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1화 (220/256)

  

61화.

그의 얼굴에 수많은 시간이 겹쳐 보였다. 황궁 지붕에서 술을 마시던 소년의 앳된 얼굴과 그녀의 궁으로 들어오던 청년의 무표정이 떠올랐다. 그녀가 알지 못했던 그의 시간을 마주하며 아셰는 살짝 두려움마저 들었다. 그녀는 자신을 설득하듯 속으로 중얼거렸다. 이건 로맨틱한 상황이야…… 이 남자는 나를 사랑해서 이 작은 영지까지 왔어…….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이상하게 섬뜩하다는 생각을 하지 않기 위해 노력해야 했다.

“나와는 다르게, 넌 삶을 체념한 마음으로 나와 잠자리를 같이 하고 외부 세상이 궁금해 나를 받아들였다는 거 알고 있었어. 사랑을 말하는 네 입술이 영원을 뜻하지 않는다는 것도 알았지. 내가 그토록 4년 반 동안 믿고 기다리라고 했어도, 네가 나를 믿지 않을 것도 당연히 알았어. 네 오라비가 널 거기 가둔 걸 나만큼 감사했던 사람은 이 세상에 없을 거다.”

그러고 보니, 이단과 자신은 차분하게 마주 앉아 자신들에 관해 이야기를 나눈 적이 없었다. 그녀의 궁에서 몸을 섞었던 밤들은 욕망에 들떠 감정을 주고받기엔 너무나 짧았고, 3년 전 작은 배에서의 만남은 고작 두 시간뿐이었다. 그동안 그는 그녀를 급히 안고 미래에 대한 약속만 주입시키기도 바빴다.

“왜, 왜…….”

“나조차 이유가 궁금했던, 그 모든 시간과 감정에 이름을 붙여 준 건 너야.”

아셰는 그의 날카로운 눈매를 피하지조차 못하고 가만히 그를 바라보았다.

“너를 사랑해서 그랬어.”

이 남자가 생각하는 사랑이란 이토록 끈질긴 것일까? 함께하지 못한 시간이 함께한 시간보다 훨씬 길었다. 아셰는 그가 ‘사랑’이라는 단어를 내뱉을 때마다 그녀에게 고백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에게 말하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대체 왜 달콤하기 그지없는 단어인데 듣기에 묘하게 이질적일까? 그가 천천히 그녀의 손을 놓았다. 그러나 여전히 그의 체온이 남아 손이 화끈거렸다.

“3년 전 그 배 안에서도, 너는 내 앞에서 가면을 벗지 않았어. 나는 이해할 수 있어. 나조차도 네게 아메탄 왕궁에서 내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 말하지 않았으니까. 남들은 이해할 수 없어도, 나는 알 수 있다고. 그런데 넌…….”

그가 참담한 표정으로 술잔에 남아 있던 술을 모두 삼키고 턱을 든 채 냉랭하게 말했다.

“이곳에서 또 내가 전혀 모르는 사람이 되었군.”

“…….”

“영락없는 시골 처녀처럼 웃고 떠들며, 내가 보았던 그 어느 때보다 좋아 보이는 널 보고 나는 또 어쩔 줄을 모르겠어. 그리고…….”

그 말에는 아셰도 대답할 수 있었다. 그녀가 미간을 찌푸리며 끼어들었다.

“이단, 그럼 내가 이런 시골짝에 박혀서 시녀들보다도 못한 옷을 입는다고 슬퍼해야 된다고 생각해? 이곳에 초코칩 쿠키가 없다고 히스테리라도 부릴까? 못 배운 사람들과 말도 섞지 않겠다며 성에 틀어박혀 있어야 돼?”

“너를 볼 때면 나는 이상하게 내 아버지가 이해가 돼. 그게 미칠 것 같아. 하지만 그러면 안 된다는 것도 알아. 내가 네게 선택의 기회를 준 건…… 본능이 아니라 학습이지. 그러니까 다시 말해 줘.”

그녀는 차분하게 그를 바라보았다. 10년 전 광기에 미친 황제를 먼발치에서 본 적이 있다. 모든 걸 파괴해 버릴 수 있는 힘을 가진 사람들은 얼마나 제정신으로 살기 어려울까. 그리고 황제의 눈매를 정확하게 빼닮은 이 남자는 억지로 본능을 누르고 자신의 앞에 있었다.

“내가…… 내가 억지로 너를 밀어붙이고 있는 것이 아니라고, 나를 사랑한다고, 기다렸다고. 전쟁이 끝나면 내 청혼을 받아들여, 언제까지나 내 곁에 있겠다고. 이게 다 네 자유 의지라고.”

“이단.”

그녀가 천천히 일어서서 두 손으로 그의 두 뺨을 감쌌다. 순식간에 감정적인 판도가 뒤바뀌어서, 그의 눈에는 두려움이 일렁거렸다. 무슨 두려움일까. 아셰는 짐작하기 어려웠다. 아셰의 거절에 대한 두려움인지, 그 거절을 받아들이지 못할 것 같은 자신에 대한 두려움인지. 그러나 그녀는 궁금해하지 않기로 했다.

그에게 사랑을 말하며 안기면 어차피 그의 눈은 다시 그녀를 보며 유순해질 것이고, 그의 불안함에 그녀는 똑같은 언어로 대답할 테니까. 그녀는 궁에서의 한 달을 믿었다. 자신을 안으면 결국엔 다정해지는 사람이다. 부드러운 손길로 머리카락을 쓸어 주며 해 달라는 이야기는 다 해 주는 남자다.

무거운 분위기를 어떻게든 바꾸기 위해 그녀가 그의 뺨을 부드럽게 쓸며 속삭였다.

“나와 맨 처음 했던 약속을 기억해?”

그녀와 그의 사이에서 달큰한 술 냄새가 감돌았다.

“우리는 아무런 이해관계가 없는 사람들이고…….”

이단의 두 손이 자연스럽게 그녀의 허리를 감았다.

“모든 걸 일대일로 교환하도록 하자. 서로를 과도하게 의심하거나 바라지 않도록.”

아셰의 푸른 눈이 반달로 휘어졌다.

“황궁의 비밀 통로를 이용했으나 네가 살려 주었으니, 나도 왕궁의 비밀 통로를 이용한 건 눈감아 줄게.”

벌써 4년 가까이 된 기억이었다. 그녀가 장난스럽게 예전 이야기를 꺼내자, 이단이 옅게 한숨을 쉬었다.

“네가 나를 이토록 사랑하니…….” 

그녀가 그의 입술에 가볍게 입을 맞추고, 그의 허벅지에 자신의 다리를 올려놓으며 말했다.

“……나 또한 너만을 사랑할 거야. 이것은 우리의 가장 첫 번째 약속이니 의심하지 않아도 좋아. 그럼 불안하지 않겠지?”

“싸구려 무명천을 둘렀어도 넌 정말 여전하군.”

그가 그녀의 허리를 감싸고 목을 물었다. 그녀는 그의 부풀어 오른 남성에 의도적으로 자신의 다리를 밀착하며 속삭였다.

“이 밤, 이 성에는 우리 둘뿐이고, 밤새 이 방에 아무도 오지 않을 거야.”

3일 밤낮을 이 방에서 내 아이를 생각하며 울었는데.

“당신은 또다시 떠날 테고.” 

나는 너를 사랑하지만, 그 이전에 너는 나를 반드시 사랑해야 해. 그녀는 원래부터 조건 없는 사랑을 믿지 않았다. 3년 동안 그녀는 평화 속에서 이단을 가끔씩 잊었다. 승부도 알 수 없는 전쟁을 밑도 끝도 없이 기다릴 순 없었다. 만일 복수심이 없었다면 그녀는 켄과의 삶을 선택했을지도 모른다. 아주 어린 시절부터 그녀는 사랑보다 안정에 가치를 두며 살아왔다.

설레지 않고, 가슴이 떨리지 않는 게 대체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그런 것이 없어도 살 수 있었다. 늘 평화로운 삶을 망치는 것은 사랑이었다. 자신의 아버지도, 루벤도, 르엘라도 모두 사랑 때문에 비극을 만들었다. 특히나 오늘 같은 밤, 켄이 어쨌든 그녀를 감싸 준 밤, 이단이 공교롭게 오지 않았다면 충동적으로 그의 곁에 있겠다고 결정했을 수도 있었다. 그리고 그런 종류의 결정은 한번 내리면 다시 번복하기에 어렵겠지.

거꾸로 생각하면, 시간의 힘에 굴복하여 이단 역시 그녀를 잊을 수도 있는 셈이었다. 그러나 이렇게 그녀를 찾아오는 것이 신기할 만큼 그에겐 그녀와 달리 아무런 유인이 없었다. 그게 오로지 나를 사랑해서라고? 어린 시절의 추억도 한순간이고, 몸을 섞은 것도 고작 한 달. 그만한 인연은 몇 년 동안 몇 번이라도 만들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나를 대체 왜?

“너.”

무엇이 되었든 좋았다. 어쨌든 그는 그녀를 사랑해야 했다. 그녀를 곁에 두고 싶어 해야 했다. 이 마음이 변하지 않아야 했다. 전쟁이 끝나면 그녀를 데려가서 사브르라는 사람을 만나게 해 줘야 했다.

“나를 두고…….”

전쟁이 끝나 평화가 찾아와도 아셰는 그가 자신을 잊지 못하도록 오늘 밤, 최선을 다하겠다고 생각했다.

“……무슨 생각까지 해 봤어?”

그의 눈에 참았던 욕망이 일렁거렸다. 그녀가 그의 머리카락에 입을 맞추면서 속삭였다. 커다란 창 밖으로 달빛이 그들의 실루엣을 비추었다.

“밤은 길고, 이 방에는 우리 둘뿐이니…….”

그녀는 그의 귀에 천천히 속삭이며, 체중을 그에게 실었다.

“말해 봐, 뭐든.”

그녀가 고개를 돌려 촛불을 끄는 것과 동시에, 그의 거친 손이 그녀의 옷을 한 번에 찢었다. 실크가 아닌 오래된 싸구려 천은 젊은 남자의 악력에 그대로 너덜너덜해졌다. 그는 찢겨진 옷 속으로 비치는 그녀의 실루엣을 탐욕스럽게 바라보며 낮게 말했다.

“네가 감당할 수 있는 유혹을 해야지.”

“…….”

“너는 내가 어떤 기분으로 널 찾아오는지 조금도 몰라.”

그가 그녀의 쇄골에 입술을 대고 속삭였다. 

“그게 진심이든 아니든, 네 유혹에 언제나 응할 수밖에 없는 내 쓸쓸함도.”

그의 뜨거운 숨 때문에 온몸이 화끈거리는 것 같았다.

“내 혈관에는 누구나 두려워하는 미친 피가 흘러. 젊은 영주와 이어 주고 싶다는 저 사람들의 눈앞에서 내가 무슨 생각을 했는지 알면 넌 사랑이고 뭐고 도망가고 싶을걸.”

그녀의 몸이 굳었다. 뭐라고? 그렇다면 그는 지금 성 앞에서 그들을 기다린 게 아니라, 광장에서 있었던 모든 일들을 알고 있다는 얘기가 된다. 대체 어디서부터 들었던 거지? 이 남자, 지금 제정신은 맞을까? 켄은 광장에서 그녀가 자신의 애를 배었다고까지 했다. 그녀가 표정 관리를 하지 못하고 몸을 떨기 시작했다. 그가 낮게 말했다.

“에곤의 양아들이겠지, 저 남자는?”

“……이제 이곳의 영주야.”

“저 남자가 너를 보는 눈빛은 말할 것도 없고…… 넌 저 남자 앞에서 진심으로 웃고, 진심으로 화내고, 진심으로 울더군. 그 모든 것을 밑에서 바라보며 내가 얼마나 비참했는지 너는 짐작하지도 못해. 마음 같아서는 모두 죽여 버리고 그 앞에서 너를 짐승처럼 갖고 싶었지만…….”

“…….”

그녀의 눈에 두려움이 스쳐 지나가자, 그가 웃으며 의자에 기대앉았다. 진심으로 당황한 것 같은 그녀의 얼굴을 보며 이단이 부드럽게 말했다.

“벗겨.”

“……응?”

더 생각할 틈이 없었다.

“나를.”

그녀는 조심스럽게 그의 후드를 벗기고, 셔츠의 단추를 하나하나 풀었다. 그새 가슴의 상처는 더 늘었고, 단단한 근육은 더 선명하게 자리 잡았다. 싸움의 흔적을 하나하나 매만지던 그녀는 그의 바지를 내리고, 알몸으로 의자에 앉아 있는 그의 앞에 가만히 앉았다. 부풀어 오른 그의 남성에 조심스럽게 입을 맞추자, 그가 참지 못하고 신음 소리를 흘리면서 그녀의 머리를 붙잡았다.

[다음 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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