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9화 (218/256)

  

59화.

“별거 아닌 전염병에도 영주님은 멧돼지를 잡으러 뛰쳐나가셨고, 작은 마님은 실제로 우리 모두를 구해 주셨습니다. 작은 마님은 오로지 저희를 구하겠다는 일념만으로 영주님의 명령을 어기기도 했지요. 이런 두 분을 섬길 수 있는 건 우리 영지의 축복입니다.”

“옳소!”

“동의합니다!”

“아, 에소트, 말 잘한다!”

에소트는 얼굴을 붉히며 헛기침을 했다. 그가 심호흡을 하고 말을 이었다.

“다른 영지에서 비웃고, 욕하고, 헐뜯는다 하더라도 캐넌의 사람들이라면 그런 것보다는 두 분이 행복하시길 바랄 겁니다. 부디 청컨대, 남의 시선은 신경 쓰지 마시고 시원하게 좀 사랑하며 사시길 바랍니다. 작은 마님, 우리 영주님 마음 좀 받아 주십시오. 3년 반 전에 설탕 상자 들 때부터 영주님은 작은 마님을 사랑했을 겁니다.”

에소트의 말에 모두가 키득대며 웃었다. 아셰는 난감함에 어쩔 줄 모르고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헤라가 저 멀리에서 소리쳤다.

“작은 마님, 우리 영주님 같은 남자 없어요!”

그녀는 일단 이곳에서 벗어나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아셰는 차분하게 일어서서 말했다.

“여러분, 지금 여러분은 많이 취했고 감정적입니다. 어쨌든 성에서 물의를 일으켜 죄송하고, 너무 갑작스러운 일이라 향후 조금 더 의논하도록 하겠습니다. 일단은 영주님도 몸이 좋지 않고 저도 많이 취해서 저희는 들어가 보겠습니다.”

“단둘이라면, 찬성이오!”

화리트가 휘파람을 불며 유쾌하게 소리쳤다. 아셰는 눈을 질끈 감고 말을 이었다.

“멧돼지가 아직 많이 남았으니, 실컷 밤을 즐기도록 하세요. 아, 성에서 일하시는 분들도 오늘 밤은 늦게까지 놀다 오셔도 됩니다. 켄과 저는 둘이 들어가도 돼요.”

“당연하죠! 작은 마님, 배가 고프시면 주방에 양고기가 남았습니다!”

에타가 술에 취해 사람들 속에서 소리쳤다. 켄은 아셰의 결정이 현명했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일단 이 자리에서 벗어나는 것이 중요했기에 그와 그녀는 자리에서 내려가 성으로 올라가는 길을 걷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 모든 광경을 지켜보던 후드를 뒤집어쓴 남자가 조용히 그들의 뒤를 따랐다.

“미쳤어?”

치료를 계속해서 늦추고 있던 켄의 다리는 점점 상태가 나빠져, 아셰는 성으로 올라가는 길에 그를 계속 부축해야만 했다. 그녀의 양 볼에 눈물이 주룩주룩 흘렀다.

“뒷감당을 어떻게 하려고 그런 소리를 해?”

그녀의 어깨에 팔을 걸치고, 절뚝거리며 걸어가던 켄은 피식 웃으며 다정하게 말했다.

“그럼 어떻게 해야 되는데? 나보다 영리한 너는 더 훌륭한 답을 알고 있어?”

그가 천천히 그녀의 눈물을 닦아 주었다. 아셰는 말문이 막혀 입술을 달싹거리다가, 결국엔 땅을 내려다보며 중얼거렸다.

“……멍청이, 진짜.”

“옆에서 보니까…… 이제 어디로 가야 하나, 그런 허망한 표정으로 서 있던데.”

“…….”

“나는 너만큼 눈치가 빠르지는 않아도, 갈 곳이 없는 사람의 표정은 잘 알아.”

“……나는 아메탄의 왕녀야. 물론 지금은 아니더라도. 그리고 내 오빠는 아메탄의 국왕이고.”

그녀가 단호하게 말했다.

“내가 그저 아메탄에 돌아가기 싫어 버티고 있는 중인 거지, 아메탄에 가면 오빠가 이 성만큼의 거처는 마련해 줄 거야. 그렇게 불쌍한 천애 고아는 아니란 말이야.”

“그건 네가 결정할 일이지만, 적어도 캐넌에서 쫓겨난다는 생각은 들지 않게 하고 싶었어.”

그는 표정의 변화 없이 낮게 말했다.

“말했잖아. 나는 캐넌의 영주고, 너는 내 여동생이고, 어떻게 해서든 세상 천지에 갈 곳이 없다는 그 기분은 느끼게 하지 않을 거야. 너는 캐넌의 선물이고 여기가 네 집이야.”

“……앞으로 어쩔 건데.”

그녀가 속이 상해서 투정부리듯 말했다. 켄은 그녀의 마음을 안다는 듯이 부축을 받으며 그녀의 팔을 가만히 쓸어 주었다.

“그러게.”

켄은 어깨를 으쓱하고 오른쪽 다리를 힘겹게 끌었다.

“근데 내일부터 혼사를 알아보기엔 너무 뻔뻔한 거 같아서……. 시간이 좀 지나야겠지?”

“시간이 지나야 된다 뿐이야?”

그녀가 눈을 흘겼다.

“아마 좋은 가문의 여자를 데려오긴 글렀을 거야. 누가 제 양어머니를 겁탈하고 그 애를 죽인 남자에게 시집을 오겠어? 분명 멀쩡한 여자는 절대 오지 않을 텐데…….”

“음…….”

켄은 다리에서 느껴지는 통증에 잠시 신음을 흘렸다가, 고민하는 척하며 말을 이었다.

“살인 혐의가 있고, 한 번 시집을 갔다 온 미망인…… 정도면 어떻게 안 될까?”

“아, 진짜!”

그녀가 눈을 흘기며 그의 배를 아프지 않게 쳤다. 결국 켄과 있으면 이렇게 웃을 수밖에 없게 된다. 울다가 결국 피식 웃어 버린 그녀에게 켄이 킬킬거리며 말을 이었다.

“왕녀와 영주라고는 하지만, 너는 정말로 부유한 왕국 출신이고 나는 시골 촌구석의, 친아버지가 누구인지도 모르는 양자일 뿐이야. 신분으로 치면 이렇게 친오누이처럼 지내는 것은 모두 네가 너그럽기 때문이지. 그러니 내게 미안해하지 마. 왕녀를 오누이로 둔 대가니까.”

“리스에 비해 부유할 뿐이야. 아메탄은 국토가 작고 인구가 적어 강대국이 될 수 없어. 언제나 제국의 눈치를 보는 약소국이지. 체계적인 교육 끝에 산하기관에서 사람을 갈아 넣어 부를 쌓았을 뿐이지, 대단한 나라의 왕녀도 아니야. 사실 그냥 리스 공국이 워낙에 작고 약하며 가난한 국가일 뿐이야.”

그녀가 한숨을 쉬었다.

“리트와에게 뭐라고 할 게 아니야. 내가 리스의 의학 서적에 대해서 끊임없이 불평하는 거 들었지? 의원도 그저 배운 대로 하는 건데…… 그냥 리스 자체가 학문적으로 너무 뒤떨어져.”

“학자자리까지 있다는 너희 나라에 비해서, 우리는 목축업의 국가니까. 우리는 학자라는 직업도 없다고. 대신 소의 울음소리는 기가 막히게 구분해 내지. 다 문화의 차이 아니겠어?”

“……뭐야, 왜 이렇게 똑똑하게 말해?”

“잘난 척하는 누군가에게서 배워서 그렇지.”

아셰는 또다시 켄을 아프지 않게 때리고, 그를 부축하며 걷다 결국 웃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이 남자는 도저히 어떻게 할 수가 없을 정도로 착하고 정직하다. 캐넌을 그녀의 집으로 만들어 주기 위해 켄은 어디까지 자신을 희생할 수 있을까. 그녀는 또다시 울컥 치솟으려는 눈물을 억지로 가슴속에 묻어 두었다.

“계단 오를 수 있겠어? 일단 네 방에 가자. 잠시 기대어 있어.”

아셰는 걱정스럽게 켄을 바라보며, 성문의 앞에 놓여 있는 테이블에 앉혔다. 사실 성이라고 하기에도 조금 민망한 작은 저택이었지만 확실히 캐넌 영지에서는 가장 좋은 집이기도 했다. 혹시 영주를 만나러 온 사람들이 기다릴까 봐 성문 밖에는 테이블과 의자를 몇 개 가져다 놓았는데, 워낙에 켄이 자주 마을에 내려가서 일손을 도우니 거의 무용지물이었다.

켄은 끙끙대며 테이블에 기대어, 열쇠를 찾고 있는 아셰를 바라보았다, 성안의 하인 다섯 명은 모두 광장에서 밤새 놀 것이다. 텅 빈 성에 둘이 있는 것은 처음이었다. 아셰는 열쇠를 여는 것도 처음이라, 집사인 벤이 건네준 열쇠 꾸러미들 속에서 성문의 열쇠를 찾느라 열중하고 있었다.

“잠시만.”

켄은 자신의 부어오른 오른쪽 다리를 살펴보다가, 문득 고개를 들었다. 아셰는 벤이 알려 준 네모난 모양의 열쇠를 찾기 위해 미간을 찌푸리고 집중하다가 성의 없이 물었다.

“응?”

“……누가 있는 것 같은데.”

“있기는 누가 있어. 다 광장에 있는데.”

그녀는 습관적으로 한 번 툴툴대고, 천천히 뒤를 돌았다가 너무 놀라 열쇠를 떨어트렸다. 켄은 비틀거리며 일어나 아셰를 막아섰다.

“……이 영지 사람이 아니군. 누구지?”

검은 후드를 둘러쓴 남자는 그대로 켄에게 달려들었다. 아셰는 새된 비명을 질렀다.

“안 돼! 다쳤단 말이야! 다친 사람이야! 안 돼!”

켄은 그의 첫 번째 공격은 피했으나, 오른쪽 다리를 디딜 수 없어 휘청거렸다. 그 틈을 놓치지 않고 남자가 켄의 목덜미를 쳤고, 아셰는 자신도 모르게 달려 나가 정신을 잃고 쓰러지는 켄의 몸을 받았다.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었고, 그녀는 이런 식으로 사람의 정신을 잃게 하는 남자를 이미 알고 있었다. 그녀가 켄의 다친 다리의 각도를 유의하며 조심스럽게 잔디밭에 뉘이고 나서야 벌떡 일어섰다.

“다쳤다고 했잖아!”

그녀가 숨을 몰아쉬며 소리쳤다. 그녀의 눈에 참지 못하는 노여움이 섞여 있었다.

“잘못 넘어져서 다리를 영영 못 쓰게 되면 어떻게 하려고…….”

“……3년 만이야.”

그가 후드를 벗었다. 짙은 눈썹 밑에 작은 흉터가 남은 것을 빼면 크게 달라진 것이 없었다. 검붉은 머리카락이 달빛에 빛나고, 후드에 가려진 단단한 몸은 그녀가 기억하는 체격 그대로였다. 햇빛을 많이 보았는지 조금 더 그을린 피부에 새까만 눈이 그녀를 바라보았다.

“처음으로 하는 말이 다른 남자에 대한 걱정이야?”

그녀는 숨을 삼켰다. 시간 속에 희미해지던 그에 대한 그리움이 다시 왈칵 솟구치는 기분이었다. 그가 그녀의 앞에 천천히 섰다.

“3년 내내 불안했지.”

“…….”

“사랑하고, 기다리고, 전쟁이 끝나면 청혼을 받아 주겠다는 말을 그토록 반복시켰는데도 매일같이 불안했어. 너는 항상 나를 불안하게 해.”

그의 시선이 급하게 그녀의 오른손 검지에 자리 잡은 그의 금반지를 향했다. 사실 그녀도 3년 동안 꾸준하게 불안했던 것을 그는 알고 있을까.

“그 남자를 바라보는 너의 표정을 내내 지켜봤지. 나는 네가 거짓이 없을 때의 표정을 알아. 이 남자를 대할 때에는 내내 그 얼굴이더군. 내게는 아주 가끔밖에 보여 주지 않던.”

그는 고통스럽게 미간을 찌푸렸다.

“제발…… 제발 내게 사랑을 말해 달라고 무릎이라도 꿇고 싶은 심정이지만…….”

아셰는 그들 사이에 존재하는 공기마저도 떨리는 것 같아 숨을 죽였다. 그의 낮은 목소리가 수많은 감정을 누르고 이어졌다.

“……나는 황제가 아니야. 독재와 폭정에 반대하여 혁명을 일으킨, 개인의 의지를 존중하는 임시 총독이니…… 받아들여야 하겠지. 정말로 이대로 내가 영영 네 삶에서 사라져 주기를 바란다면, 반지를 돌려줘.”

[다음 편에 계속....]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