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91화 (221/256)

  

91화.

“진심이에요? 이단 통령님도 그렇게 생각할까요?”

“대륙에 이단 엔리히를 모르는 사람이 없어. 왕이든 통령이든 이름값은 해야 해. 왕관의 무게는 견디라고 있는 거야. 예전에 말하지 않았어? 왕족이 사랑 타령하기 시작하면 비극이 일어난다고. 우린 충분히 선대에게 배웠다고 생각하는데.”

그녀가 살짝 웃었다.

“게다가 난 너무 멀리 왔어. 사브르를 매일같이 보며 칼을 갈았다고. 그가 원하는 대로 다 해 주며 드디어 받은 신뢰야. 이렇게 눈앞에 복수가 있는데, 정말 이대로 돌아가기만 하면 10년 가까이 기다렸던 복수가 완성되는데, 그걸 직전에 포기하라고? 난 복수를 위해 이단마저도 3년을 넘게 속였어. 아니, 이곳에서 시간을 버리고 있는 것까지 포함하면 4년에 가깝지.”

리젠은 깊게 한숨을 쉬었다. 어차피 아셰는 그 누구의 말도 듣지 않을 것이 뻔했다. 하지만 사브르를 죽이고 자신도 죽겠다는 말은 너무 충격적이어서, 그게 이단을 위하는 길이라고 진심으로 생각하는 것도 이해가 되지 않아서, 어디서부터 어떻게 설득해야 할지 감도 잡히지 않았다. 

사람은 다 다르다지만 어쩜 이렇게 하나부터 열까지 가치관이 다 다를 수 있단 말인가. 며칠 더 붙들고 얘기해야겠다고 생각하며 그녀는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냥, 차라리, 그 영지에서 켄 영주님과 평온하게 살았다면 더 좋았을 거예요. 이단 통령은 너무 힘들고 복잡한 남자예요……. 그에게 얽혀 있는 무게와 권력이 너무 많아서…….”

아셰는 피식 웃으며 대답했다.

“이제 켄 얘기는 하지 마. 이미 남의 남자인걸. 켄은 좋은 남자라, 자신의 새로운 아내에게 충실할 테고, 나와 더 이상 얽힐 사람이 아니야.”

“……네?”

리젠은 멍청하게 눈을 깜빡였다. 영리한 리젠이 그런 표정을 지은 것은 너무 오랜만이어서, 아셰는 그녀의 손등을 살짝 치며 얘기했다.

“몰라? 켄은 근처의 영주 딸과 혼인했어. 그래서 내가 자존심 다 굽히고 황궁에 들어갈 수밖에 없었는걸. 그리고 아직까지 서신 한 장이 없었어. 물론 나도 안 보냈지만……. 영지의 모든 사람들에게서 연락이 없었단 말이야. 그토록 친했던 모든 사람들에게서.”

“……정말요?”

리젠의 표정이 순식간에 복잡해졌다. 아셰는 미간을 찌푸렸다. 눈치가 빠른 그녀가 리젠의 머뭇거림을 놓칠 리가 없었다. 그녀가 천천히 중얼거렸다.

“나는…… 나는 그동안…… 켄이 리디아와 너무 잘 지내고 있다고 생각했어. 영지 사람들도 리디아에게 너무 만족해서, 내게 작은 서신 하나도 보내지 않는 것으로……. 그곳 사람들은 의리가 있으니까. 그런데…….”

“……그동안, 황궁에 있으면서…… 캐넌의 소식을 하나도 듣지 못했다고요?”

아셰의 눈이 차분하게 가라앉았다. 리젠의 표정을 보고 무언가를 재빠르게 알아챈 그녀가 숨을 죽이고 중얼거렸다.

“내가 멍청했지. 복수에 눈이 멀어 여기까지 생각 못 하다니. 누구보다 이단 엔리히를 잘 알면서…… 내가 무심했어. 맞아…… 사실 난 모든 것에 무심하긴 했지.”

“…….”

캐넌에서 가져온 그녀의 짐조차 없애 버린 남자다. 만약 서신이 왔다고 하더라도, 그녀에게 전달했을 리가 없었다.

“캐넌에 무슨 일이 있었지? 나는 아무 것도 알지 못해. 이단이 막았을 거야. 이단은 점점 더 제정신이 아닌 것 같았거든. 말해 줘. 그게 무슨 소식이든.”

리젠은 잠시 망설이는 눈빛이었다. 그러나 그녀의 팔을 잡은 아셰의 손에 점차 힘이 들어가자, 한숨을 쉬며 내뱉듯 말했다.

“왕녀님, 켄의 부인 리디아는 3년 전 아이를 낳다가 죽었어요. 그의 쌍둥이 아들은 살아남았고요.”

“……어?”

아셰가 속삭이듯 물었다.

“그걸 네가 어떻게 알아?”

“왜냐하면…….”

리젠이 한숨을 쉬며 천천히 말했다.

“2년 전 캐넌에 커다란 전염병이 돌았어요. 제게 서신이 왔어요. 리트와? 그런 의원의 이름이었는데, 많은 사람들이 죽고 있으니 도와 달라는……. 왜 저한테 알렸나 했는데…… 아마 서신이 황궁에 닿지 않으니 유일하게 왕녀님과 연결된 주소인 제게 보냈나 봐요.”

아셰는 멍청하게 그녀를 바라보았다. 아메탄에 갈 때마다, 무슨 일이 생기면 아메니티의 리젠 하카트에게 연락하라며 켄에게 당부했던 옛날의 자신이 떠올랐다.

“저는 당연히 황궁에도 서신이 간 줄 알고 크게 신경 쓰지 않았어요. 다만 리트와가 서술한 증상으로 봐서 단순한 역병 중 하나인 듯해 간단한 의견과 처방을 보내 주었지요. 그 때에…….”

아셰의 눈에 눈물이 고였다.

“……부고가 도착했어요…… 이름은 다 기억나지 않지만…… 에소트, 벤? 그 정도만 기억이 나네요. 아마 그 역병이 맞았나 보더라고요. 나중에 감사 서신이 짧게 왔어요.”

“켄은?”

그녀가 숨을 떨며 물었다.

“켄은 살아 있어?”

“……네. 저도 마음이 쓰여 카이든에게 알아보라고 부탁했어요. 켄과 쌍둥이는 살아남았다고 해요. 리디아가 아이를 낳다가 그전에 죽었다는 것도 그때 알았고요.”

아셰는 한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그녀는 충격으로 흐르는 눈물을 어쩌지 못하고 몸을 떨었다. 캐넌에 전염병이 돌았는데 그녀가 몰랐다는 사실은 너무나 끔찍했다. 리트와가 어떤 마음으로 아메탄의 리젠 하카트에게 서신을 보냈는지 상상하면 그녀는 아찔하기 그지없었다. 리젠 하카트의 이름을 아는 것은 켄이니, 켄이 리트와를 통해 그녀에게 도움을 요청한 것이다. 아무리 황궁에 서신을 보내도 그녀에게 닿지 않고, 어쩔 수 없이 실낱같은 희망을 붙잡고 기다림에 지쳐 리젠 하카트의 집으로 서신을 보냈을 그의 마음이 참담하게 다가왔다.

에소트, 벤, 그리고 알 수 없는 캐넌의 사람들이 죽었다. 단순한 역병이라면 그녀가 서신만 제때 받았어도 다 살릴 수 있었을 것이다. 답이 없는 그녀를 기다리며 그 사람들은 무슨 생각을 했을까. 켄은 그녀를 지켜 주었는데, 영지 사람들은 그 추문을 다 이해해 주면서까지 그녀를 감싸주었는데 그녀는 캐넌이 그녀를 필요로 할 때 전혀 도움을 주지 못했다. 그들 입장에서는 황궁으로 떠나고 나서 그대로 연락이 두절되어 버린 셈이었다.

“……이단…….”

그녀는 몸을 떨면서 중얼거렸다. 그를 사랑하는 만큼 분노도 컸다. 아셰의 목소리가 낮게 가라앉았다.

“이단이야. 알 수 있어. 모든 서신을 막은 건 그 사람이야.”

리젠은 마른침을 삼키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평민인 그녀는 왕족들이 얼마나 목적을 위해서 잔인해지는지 이미 알고 있었다. 아주 예전에, 리젠을 좋아했던 다니엘은 카이든의 모든 방문을 인위적으로 끊어 버린 적이 있었다. 가장 친한 친구와의 연락도 끊어 버릴진대, 훨씬 더 잔혹한 황족인 이단이 그녀와 캐넌을 연결시켜 줄 리 없었다.

“왕녀님.”

리젠이 그녀를 꼭 안았다. 이 문제는 평민인 그녀가 개입할 것이 아니었다.

“……행복도 노력해야 해요. 인생에 그저 주어지는 건 없잖아요. 왕녀님도 부디 노력해서라도 행복해 주세요. 부탁이에요.”

“…….”

“저도 자세히 들여다보면 엉망진창인 사람이에요. 아마 켄도 그럴 거예요. 저희 둘 다 왕녀님을 아끼지만 분명 왕녀님께 좋은 일만 하지는 못했을 거예요. 완벽하게 사는 건 르엘라조차도 실패했어요. 왕녀님은 저와 켄을 높게 평가하시는데, 사실은 우리 모두 똑같은 불완전한 사람일 뿐이에요. 그러니 저희처럼 적당히 눈감으신 채 소중한 사람에게 충실하세요.”

그녀의 진심이 느껴져 아셰는 눈을 감았다. 그녀는 지금까지 누군가의 오롯한 행복을 바라본 적이 있었던가? 생각나는 것은 맑은 초록색 눈을 가진 남자, 켄 카세튼뿐이었다. 그에게 영지 사람들이 얼마나 소중한지 알고 있었다. 역병보다 훨씬 더 약한 전염병에도 그는 망설이지 않고 목숨을 걸고 멧돼지를 잡으러 떠났다. 그런데 그녀는 그가 그녀를 가장 필요로 할 때 그의 곁에 없었다.

“리젠.”

아셰는 조용히 중얼거렸다.

“나는 이단을 사랑하지만…… 그가 줄 수밖에 없는 감정이 분명히 있지만…… 이단 엔리히만을 사랑할 수밖에 없는 이유가 내게는 넘치도록 많지만…… 그와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끝끝내 그의 곁에 있겠지만…….”

“제발, 왕녀님.”

“그게 내 인생의 전부는 아냐.”

리젠은 아무 말도 없었다. 그 때, 시녀가 문을 벌컥 열고 들어왔다.

“왕녀님, 아니 영부인님!”

아셰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시녀가 숨을 헐떡이며 소리쳤다.

“샤틴 마마의 증세가 좋지 않으십니다. 어서 가 보셔야 할 것 같아요!”

샤틴의 장례식은 조촐하게 치러졌다. 아셰는 꿋꿋하게 3일장 모두 자리를 지키고, 샤틴의 유해를 화장하겠다고 결정했다.

“우리 어머니는 아메탄 왕국에서 불행하기만 했어.”

그녀는 화장 이후, 다니엘에게 독대를 청해 차분하게 말했다.

“어린 시절, 나는 어머니에게 나밖에 없다는 걸 알았어. 그래서 그 폭언을 듣고도 궁 안의 모든 소식을 날라다 주고, 매일같이 그 히스테리를 다 받아 냈지.”

다니엘은 가만히 아셰의 이야기를 들었다. 그들은 왕위와는 가장 거리가 먼 삶을 살 것이라고 서로 생각하여 유년기에 그 누구보다도 친하게 지냈지만, 운명은 그들을 각각 가장 높은 자리에 올려놓았다. 다니엘은 아메탄의 왕으로, 아셰는 폴라리아의 영부인으로. 서로의 위치가 상당해진 그들은 더 이상 예전처럼 맘을 털어놓는 대화를 하지 않았다. 아셰가 아메탄 왕궁에 머물렀던 두 달 동안, 다니엘은 단 한 번도 비밀 통로를 통해 그녀를 찾지 않았다.

그녀가 마지막으로 궁에 머물렀을 때, 다니엘은 그녀에게 수많은 말을 쏟아 내며 위로를 받았다. 막 왕위에 올랐던 그의 심리적 부담감을 받아 줄 사람이 아셰뿐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제 다니엘이 왕위에 오른 지도 몇 년이 흘렀고, 그에게는 소중한 아내와 아이들이 있었다. 더 이상 아셰가 필요하지 않게 된 것이다. 아니, 어쩌면 폴라리아 공화국의 영부인인 여동생이 부담스러울 수도 있었다. 이미 외국의 수장이 된 그녀에게 다니엘이 그 어떤 속을 털어놓을 수 있을까. 아셰는 그가 그녀를 보러 오지 않고, 대화를 섞지 않은 것을 이해했다.

[다음 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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