뿐이라면…….”

그녀의 숨소리가 규칙적으로 편안하게 가라앉았다.

“그것 하나는 들어줄래?”

“…….”

“……깨우지 않을 테니, 부디 잘 자.”

그는 가만히 한참 동안이나 그녀가 잠든 모습을 바라보았다.

[다음 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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