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7화 (216/256)

  

57화.

아셰가 사람들 사이에서 토끼발톱꽃을 나누어 주다가 펄쩍 뛰며 대답했다.

“큰일 날 소리 하지 마세요! 저는 의원이 아니에요. 그저 예전에 배웠던 것이 생각났을 뿐이에요. 워낙에 특이한 병이라 교재에 자주 나와서…….”

“그 예전에 배웠던 걸 왜 리트와는 몰랐냐, 이거죠!”

또 한 번 사람들이 와아 웃었다. 아셰는 진땀을 빼며 사람들을 말렸다. 아메탄 왕궁에서는 모두 진심을 숨기고 갈등을 만들더라도 우아하게 포장했는데, 이곳 사람들은 순진하고 유쾌해서 진심을 모두 내보이고 왁자지껄 떠들기 마련이었다. 리트와의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오른 것이 느껴졌다. 이 영지의 유일한 의원으로서의 권위가 떨어져 비웃음을 당하는 것을 보고 있자니 그의 심정이 상상되어 아셰는 한숨을 쉬었다.

“저도, 리트와 씨가 처방을 여러 가지로 해서 증상이 다양하다는 말을 듣고 포도열인 것을 안 거예요. 리트와 씨가 이런저런 처방을 하지 않았더라면 저도…….”

“와하하하하, 리트와, 돌팔이라 마구잡이로 처방한 게 도움이 되었단다!”

“그래, 고장 난 시계도 하루 두 번은 맞지!”

아셰는 자신의 생각을 조금 고쳐야 했다. 캐넌 영지의 사람들은 호탕하고 유쾌하며 예의가 없었다. 당연히 악의는 없고, 자신들은 재밌다고 생각하여 하는 말들이지만 직업을 가진 사람에게 그 직업에 대한 권위를 의심하는 것은 커다란 상처가 된다. 그녀가 다시 허리에 손을 얹고 뭐라고 말하려는데, 와글와글한 사람들을 헤치고 무언가 커다란 것이 의원 안으로 들어왔다.

“뭐, 뭐야?”

“영주님?”

“세상에!”

켄과 마을 청년 셋이 거대한 멧돼지를 잡아와 의원 바닥에 쿵, 하고 내려놓았다. 켄이 주위를 둘러보며 영문을 모르겠다는 눈으로 자신 없게 말했다.

“에토 공국에서…… 멧돼지의 털을 고아 먹으면 된다던……데, 어라? 다 나으셨네요?”

그의 눈이 흰 꽃을 한 아름 들고 있던 아셰를 바라보며 순식간에 커졌다.

“너, 넌 어떻게 나온 거야?”

“괜한 수고를 했어.”

아셰는 팔짱을 끼고 씩 웃었다.

“그냥 산 입구에 천지로 널려 있는 꽃잎만 씹으면 가라앉는 가벼운 피부병인데. 그래서 내가 뭐랬어? 날 내보내 달라고 했잖아.”

“하이고, 우리 영주님께서는 마님 아프실까 봐 또 가둬 두시기까지 했나 보네.”

눈치가 빠른 스미스가 키득거리며 웃었다. 사람들 사이에 또 유쾌하고 악의 없는 웃음이 퍼져 나갔다. 멧돼지의 배에는 커다란 창이 꽂혀 있었고, 목덜미에는 도끼가, 눈에는 화살이 박혀 있었다.

“이렇게 큰 멧돼지는 또 오랜만이네…….”

“영주님이 거의 다 하셨죠, 뭐. 눈에 화살을 명중시키니 바로 굴러떨어졌고, 그대로 창을 꽂아 내시더라고요. 저희는 뭐, 곁에서 찔끔찔끔 도왔습니다. 너무 무거워서 함께 들고 온 게 저희의 가장 큰일이었던 것 같은데요.”

“여, 영주님.”

리트와가 벌떡 일어나 조심스럽게 말했다.

“의원에 이렇게 야생 동물의 피가 흐르면…… 비위생적이고 감염의 위험이 있습니다. 일단 치워 주시지요.”

“돌팔이! 그 말은 맞아? 야생 동물의 피는 약으로도 쓴다고!”

리트와의 말에 에소트가 킬킬대며 소리쳤고, 또다시 의원 안이 왁자지껄해졌다. 켄은 난감한 표정을 지으며 미간을 찌푸렸다.

“아…… 그럼 얘는 어떡하지요? 괜히 죽였군요.”

“뭘 어떡합니까? 얼른 저희 집으로 가죠. 깔끔하게 가죽을 벗기고, 푸줏간으로 보냅시다.”

에소트가 언제 아팠냐는 듯이, 팔을 걷어붙이며 말했다.

“오랜만에 마을 잔치나 엽시다!”

사람들이 또 크게 소리치며 웃었다. 아셰는 어색하게 따라 웃으며 그들을 바라봤다. 어쨌든 하나의 해프닝으로 유쾌하게 끝났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날 밤, 후드를 뒤집어쓴 젊은 남자가 친척을 만나기 위해 왔다며 캐넌 영지의 가장 큰 술집으로 갔으나 아무도 없는 데다가 주인인 것처럼 보이는 통통한 여자도 장사를 할 생각이 없는 것 같았다. 항구도 비어 있어서 허가도 받지 못했지만 아무도 그를 막지 않았다. 그녀는 술잔을 가득 들고 어디론가 가면서, 당황한 것 같은 외지인에게 상냥하게 말했다.

“오늘 영주님이 멧돼지를 잡아, 마을 축제가 열렸어요. 가서 공짜로 술과 고기를 드시지요. 저어기 공터로 가면 됩니다. 허가요? 아…… 근데 영주님이 바쁘실 텐데. 그냥 오세요, 그냥.”

검붉은 머리의 외지인은 고개를 끄덕이고 그녀를 따라나섰다. 이런 촌구석에 혼자서 변변찮은 무기도 없이 온 젊은 남자를 경계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게다가 오늘은 뭔가 영지 자체가 몹시 어수선했고, 사람들이 모두 들떠 있었다. 그는 아기자기하게 꾸며 놓은 마을 광장에 사람들이 왁자지껄 모여 술을 마시고 멧돼지 고기를 뜯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광장의 중앙에는 멧돼지가 불에 지글지글 구워지고 있었다. 그는 이미 얼큰하게 취한 사람들 사이로 다리 고기 하나를 받아 자리를 잡고 앉았다.

그의 시선이 광장의 높은 자리에 앉아 깔깔거리고 있는 금발 머리의 젊은 여자에게 향했다. 술을 꽤 마셨는지 볼이 꽤 달아올랐고, 3년이라는 시간이 무색하게 여전히 생기가 돌았으며 리스의 전통 의상인 허리에 두꺼운 벨벳 천을 댄 흰 원피스를 입고 있었다. 높게 하나로 묶은 머리 밑으로 구불구불한 잔머리가 목선을 타고 흘렀다.

“내가 뭐랬어?”

아셰는 광장에 마련된 상석에서, 옆에 앉아 있는 켄의 팔을 주먹으로 치며 씩 웃었다.

“환자만 보여 주면, 내가 알아서 할 거라고 했잖아! 이 독재자야!”

“아니, 멧돼지 털이 효험이 없으면 그 때 도움을 청하려고 했지. 방법이 있는데 왜 네게 물어보겠어?”

“웃기지 마. 멧돼지 털을 약으로 먹는다는 얘기는 듣도 보도 못했어! 아마 그 멧돼지 털에 토끼발톱꽃이 묻어 있었나 보지.”

“어쨌든 덕분에 오랜만에 포식하잖아. 우리가 멧돼지를 안 잡아 왔으면 넌 식어 빠진 양고기나 먹었을 거라고.”

켄과 아셰는 아옹다옹하면서도 어쨌든 영지의 위험을 사소하게 넘어갔다는 데에 동지 의식이 생겨서 술잔을 부딪치며 유쾌하게 떠드는 중이었다. 켄은 멧돼지 고기를 입에 넣으며 조용히 말했다.

“내일부터…….”

아셰는 그를 빤히 바라보았다.

“음…… 혼처를 알아볼까 해.”

“저, 정말?”

“어제 그렇게까지 네가 얘기했는데, 더는 널 불편하게 만들 수는 없지. 넌 캐넌의 선물이고, 축복이야. 네가 캐넌을 떠날 생각을 했다면 내가 무조건 잘못이야. 캐넌의 영주로서 나는 네가 캐넌에 마음 편히 묵을 수 있다면…… 무엇이든 할 거야.”

“……고마워.”

그녀가 안도의 웃음을 지으며 그의 손을 살짝 잡았다.

“나는, 굳이 성에 살지 않아도 되니 작은 집을 지어 줘. 새로운 마님이 불편할 거야.”

“그건 나중에 생각하고. 일단 오늘은 즐겁게 먹고 마시자.”

켄은 거짓말을 할 사람이 아니었다. 그는 단순하고 정의로운 사람이었고, 아셰가 불편하다고 하니 자신이 마음을 바꿔 먹은 것, 그것이 다였다. 더 깊이 생각할 필요가 없는 사람이기 때문에 아셰는 그가 편했다. 이 사람은 정말로 그녀가 캐넌에서 마음 편하게 지낼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한다고 생각하니 고마움이 알싸하게 온몸에 퍼졌다.

“네가 갈 곳이 없다고 했을 때…….”

그가 술잔을 바라보며 말했다.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성에 혼자 남았던 열두 살의 내가 생각나더라고. 나도 그 마음을 알아. 세상 천지에 갈 곳이 없었어. 그때 영주님이 성에 남아서 자신을 도와 달라고 했지. 그때의 그 안도감을 잊지 못해.”

그의 녹색 눈이 다시 아셰를 바라보며 웃었다.

“3년 동안 널 기다렸으면 됐어. 나는 이제 캐넌의 영주로, 세상 천지에 갈 곳이 없다는 너를 어떻게든 보호할 거야. 캐넌이 그 끔찍했던 겨울을 넘긴 건 네 덕분이니까. 게다가 넌…… 내 여동생이야. 아버님이 남겨 준 나의 가족이지.”

그의 말끝에 스스로를 다잡는 듯한 아쉬움이 담겼다. ‘여동생’이라는 말은 그가 자기 자신을 설득하기 위한 단어로 느껴졌지만, 그녀는 마음 깊숙한 곳에서 감사함을 느꼈다.

“……고마워, 켄. 정말 고마워.”

아셰는 그의 눈을 마주 보며 활짝 웃었다. 그녀가 술잔을 들고 명랑하게 말했다.

“물론 앞으로, 여동생을 너무 과보호하지 않았으면 더 좋겠어. 그 허접한 애들을 데리고 멧돼지 사냥에 나갔다가 다치기라도 했으면 어쩔 뻔했어?”

“사실, 조금 다쳤어.”

아셰의 눈이 커졌다.

“근데 리트와 씨가 세상 끝난 표정을 하고 있어서, 말을 못했을 뿐이야.”

“그럼 나한테라도 보여 줬어야지! 어딘데?”

“오른쪽 다리를 좀 받쳤어. 아까는 괜찮을 줄 알았는데 점점 더 아프네.”

“어쩐지, 아까 좀 걷는 게 이상하더라니. 멧돼지를 옮기고 있어서 그런 줄 알았지. 일찍 들어가서 성에서 쉬자.”

그녀의 얼굴에 걱정이 가득 덮였다. 켄은 그녀의 머리를 한 번 꾹 누르고, 괜찮다는 듯이 웃어 보였다.

좋은 밤이었다. 아셰는 밤하늘에 가득한 별을 보며 행복하게 웃었다. 영지 사람들은 유쾌하고, 멧돼지 고기는 맛있었고, 피는 섞이지 않았어도 다니엘과 다르게 전적으로 믿을 수 있는 가족도 곁에 있었다. 3년간 숙제로 남아 있던 마음도 해결이 됐고, 걱정했던 일은 생각보다 쉽게 마무리되었다. 광장에 사람들이 삼삼오오 모여 왁자지껄 떠들고 있는 것을 보면서 그녀는 마음이 따뜻해지는 것을 느꼈다.

켄의 말이 맞았다. 시간은 모든 것을 희미하게 만든다. 가끔 이런 즐거운 밤에는, 그래, 에곤의 말대로 모든 것을 잊고 이곳에 정착하면 어떨까 하는 마음이 들었다. 

착하고 시끄러우며 유쾌하고 악의가 없는 사람들과 편안한 성의 가족들. 화려하고 편리한 마법 아이템은 없어도 공기가 좋으며 바다 색깔이 예뻤다. 켄이 여자를 들이고 자식을 낳으면, 자신은 아스의 언덕에 작은 집을 지어 달라고 하면 될 것 같았다. 그냥 그대로 평안하게 살아도 될 것 같은데.

아이에 대한 복수심도, 이단에 대한 그리움도 현실의 편안함 앞에서는 자꾸만 상기해야 할 감정이 되었다. 그녀는 여덟 개의 별을 바라보며 검지의 반지를 습관적으로 매만졌다. 하지만 나는 세상에 숨 한번 못 쉬어 보고 떠난 우리 아이를 잊을 수 없어……. 그녀의 인생에서 사랑은 뒷전으로 밀릴 수 있어도 복수는 아니었다.

[다음 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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