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8화 (217/256)

  

58화.

그녀는 애초부터 그렇게 태어났다. 딱히 대단한 삶의 의지나 거대한 목표도 없으면서 윌리엄을 죽였다. 나를 해한 자는 용서하지 않아. 반드시 사브르 키릴의 눈을 바라보고, 왜 그랬는가 직접 실토하게 하고, 내 얼굴을 바라보게 하며 내 손으로 죽일 거야. 이단을 통하지 않는 이상 작은 영지의 미망인인 자신이 혁명군의 권력자를 만날 수 있을 리 없었고, 그러니 이단을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아, 리트와 때문에 내가 헛소리한 걸 생각하면 정말 끔찍하다고!”

아셰는 눈치채지 못했지만, 후드를 뒤집어쓴 이방인이 천천히 일어섰을 때 때마침 광장 한가운데에서 난리가 났다. 카토가 술에 잔뜩 취해 떠들기 시작했던 것이다.

“젠장, 여자 이름을 읊는 바람에 우리 마누라가 바가지를 얼마나 긁었는데!”

재미있는 농담에 사람들이 잔뜩 모여 깔깔거리며 웃기 시작했다.

“입 돌아갔던 나도 있어!”

스미스가 킬킬거리며 벌떡 일어섰다.

“내 마누라도 내 얼굴을 보고 웃음을 참지 못하던데! 얼마나 서럽던지…… 리트와, 넌 한 가정의 평화를 깼다고.”

사람들이 잔뜩 모여 또다시 리트와에게 면박을 주고 있었다. 아셰는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켄의 손목을 잡았다. 켄 역시 리트와의 붉으락푸르락한 표정을 보고 슬슬 자신이 나서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리트와 이 돌팔이, 내가 각혈하고 엄청 놀랐던 걸 생각하면 멱살도 아까워.”

화리트의 얼굴도 붉게 달아올라 있었다.

“마법사들한테 각혈은 거의 죽음의 신호란 말이야! 난 정말 내가 죽는 줄 알았다고. 작은 마님이 영지에 안 계셨으면 어쩔 뻔했어?”

“하, 작은 마님이 3년 전 캐넌에 안 오셨으면…….”

의상실의 헤라가 팔짱을 끼고 소리쳤다.

“일단 우리 중 절반은 굶어 죽고, 나머지 절반은 오늘 제각각 다른 증상으로 죽었겠구먼!”

사람들이 깔깔거리며 웃었다. 화리트가 장단을 맞추며 소리쳤다.

“어이, 리트와! 그냥 나랑 배나 타지 그래? 의원은 작은 마님께 넘겨!”

아셰는 벌떡 일어났다. 화리트가 선을 넘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군중심리 때문에 사람들은 더 크게 웃음을 터트리면서 아셰가 캐넌에 와서 너무나 다행이며, 리트와 대신 아프면 성에 가야겠다는 말을 질 수 없다는 듯이 주고받았다. 리트와는 얼굴이 벌게져서 모욕을 참고 견디다가, 벌떡 일어서서 소리쳤다.

“내가 의원이야! 젊은 날 수도에 가서 공부했지만, 이 거지같은 영지가 그래도 고향이라고 돌아왔다고! 술잔이나 돌려 마시는 미개한 너희들의 병을 30년간 치료해 왔어. 그런데 뭐? 3년 전에 온 외국인에게 의원을 넘기라고?”

“작은 마님이 단순히 3년 전에 온 외국인은 아니지!”

헤라가 질 수 없다는 듯 소리쳤다.

“캐넌을 구하신 분이라고! 게다가 영주님의 미망인이셔. 당장 사과해!”

“맞다, 리트와. 외국인이라니, 말을 너무 함부로 하는 것 아냐?”

카토가 팔짱을 끼며 끼어들었다. 리트와가 어이가 없다는 듯이 술잔을 쾅 내려놓았다. 이미 취할 대로 취했는지 그의 얼굴부터 발끝까지 모두 벌겋게 달아올라 있었다.

“카토, 너 그날 술집에서, 작은 마님을 살인자라고 했던 것 기억 안 나? 왜, 그 빌어먹을 반점들이 사라지니까 바로 노선을 변경하고 싶었냐?”

“그, 그건 사실이지만 이 자리에서 말하면 어떡해!”

카토는 눈에 띄게 당황하며 리트와의 멱살을 잡았다.

“그럴지라도 작은 마님은 내 목숨을 살려 준 사람이야. 그날 말은 취소다. 살인자고 뭐고, 더한 거라도 작은 마님은 캐넌에 계셔야 할 분이셔.”

“넌 참 사람이 쉬워서 좋겠다. 네가 그토록 갑자기 꼬리를 흔들기 시작한 작은 마님은 살인자도 맞지만 부정한 여자야!”

아셰의 몸이 뻣뻣하게 굳었다. 그녀의 아이가 사라졌을 때, 리트와는 그녀의 진료를 맡았다. 광장이 물을 끼얹은 것같이 조용해졌다. 리트와는 술에 취해 혀가 꼬인 상태로, 침을 튀기면서 말을 이었다.

“3년 전 급히 성에서 불려 가 보니 작은 마님은 임신 상태더군. 다들 알지만, 에곤 영주님은 아이를 생산하지 못해. 어떻게 된 건지는 몰라도 누가 애를 떼는 시약을 먹여 아이는 그대로 사라졌지만…… 어쨌든 영주님의 부인으로서 부정한 일을 했단 말이야!”

정적이 흘렀다. 기세등등하게 리트와를 노려보고 있던 화리트가 입을 떡 벌리고, 천천히 아셰와 켄이 앉아 있던 높은 자리로 몸을 돌렸다.

“아, 아니죠?”

아셰는 빠르게 생각했다. 일단 아니라고 부정해야 할까? 리트와가 자신을 모함했다고 덮어씌울까? 다행히 그녀가 대답할 새 없이, 광장 사람들이 자기들끼리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마, 마님, 아니죠? 아닌 거죠?”

“그럴 리 없어…… 작은 마님, 리트와가 거짓말하는 거죠?”

“아냐. 리트와는 돌팔이잖아. 사실 에곤 영주님이 후사가 가능한 몸이었을지도 몰라!”

“그, 그럼…….”

어떤 것이 가장 최적의 정답일까 재빠르게 생각하려고 했지만, 너무 갑작스러운 데다가 아이에 관련된 말이었기 때문에 순간적으로 표정 관리가 안 되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한 번 망설이기 시작하자 광장의 사람들의 시선이 모이고, 그녀는 머리가 하얘졌다. 이렇게 많은 사람 앞에서 갑자기 거짓말을 만들어 낼 수는 없어……. 그날 밤 리트와가 온 것은 사실이고, 진료 일지라도 있다면…….

“마님, 아니라고 해 주세요!”

“리트와가 어디 돌아 버린 거 아냐? 누구랑 착각하는 거 아니냐고!”

“아니, 맞다면 아버지는 누군데?”

“혹시 다른 사람의 애를 밴 채 오신 거야?”

“그럼 우리 영지를 뭘로 알고…….”

“정체도 모르는 외부인을 영주로 섬길 뻔한 거 아니야?”

그러나 찰나의 망설임은 걷잡을 수 없는 혼란을 만들어 냈다. 아셰의 생각은 자연스럽게, 다음 곳은 어디로 가야 하나, 어쩔 수 없이 아메탄에 돌아가야 하나, 이런 쪽으로 옮겨 가기 시작했다. 그 때 아셰의 옆에서 켄이 벌떡 일어섰다.

“……애 아버지는 납니다.”

아셰는 깜짝 놀라 그를 바라보았다. 광장이 다시 물을 끼얹은 듯이 고요해졌다.

“술에 많이 취한 밤, 아버님께는 죄송하지만 제가 제 욕망을 어쩌지 못하고 저지른 일이며.”

켄의 맑은 목소리에, 그녀의 눈에 눈물이 차올랐다. 멧돼지가 타닥타닥 타는 소리를 제외하고는 정적이 감돌았다. 아셰는 현실감이 없어 그의 옆모습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이 멍청이가…… 그냥 나만 떠나면 되는 일인데, 이 멍청이가 어째서…….

“아이가 생기자 이런 일이 발생할까 두려워, 아버님과 제가 애를 없애는 시약을 억지로 먹였습니다. 그게 다입니다.”

아셰의 눈에서 자신도 모르게 방울방울 눈물이 떨어졌다. 그녀가 켄을 보며 속삭였다.

“하지 마, 왜 그래……. 그러지 마…….”

지금 그가 하는 말은 평생 그에게 불명예로 남을 것이다. 아셰는 그의 팔을 잡았다.

“제발…… 켄, 하지 마……. 안 돼…….”

켄은 그녀를 바라보고 살짝 웃은 뒤, 다시 울림이 좋은 목소리로 말했다.

“캐넌 영지를 대표하고 있는 영주로서 불미스러운 일을 발생시킨 데에 영주민 여러분께 죄송하게 생각합니다. 하룻밤 실수이지만, 감히 양어머니를 범하고 그 아이를 지운 죄에 대하여 책임지고 영주 자리를 내려놓으라고 하면 내려놓겠습니다.”

광장에 침묵이 내려앉았다. 켄이 아셰를 오랫동안 좋아했지만, 아셰가 그를 받아들이지 않고 있다는 것은 영지의 모든 사람들이 아는 일이었다. 아셰는 차마 아니라고 말하지도 못하는 자신에게 혐오감이 들어 몸을 떨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 끔찍한 정적을 깬 건 화리트였다.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마시죠, 영주님. 그 자리에 영주님 말고 누가 앉겠습니까?”

“그건 맞습니다. 원래 통치자의 허리띠 아래는 신경 쓰는 게 아니라고 했습니다. 누가 영주민들이 전염병에 걸렸다고 제일 먼저 뛰쳐나와 멧돼지를 잡으러 가겠습니까? 멧돼지 사냥이 얼마나 위험한데 저 비실비실한 애들을 데리고.”

“영주님처럼 이 영지에 헌신할 사람은 없습니다. 영주 자리는 그대로 꿰차고 있으세요.”

아셰는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영지 사람들은 매일같이 마을의 대소사를 살피고 봉사하는 켄을 사랑했고, 그에게 책임을 요구할 리가 없었다. 리트와는 자신이 실수했다는 것을 깨닫고 구석에서 머리를 싸매며 자책하고 있는 중이었다.

“근데 애는 왜 지웁니까? 그건 잘못하셨어요! 저흰 마님과 영주님의 아이라면 후계자로 받아들일 수 있었을 겁니다!”

헤라가 눈물을 훔치며 소리쳤다.

“그러니 작은 마님이 영주님 마음을 받아 줄 리 없지요!”

또다시 광장이 왁자지껄해졌다. 아셰는 난감함에 치맛자락을 꼭 쥐었다. 앞에서야 사람들이 군중심리 때문에 켄을 감싸고 있지만, 오늘 아침만 지나면 양어머니를 범한 패륜아라며 입에 오르내리게 될 것이다. 추문이 너무 심해지면 영지의 권위가 떨어져 군주에게서 징계가 내려올 수도 있었다.

켄은 부드러운 초록색 눈으로 머쓱한 듯 군중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아셰는 그 큰 키의 청년을 바라보며 마음에 무거운 짐을 얹었다. 어쩌자고, 켄. 대체 어쩌자고 이 자리에서 나를 감싸는 거야…… 대체 어쩌자고. 그녀가 흔들리는 눈으로 하염없이 그를 바라보았다.

“에잇, 속이 다 시원합니다!”

화리트가 술을 병째로 마시며 소리쳤다.

“제가 늘 그랬잖아요! 매일 안타까운 눈으로 뒷모습만 좇지 말고, 차라리 시원하게 자빠트리라고! 3년입니다, 3년! 아무 일도 없는데 자꾸 사람들이 수군대는 게 갑갑해 미칠 것 같았는데, 아주 쑥맥은 아니셨군요. 이제야 다 키운 느낌입니다.”

광장에 웃음소리가 깔깔거리며 울려 퍼졌다.

“영주님.”

에소트가 웃음소리 가운데에서 일어섰다. 그의 목소리가 진중했다.

“작은 마님과 선대 영주님이 피치 못해 결혼한 것도, 진정한 부부가 아니었다는 것도 우리 모두 압니다. 남들이 패륜이라고 비웃을지라도 저희는 영주님도 작은 마님도 좋은 사람이라는 걸 알아요. 저희가 원하는 것은 영주님의 행복입니다. 수도에 보관되는 그깟 종이 쪼가리가 뭡니까? 양자 허가증이 나오지 않은 상태에서도 저희는 5년간 영주님을 소영주님으로 모셨습니다.”

광장은 다시 조용해졌다.

[다음 편에 계속....]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