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93화 (223/256)

  

93화.

사브르는 예전에 한 번, 아셰를 데리러 캐넌에 간 적이 있었다. 아셰를 좋아했다던 젊은 영주를 보지는 못했지만, 그녀가 그곳에서 조건 없는 사랑을 받으며 안정된 정서로 지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리고 그 모든 것들을 이단이 무엇보다도 불안해한다는 사실이 이해가 가지 않는 바는 아니었다. 황궁은 아름다웠지만 황량했고, 사람이 많았으나 외로운 곳이었다.

“그렇지만 나는 개인을 보호하는 법을 지켜야 할 통령이고.”

그는 검은 눈을 번득였다.

“그녀의 자유 의지를 어찌할 수 없어.”

그가 어스름이 내려앉자 천천히 뜨기 시작한 여덟 개의 별을 보며 숨을 골랐다.

“……기다리겠다고 약속했으니 지켜야 해.”

“여독에 지쳤을 텐데 일단 쉬십시오. 방을 정리해 두었습니다.”

“어차피…… 아셰도 없으니 이곳에서 잠을 이루기는 힘들어. 황궁에 돌아온 순간부터 숨이 막히는군.”

그나마 아셰와 함께 있을 때에는 눈을 좀 붙일 수 있었던 그는 이미 불면을 예감한 모양이었다. 그가 정돈되지 않은 검붉은 머리카락을 넘기며 말했다.

“그동안의 회의록이나 가져와. 대리인으로 맡겼는데 괜히 내가 물으면 아셰가 간섭 한다 여길까 봐 묻지도 않았고, 너도 전혀 언급하지 않기에 알아서 잘할 거라 생각했지. 그래도 2년에 가까운 공백이 있으니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는 알아야 내일 회의에 참석할 것 아냐.”

“벌써 회의에 참석하신다고요?”

사브르는 눈을 동그랗게 뜨며 물었다. 어차피 이제 상황은 이단이 손을 쓰기에는 너무 늦었지만, 그래도 이렇게 빠르게 회의에 참석할 줄은 몰랐다. 그가 무심하게 말했다.

“회의가 싫긴 하지만, 내 의무는 다해야지. 그동안 아셰가 알아서 잘 했겠지만, 공백이 생기면 안 돼. 캐시가 대리인이라고? 꼭두각시를 세워 놨군.”

그가 그동안 한 번도 회의록을 묻지 않은 것은, 아셰를 전적으로 믿어서였다. 2년간 그녀가 쌓아 온 행보는 그가 감탄할 만큼 꼼꼼했고 꼭 필요한 것들이었다. 워낙에 정치적인 여자니 오히려 정치에 휘말리지 않으며 정확히 중립을 유지했다. 괜히 관심을 가졌다가 시간차 때문에 아셰에게 방해만 될까 봐 묻지 않았을 뿐이지, 만일 아셰가 아니라 사브르를 대리인으로 세웠더라면 무조건 정기적으로 회의록을 받아 보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밤새 그 회의록을 읽으며 한 장 한 장의 내용들을 믿을 수 없어 몇 번이고 복기해야 했다. 시튼과 딜라나는 아직 알아채지 못했어도, 그는 그 회의록들이 무엇을 말하는지 알 수 있었다.

이유를 알 수 없지만, 아셰는 2년간 정치에 전혀 관심 없이 민생에 직결된 뒤처리에만 집중하는 것처럼 그를 속였고, 그가 떠나자마자 보란 듯이 연임안을 통과시켰다. 게다가 이어지는 말도 안 되는 안건들은 통령에게 거대한 권한을 하나하나 얹어 주고 있었다. 숙청권과 제명권을 본 순간 그는 그대로 회의록을 구기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사브르 이 개자식이…….”

그러나 그는 알 수 있었다. 이 모든 것은 사브르가 꾸민 일이지만, 아셰의 도움이 없이는 전혀 이룰 수 없는 행보였다. 그는 배신감에 부들부들 떨며 떠오르는 해를 바라보았다. 그의 아내는 지금 그를 이 끔찍한 황궁에 영원히 가둘 계획을 세우고 있는 사람을 도왔고, 그의 승전도 환영하지 않은 채 빌어먹을 캐넌으로 향하고 있었다.

* * *

“……그래도 네 친구 덕분에…….”

켄의 눈은 여전히 맑은 초록색이었다.

“그 이후 많은 사람들이 살았어. 다행이라고 생각해.”

아셰는 마을의 공동묘지에 하나하나 꽃을 얹어 두고 오랫동안 묵념했다. 한때 그들과 울고 웃었던 시간들이 천천히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갔다. 누가 뭐라고 해도 켄과 그녀만 행복하면 된다며 감동 어린 말들을 하던 그들의 연설이 마치 어제 들은 것처럼 생생했다. 그녀는 눈을 들어 푸른 바다를 바라보았다. 엔리히는 내륙 한가운데에 있어 바다가 없었다. 소들의 목에 걸린 종들이 부드럽게 딸랑대는 소리를 들으며, 그녀는 이상하게 모든 것이 그립다고 생각했다.

“……몰랐어. 황궁에는 전해지지 않았거든.”

아셰는 벤의 무덤 앞에서 결국 눈물을 떨어트리며 심호흡을 했다.

“내가…… 내가 알았더라면…… 다 살 수 있었을 텐데…… 다 나 때문이야.”

“아냐.”

그가 부드럽게 말했다.

“그래도 네가 이곳에 와서, 리젠 하카트라는 사람을 알게 되고, 그 사람에게 서신을 받은 후 목숨을 건진 사람들이 많아. 너는 여전히 캐넌의 축복이야.”

아셰는 눈을 들어 그를 바라보았다. 이미 전염병은 2년 전의 일이었고, 캐넌은 다시 특유의 평화로운 활기를 찾은 이후였다. 그녀는 아메탄 왕궁에서 의료국에 부탁해 가장 자세한 의료 서적을 리트와에게 전달한 뒤 한참 동안 한숨을 쉬었다. 진작 전달했어야 하는 책이었다. 폴라리아 공화국의 모든 국민들이 정확하고 안정된 진료를 받기 위해 그토록 의료의 체계를 갖추도록 했으면서 정작 캐넌을 생각하지 못했다.

“……많이 말랐네.”

켄은 그녀와 함께 아스의 언덕을 오르며 말했다. 샤틴의 유해는 계획대로 캐넌에 묻었고, 그녀는 그녀의 별 볼 일 없는 효도가 끝났다고 생각했다. 그녀가 샤틴이라면 죽어도 아메탄의 왕궁에는 묻히기 싫었을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마찬가지로, 그녀는 절대 황궁에 묻히고 싶지 않았다.

“처음 보던 날처럼, 정말 좋은 옷을 입고 머리도 치렁치렁하게 길었지만…….”

아셰는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좋아 보인다는 말은 못 하겠다.”

“그동안 잠을 잘 못 자서 그래.”

그녀가 금발 머리를 푸른 리본으로 높이 묶으며 말했다. 묶어도 어깨 밑으로 무겁게 내려오는 머리채가 햇살에 빛났다.

“아메탄에서는 항상 잠을 잘 못 자. 말했잖아.”

“황궁은 괜찮아?”

그녀는 대답을 하려다가 탄성을 질렀다. 그녀의 작은 집은 여전히 단단하게 아스의 언덕에 서 있었다. 안에 들어가 보지 않아도 사람의 손이 계속 닿았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아담하고 작은 집은 깔끔했고 창틀에는 제철을 맞은 꽃들이 아름답게 피어 있었다.

“……그대로네. 네가…… 네가 계속 손을 봤어?”

“나도 손을 보고, 사람들도 가끔 울타리를 고쳐 놓거나 하더라고. 가끔 에곤과 에른이 놀러 오기도 하거든. 아, 에곤과 에른은 내 아들들 이름이야. 에곤은 아버님 이름을 땄어.” 

“아, 정말? 보고 싶은데!”

“성에 들르자. 보여 줄게. 널 좋아할 거야. 밝고 명랑한 애들이거든.”

아셰는 기대에 차서 웃다가, 금세 시무룩해진 얼굴로 그의 손을 잡았다.

“리디아 일은…… 정말 안됐어. 그 소식도…… 이제야 알았어.”

“원래 몸이 약하던 사람이었어.”

그가 한숨을 쉬며 말했다.

“선하고 유순한 사람이니 좋은 곳에 가 있을 거야. 그래도 에곤과 에른을 품에 안고 웃으며 갔어.”

“……다시…… 새로운 안주인을…….”

“아셰. 아니, 영부인님이라고 불러야 하나?”

“이미 반말 쓰고 있거든? 캐넌에서까지 그 무거운 이름을 부르지 마. 별로 원하던 직책은 아니니까.”

“……내게는 이 영지가, 아버님이 물려주신 이곳이 가장 중요해.”

그는 아셰의 집의 벽돌을 짚으며 하늘을 바라보았다.

“안주인이 잘못 들어오면 이곳은 불행해져. 알잖아. 이곳엔 보석도 없고 일손도 없어. 게다가 에곤과 에른에게 못된 짓이라도 하면…… 그 아이들은 내게 가장 소중한 존재야. 그런 위험을 무릅쓰고 싶지 않아.”

“좋은 여자들도 많아. 넌 혼자 살기엔 너무 젊고…….”

“난 말이야.”

그가 아무런 어둠도 없이 밝게 웃었다.

“양어머니를 겁탈하고 억지로 낙태시켰으며 심지어 청소부 아들이야. 게다가 이제는 안정된 후계까지 있지. 어린 쌍둥이 아들이 있거든. 대체 어떤 여자가 오겠다고 하겠어? 가뜩이나 외진 영지인데.”

“……아.”

아셰의 눈에 안타까움이 스친 것을 본 켄이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난 행복해. 굳이 여자가 없어도 돼. 후계는 안정되어 있고, 영지는 평화롭거든.”

“미안해.”

아셰는 고개를 푹 숙이며 말했다.

“정말 몰랐어. 내게 서신이 전달되었다면 바로 달려왔을 거야. 아니, 바로 달려오지 않았더라도 치료약이라도 잔뜩 보냈을 거야.”

“……알아.”

“그래도…… 아무리 기다려도 오지 않는 내 서신을 기다리며…… 얼마나 배신감이 들었겠어. 황궁으로 떠난 뒤 뒤도 돌아보지 않는다고 했을 것 아냐. 그 오해를 풀고 싶어 바로 달려왔어. 내게 캐넌은 버릴 수 있는 곳이 아냐. 혹시나 내가 캐넌의 미망인 출신이라는 걸 부끄러워한다고 여길까 봐. 정말로, 정말로 나는…….”

“네가 정말 우리를 버렸다고 생각했다면…….”

켄은 부드럽게 말했다.

“아메탄 왕국의 리젠 하카트에게까지 서신을 보내지도 않았어. 네게 사정이 있을 거라고 생각했지. 안 그랬다면 네 집이 이렇게 깔끔하게 자리를 지키고 있겠어?”

그녀는 고개를 들어 눈부시도록 새하얀 지붕을 바라보았다. 이상하게 마음이 놓이는 기분이었다. 대륙에서 가장 화려한 황궁에 살면서도 느끼지 못한 안도감이었다. 그녀가 뭔가 벅찬 마음으로 깨끗한 울타리를 바라보고 있는데, 아스의 언덕으로 한 무리의 사람이 올라오는 게 보였다.

“마님! 작은 마님!”

“말조심해! 영부인님이셔!”

“응? 왕비 마마 아냐?”

그녀는 웃으며 소리쳤다.

“그냥 작은 마님이라고 부르세요!”

장을 잔뜩 봐 온 에타와 화리트, 헤라를 앞세운 친근한 마을 사람들이었다.

“리트와 말이 맞았구나, 정말 오셨군요!”

“에소트와 벤이 살아 있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어쩐지, 오늘은 양고기를 사고 싶었어요!”

아셰는 자신도 모르게 퍼지는 미소를 어쩌지 못하고 번쩍 손을 들어 흔들었다.

[다음 편에 계속....]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