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화.
저 멀리 언덕 아래의 광장에서 사람들이 웃고 떠들며 즐기는 소리가 웅웅거리며 들려왔다. 아셰는 마른침을 삼켰다. 아주 찰나지만, 에소트가 두 분이 행복하시길 바란다는 연설을 했을 땐 이 사람들 속에서 그저 이대로 정착할까 하는 생각도 했다. 켄은 그 누구보다도 단단하게 자신을 지켜 줄 테고, 영지 사람들은 속으론 몰라도 겉으로는 그들을 응원할 테니까.
‘그저 제 나이에 맞는 유순한 사람의 정실 자리로 보내 주세요.’
아주 어렸을 때부터 바라 왔던 삶.
‘작은 영지라도 좋으니 자유가 있는 곳, 지루해도 좋으니 암투가 없는 곳, 외져도 좋으니 외롭지 않은 곳.’
자유와 솔직함, 인정과 유쾌함으로 넘치는 곳. 끼니마다 달콤한 디저트는 없어도, 어느 둥근 달이 뜬 밤 젊은 영주가 잡아 온 멧돼지로 축제를 벌일 수 있는 작은 영지.
‘대륙 어디를 가도 저만큼 좋은 남자는 없을 거야.’
그녀의 발밑에 쓰러져 있는 이 남자는 어쩌면 아셰가 만날 수 있는 가장 정직하고 올곧은 남자……. 하지만 그 때, 그녀에게 떠오른 건 아주 엉뚱하게도, 정말 오래 전 시녀가 머뭇거리며 설명한 카드 하나였다.
‘왕녀님은 어디론가 떠나게 되는데, 그곳에서 계속해서 이방인으로 남으실 거예요.’
한참을 망설였지만, 그녀는 이미 자신의 대답을 알고 있었다.
‘왕녀님의 마음이 끝내 정착하지 못한다는 의미이기도 하지요.’
켄의 그늘에 숨어 다 잊고 살 수 있었다면, 3년간의 시간을 이렇게 보내지는 않았을 것이다. 시간에 희미해질 것 같으면 그녀는 언제나 밤하늘을 보았고, 검지에 걸쳐진 반지를 매만졌다. 납작한 배를 쓸었고, 한 번도 입지 못한 헐렁한 치마를 쓸어 보곤 했다. 그녀는 3년 전 어느 망망대해에서, 이단의 몸을 받아들이며 눈물로 했던 맹세를 기억했다.
‘짓지도 못한 네 이름 대신 그의 이름을 내 입술로 불러, 네 숨을 끊은 그의 숨을 직접 끊고, 저승에서 아무 죄 없는 네게 사죄하도록 할 테니.’
그녀가 눈을 들어 그를 바라보았다. 이곳은 아름답고 평화로웠지만, 그녀의 자리는 아니었다.
“……3년이라는 시간을, 기다리면서 보냈어.”
그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어찌할 수 없는 떨림이 그녀에게까지 느껴졌다. 벌써 10년 전인가, 그를 처음 만난 것이. 그녀는 운명의 장난에 허탈하게 웃고 말았다. 10년 전 캄캄한 밤하늘을 함께 보며 황궁의 지붕에 나란히 앉아 있던 그때부터, 아직도 밝은 햇살 아래에서 그를 본 적이 없다. 별이 쏟아지던 망망대해에서 짧게 만난 뒤, 3년 만에 그가 그녀를 보러 온 지금도 캄캄한 밤이었다.
“무엇을?”
“……전쟁의 끝을, 청혼을, 너를.”
아셰는 작지만 분명하게 말했다. 이단이 그녀를 똑바로 쳐다보았다.
“지금…… 지금 제대로 대답하지 않으면…….”
그는 그녀의 몸에 바짝 다가서며 말했다.
“……너는 이 남자에게 영원히 못 가.”
그녀는 쓰러져 있는 갈색 머리의 청년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망설이지 않고 그의 목에 자신의 두 팔을 감았다.
“이단.”
그녀의 눈에 눈물이 흘렀다. 그녀는 자신이 이렇게 잘 우는 사람인 줄 몰랐다. 오히려 어릴 적에는 눈물이 없었는데, 나이가 들면서 슬픔이 익숙해지며 눈물이 흔해진 것 같았다.
“사랑해.”
“……또.”
“기다릴게.”
“……또.”
“너와…… 결혼할 거야.”
그가 그녀를 와락 끌어안고 깊게 입을 맞추었다. 숨이 막힐 정도로 격정적이었고, 3년이라는 시간을 만회라도 하려는 것같이 치열했다. 그녀의 혀를 거칠게 빨아들이며 그가 그녀의 목을 움켜쥐듯 감쌌다. 그녀는 그녀를 압박하고 있는 익숙한 체온 속에서, 이미 온몸이 떨리고 손끝까지 긴장으로 뻣뻣해진 것을 알았다.
‘켄…….’
며칠 전, 켄과 입 맞추었을 때의 무덤덤함을 기억하며, 그녀는 눈을 감았다.
‘……포기해.’
거칠게 그녀의 머리카락 속에 손을 집어넣으며, 그가 그녀의 몸을 성벽으로 밀착시켰다.
“네 선택이야.”
그는 그녀의 입술을 핥고, 코를 맞대며 속삭였다.
“강제로…… 강제로 널 내 곁에 두는 게 아니야. 우린 약속을 지키는 것뿐이야.”
아셰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천천히 후드 안에서 팔을 들었다. 거의 너덜너덜해진 채 처음의 흰색을 찾을 수 없는 그녀의 치맛단이 그녀가 3년 전에 매듭을 지어 준 그대로 남아 있었다.
7. 생각과 청혼
이단은 이를 갈면서 켄을 업고 들어가 그의 침대에 내던지듯 내팽개쳤다. 아셰는 허둥지둥 그의 몸을 정돈하여 이불까지 덮어 준 후, 입술 사이로 진통제와 수면제를 흘려 넣었다. 부어 오른 오른쪽 다리를 성 안에 남아 있던 약초로 비상 처치를 하고서야 그녀는 한숨을 쉬며 일어섰다.
“난 의원이 아니야. 그저 약초학에 조금 조예가 있을 뿐이지. 이게 최선이야.”
“……끝났나?”
“응. 내 방으로 가자. 따뜻한 술이라도 한잔 줄게.”
“따뜻한?”
“아, 응. 여긴 과실주를 따뜻하게 데워 마시거든. 꽤 맛이 좋아.”
“네 차를 마실 수도 있다고 생각했는데.”
“캐넌에서는 차를 마시는 문화가 없어.”
그는 그녀가 바로 맞은편의 방문을 열자 낮게 되물었다.
“……이 자식과 맞은편 방이야?”
“그냥, 넓어서 이곳을 골랐을 뿐이야. 앉아서 기다려. 오랜만의 축제라, 다들 잔뜩 취해서 새벽녘에야 들어올 테고 하인들이 모두 남자라, 함부로 내 방에 들어오지는 않으니까.”
그녀는 마치 사나운 개가 어쩔 수 없이 주인의 말을 듣는 표정으로 못마땅하게 의자에 앉은 그를 보고 피식 웃은 뒤, 주방에서 따뜻한 술을 내왔다. 영락없는 시골 처녀 같은 모습에 이단은 술잔을 들고 그녀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침묵이 생각보다 오랫동안 흘러서, 아셰는 다소 움츠러드는 기분으로 조심스럽게 물었다.
“왜 그래?”
“……처음 봐서.”
“뭘?”
“네가 내게 화내는 것.”
“아…… 그래서 지금 기분이 나쁜 거야?”
아셰는 그에게 조심스럽게 질문하며, 어쩌면 자신이 그에 대해서 잘 모르고 있다는 생각을 했다. 지난번에 만났을 때에는 정신없이 그녀를 안고 미래의 약속을 몰아붙이던 그였는데, 오늘은 생각이 많아 보였다. 그녀의 맞은편에 앉은 그는 씹어 뱉듯 말했다.
“제발 내게 속을 보여 주길, 화를 내고 토라지기라도 해 주길 간절히 바랐는데…… 아메니티의 마력을 빼앗고 도망쳤어도, 3년 동안 서신 한번을 안 보냈어도 그런 것들에 대해서는 언급조차 하지 않는 사람이 너야. 그런데 저 남자를 한 대 쳤다고…….”
아셰는 시선을 내리깔았다. 그가 천천히 말을 이었다.
“……잊기 어려울 것 같군.”
“마력을 빼앗은 것은 네 대의 때문이고, 서신을 안 보낸 건 혹시나 내가 누군가에게 추적당할까 봐서겠지. 넌 지금 대륙에서 가장 폭풍의 중심에 있는 사람이니까 당연히 신중해야 하는 것 아니겠어?”
다시 침묵이 흘렀다. 그녀를 빤히 바라보는 그의 시선에 숨이 막힐 것 같았다. 이 남자는 도대체 왜 풍기는 분위기조차 위태로울까. 그의 새까만 눈을 살짝 피하는 그녀에게 이단이 낮게 말했다.
“정말로, 10년 전이군. 네가 이제 스물여섯이던가.”
“……응.”
그녀가 술을 한 모금 마시고 대답했다. 분위기가 너무 무거워서 술기운이라도 필요했다. 이단이 손을 내밀어 여전히 그의 눈을 바라보지 못하는 그녀의 손을 붙잡고, 손가락 하나하나 천천히 깍지를 꼈다. 체온이 얽히기 시작하며 그가 놓지 않겠다는 듯 그녀의 작은 손을 꽉 잡았다.
“맨 처음 너를 보았을 때, 그 앳된 얼굴에 곱게 화장을 하고 최신 유행의 아름다운 드레스를 걸치고 있었지. 나무 컵에 와인을 마신다며 짜증을 냈던 그 표정까지 기억나. 인형같이 예쁜 소녀가 목숨을 걸고 지붕을 기어올랐을 때부터 호락호락한 여자가 아니라는 건 알았지만.”
그의 손가락이 그녀의 검지에 걸려 있는 반지를 훑었다.
“황제가 네게 청혼을 넣었을 때, 나는 궁을 뛰쳐나가 반란군의 가장 밑으로 기어 들어갔어. 약혼이 깨지고 네가 태자를 죽였다는 말을 들었을 때, 내 생애 그렇게 유쾌하게 웃었던 적이 없었는데.”
이단은 살짝 웃음소리를 냈지만 눈이 전혀 휘어지지 않아 기괴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아셰는 숨을 죽이고 가만히 그의 말을 들었다. 매일같이 지냈던 자신의 방에서 이단을 맞이하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이상하게 설렌다기보다는 무서웠다. 이단은 지금까지 아무것도 안 했는데, 본능적으로 몸이 움츠러들고 있었다.
“황제의 암살에 실패하고 도주했을 때, 아카날 총통은 스타람의 지원을 계속 받고 싶으면 아메탄의 마력을 빼앗으라 협상해 왔어. 그 당시 아메니티는 가장 부유한 도시였고, 봉쇄령으로 무역이 막힌 스타람은 어떻게든 돈을 끌어와야 했으니까.”
“……그랬구나.”
그녀는 가까스로 대답했다. 왜 하필 이 시점에서 옛 이야기를 하는지, 그녀의 손가락을 천천히 얽어 낸 그의 손에 왜 이렇게 힘이 들어가 있는지 궁금했지만 묻지 못했다. 그는 단 한 번도 시선을 돌리지 않고 그녀의 눈을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아메니티의 마력은 아메탄 왕궁에 뿌리를 두고 있었고, 그러려면 왕궁에 직접 들어가야 했어. 위험하다며 모두가 말렸지만, 난 단번에 가겠다고 했지. 그게 왜일까.”
그녀는 대답하지 못하고 이단을 바라보았다. 지금, 이단은 10년 전 그날부터 꾸준히 자신을 생각해 왔다고 고백하고 있었다. 궁을 나와 반란군에 들어간 것도 자신이 아버지와 결혼을 할 것 같아서였고, 아메탄 왕궁에 온 것도 그녀를 보기 위해서라고? 그게 가능할까 싶어 그녀의 눈에 순간적으로 의아함이 떠올랐다.
“……너를 다시 보고 싶어서.”
“이단, 음…….”
“아메탄 왕궁의 마법은 복잡해서 잠도 자지 못하고 매달려야 했지. 아무리 황족의 피를 타고났어도 이용할 수 있는 마력은 점점 줄고 있고 고대마법은 너무 단단해. 그럼에도 불구하고 밤마다 네 궁으로 향하는 나를 어쩔 수 없었어.”
“…….”
“너를 진심으로 갖고 싶었으니까, 황궁 지붕에서부터.”
“…….”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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