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2화.
“아메탄 왕궁을 떠난 뒤로 나는 효도라고는 조금도 안 했어…….”
아셰는 울지 않으면서도, 쓸쓸한 얼굴로 말했다.
“내게는 내 아이가 소중해서 먼 길을 떠나는데, 우리 엄마는 나를 그렇게 함부로 대했다는 사실이 용서가 안 되더라고. 하긴, 엄마도 나도 다른 사람이니 모성애도 다르겠지만.”
“아셰.”
다니엘이 가만히 말했다.
“……그 아이는 벌써 오래 전 일이야.”
그녀가 고개를 들었다.
“어쨌든, 그래서 아마 엄마에게 서신 한 장을 제대로 안 보냈나 봐. 그 외국을 떠돌면서 말이야. 물론 엄마도 내게 좋은 엄마는 아니었지만…… 나도 좋은 딸이 아니었던 거야. 하긴, 내가 누구한테 좋은 사람이었겠어.”
다니엘의 궁에는 둘뿐이었다. 독대를 청한 아셰는 다니엘을 보며, 새삼 그들이 아주 오랜 시간 동안 떨어져 있었다는 것을 실감했다. 옛날에는 당연히 둘이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는 것이 일상이었다. 이제는 용건이 없다면 어색했다. 그녀가 고개를 떨구며 말했다.
“하지만 마지막으로 나도 효도라는 걸 해 보려고.”
“…….”
“내 모친, 샤틴 카세튼의 유해를…… 아메탄 왕궁에 두고 싶지 않아. 허락해 줘. 엄마는 여기서 불행하기만 했고, 이 외롭고 쓸쓸했던 궁에 묻어 둘 수 없어.”
원칙적으로, 모든 비들의 주검은 선왕의 곁에 묻힌다. 그러나 아셰는 지금 그 원칙에 대해 부탁을 하고 있는 것이었다.
“……유해만이라도, 리스에 묻어 드리고 싶어.”
“리스?”
“예전에, 캐넌에 있을 때가 가장 행복했다고 말씀하신 적이 있어. 그토록 탐욕스러운 사람이 에곤 숙부한테는 어떻게 해서든 뭐라도 드리고 싶어 했던 걸 보면 그건 진심일 거야.”
“……캐넌에 묻어 드리겠다고?”
“아름다운 곳이야. 허락해 줘. 어차피 아바마마는 신경도 안 쓸 거야. 안 그래?”
아셰는 싱긋 웃었다. 다니엘은 한숨을 한 번 쉬고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가 아주 예전처럼, 이복 여동생의 머리를 한 번 쓰다듬었다.
“네 뜻대로 해. 허락할게.”
“……고마워.”
아셰는 눈을 내리깔았다. 지난 시간들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이미 알고 있었지만, 다니엘과는 예전처럼 막역한 오누이 사이로 돌아갈 수 없다. 그저 웃으며 대학에 함께 다니고, 그가 대학 친구들과 대련을 하는 것을 보며 열심히 응원하던 시절은 찰나일 뿐이었다. 모든 것이 그렇듯이 행복했던 순간은 잔상을 남기며 잔인하게 넘어가 버리고 말았다.
다니엘, 함께 자란 나의 동갑내기 이복 오빠. 아셰는 이제 두 아이의 아버지가 된 그를 차마 바라보지 못하고 오랫동안 고개를 숙인 채 있었다. 그녀와 똑같은 금발 머리를 가진 그와, 아름다운 푸른 눈으로 서로를 거울처럼 비추던 시절이 있었다.
“……아마도…….”
이제 다시는 다니엘은 아셰에게 이런저런 국정을 의논하며 고민을 털어놓지 않을 것이다. 그 사실이 그를 많이 쓸쓸하게 할 테고. 사실은 그녀도 지나고 보니 너무 그를 쉽게 떠났다는 생각에 아쉬웠다. 그 때는 배 속의 아이가 너무 소중하여, 하나뿐인 형제와 떨어진다는 아쉬움을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물론 루벤 역시 그녀의 형제지만, 워낙에 교류가 없는 사람이므로 논외로 칠 수밖에 없으니까.
“나는 이제 아메탄 왕궁에 올 일이 없을 거야…….”
“……그렇겠지.”
다니엘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아셰는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보았다. 눈에 눈물이 차오르는 것을 느끼며 그녀가 아주 옛날부터 하지 못했던 말을 입술에 담았다.
“네가 전혀 왕위에 관심이 없던 것을 알고 있어. 갑자기 쓰게 된 왕관에 많이 외로워졌다는 것도.”
그녀는 떨리는 숨을 고르며 말했다. 다니엘에게 하고 싶었던 마지막 말이었다. 어쩌면 다시는 보지 못할 수 있다는 생각에 그녀의 목소리가 잠겼다.
“네가 윌리엄을 얼마나 좋아했고 따랐는지 알고 있어. 나와는 또 달랐겠지…… 동복의 형제였으니까.”
“너도 내게는 소중했어. 정말로, 언제나.”
“나는…… 그래서…….”
그녀가 힘겹게 말을 이었다. 하나를 뺏기면, 하나를 빼앗는다……. 그건 다니엘에게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엄마를…… 네가…… 함부로 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어……. 내가 네 소중한 사람을 빼앗았으니, 네가 샤틴 카세튼에게 보복할 수도 있겠다……. 그렇다고 해도 어쩔 수 없지……. 나는 그토록이나 못된 딸이었는데…….”
다니엘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런데 엄마를 끝까지 궁에 두고, 시녀를 붙여 주고, 의료국 사람들로 하여금 끝끝내 목숨을 오랫동안 부지하게 해 줘서 고마워. 그리고 내가 폴라리아에 가게 되었을 때, 교역을 빠르게 허가해 준 것도. 공화국의 혼란을 위해 시간을 좀 더 끌 수 있었을 텐데, 빠르게 답해 준 덕분에 내 입지가 처음부터 단단할 수 있었어.”
아셰는 결국 다니엘의 손에 얼굴을 묻고 눈물을 쏟아 냈다. 생각해 보니 그에게 받은 것이 너무 많았다. 그가 마냥 선량하지만은 않은 사람이라는 것을 알아서 더 고마웠다. 그래서 비로소 미안하다는 말도 이제 와서야 할 수 있었다. 예전 같으면 그녀를 꼭 안아 주었을 다니엘은 가만히 그녀를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네게 이 무거운 왕관을 씌우고 억지로 왕위에 앉혀서…… 미안해. 정말 미안해.”
“아셰.”
다니엘은 그녀의 눈물을 닦아 주며, 낮은 목소리로 슬프게 중얼거렸다.
“나는 있잖아…….”
“…….”
“이제는 잊었어. 진심이야.”
아셰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잊었다고? 그녀의 눈에 의아함이 담겼을 때, 다니엘이 말했다.
“아직은 넌 모르겠지만, 수사국에서 오늘 아침 알려 온 사안이 있어. 우리는…… 음, 이제 전화라는 것도 쓰거든. 스타람에서도 많이 불안정했지만, 우리는 꽤 성공했어. 아직은 수사국에서만 쓰고 있긴 한데…… 어쨌든 지금 황궁보다도 우리가 더 정보는 빠를 거야.”
수사국이라면 현재 대륙에서 가장 정확한 정보를 알고 있는 기관이다. 아셰는 전깃불이 환하게 비추고 있는 다니엘의 얼굴을 영문도 모른 채 가만히 바라보았다.
“이단 엔리히 통령이 결국엔 모든 제국군을 평정시키고, 끝의 끝까지 멸망시켰다더군. 결국엔 폴라리아 공화국의 국경은 제국과 똑같아졌어. 그 때까지 이단이 몰아붙였으니까.”
“……그랬구나.”
예상했던 바지만, 그녀의 표정은 살짝 굳을 수밖에 없었다.
“오늘 아침 황궁으로 출발했어. 이미 샤틴의 죽음 때문에 네가 아메탄 왕국에 있는 건 알고 있다더군.”
“그……래?”
“황궁에 먼저 가지 그래. 그래도 기록할 만한 승전을 가지고 오는 사람을 맞아 주는 것이 배우자의 도리 아니겠어? 내가 결혼을 하고 보니, 커다란 일이 있을 때에는 왕비가 가장 보고 싶던데.”
아셰는 생각에 잠긴 표정을 지었다. 다니엘이 부드럽게 말했다.
“샤틴의 유해는 잘 보관해 두고 있을게. 아니면 내가 캐넌에 사람을 보내는 건 어떨까. 때가 때이니만큼, 네가 굳이 직접 갈 필요는 없으니.”
“아니.”
아셰가 별로 망설이지도 않고 대답했다.
“캐넌에 먼저 가겠어.”
다니엘이 미간을 찌푸렸으나, 그녀는 천천히 덧붙였다.
“이것도…… 장례식 때문에 너무 늦은 거야.”
“아셰, 내가 왕이 된 입장에서 조언할게. 캐넌과 통령은 저울질할 무게가 아냐. 넌 영부인의 입장이고, 아무리 샤틴의 유해를 고향에 묻어 주고 싶다고 해도 우선 통령의 승전을 환영해야 할 의무가 있어.”
“의무는 아니지.”
“의무가 아니더라도. 통령은 왕과 달라. 그에게 충성하는 사람은 없어. 우리가 상상하는 것보다 그는 훨씬 더 외로울 거야. 그걸 몰라서 나는…… 예전에 크게 실수한 적도 있어. 너는 그러지 마.”
“공화국에서 5년을 보냈어. 나보다 그 위치를 정확히 아는 사람은 없을걸.”
아셰는 담담하게 대답했다.
“하지만 오빠, 다른 사람도 아닌 내가 이런 결정을 한다는 건…… 그만한 이유가 있다는 뜻이야.”
10. 모든 것의 끝
폴라리아의 수도 엔리히에는 승전을 축하하기 위해 거대한 축제가 열렸다. 결국 과거의 제국이 차지했던 영토를 그대로 국경으로 지니게 된 폴라리아 공화국에서 이단의 지지율은 엄청났다. 그러나 그는 황궁에서 그를 맞이하는 사람들 중 익숙한 금발 머리의 아내가 없는 것을 보고 미간을 찌푸렸다.
남들의 축사와 연설, 환영 인사 등을 건성으로 받고 대충 대답하던 그는 사브르를 붙잡아 낮게 물었다.
“분명 친모의 장례식은 열흘 전이라고 하지 않았나?”
사브르는 이단의 눈이 번득이는 것을 바라보며 숨을 죽였다. 아셰가 그런 식의 돌발 행동을 할 줄은 그 역시도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것이다. 그는 진실을 말했다가 이단이 얼마나 날뛸지 짐작도 할 수 없어 망설였다. 이단의 마지막 부탁은 그녀를 절대 캐넌에 가게 하면 안 된다는 말이었다. 사브르의 망설임을 본 이단의 눈에 더욱더 잔인함이 내려앉았다. 아직 평화보다 전투가 익숙한 남자의 눈은 살기를 감출 수 없었다.
“3일장을 치르고 넉넉하게 출발해도 이미 이틀 전에는 엔리히에 도착했어야 해. 그녀는 아메탄을 좋아하지 않아. 뭉개며 그곳에 머무를 이유가 없어. 어떻게 된 거야?”
“……그게…….”
사브르의 연한 갈색 눈이 흔들렸다. 어차피 숨길 수 없는 진실이었다. 그가 체념한 듯 한숨을 섞어 말했다.
“캐, 캐넌으로…….”
“뭐?”
“모친의 유해를 캐넌에 묻어 주고 싶다며, 캐넌으로 향했다고 합니다. 아, 아시다시피 아메탄과 캐넌의 거리는 상당해서…… 꽤 많은 시간이…….”
그의 표정이 싸늘하게 굳었다. 사람들 앞이라서 잔혹한 본능을 애써 누르고 있다는 것을 그를 가장 가까이 지켜본 사브르는 알고 있었다. 아셰라는 변수가 이렇게 돌발 상황을 만들어 버리면 이단이 미친 황제처럼 날뛸까 봐 사브르는 두려웠으나, 일단 지금은 아닌지 그가 피식 웃으며 낮게 말했다.
“그렇게 모친과 돈독한 사이였다면 결혼식에도 안 오진 않았겠지.”
“……가, 강제 소환 할까요? 사람을 부르겠습니다.”
“일전에 말한 적 있지.”
그가 이를 갈며 말했다.
“내가 황제였다면 이미 캐넌은 지도에 없다. 이런 일이 벌어질 줄 알고 내내 불안했으니.”
[다음 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