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6화 (215/256)

  

56화.

“난 에곤 숙부님의 부인이야. 이 영지의 미망인이고, 너와 똑같은 권리와 의무가 있어. 성안에 숨어 있으라고 있는 자리가 아니라고!”

“그러니 너는 끝까지 영지를 지켜야지.”

그가 차분하게 말했다.

“에토 공국에서 서신이 왔어. 멧돼지의 털을 고아 먹으니 호전이 되었다고 해서, 사람들을 모아 산으로 멧돼지를 잡으러 가려고 해. 얼마나 걸릴지 모르니 얌전히 있어.”

아셰는 혀를 찼다. 멧돼지의 털을 고아 먹는다는 건 어디서도 듣도 보도 못한 치료법이었다. 게다가 멧돼지 사냥이 위험하지 않을 리 없었다. 사람들을 얼마나 모아서 가는 건지도 알 수 없었다. 험한 산을 정처 없이 헤매야만 하는 일이었다. 그녀는 짜증을 내며 소리쳤다.

“켄!”

“그러니 너만은 끝까지 건강하게 있어야 해. 내가…… 내가 잘못되면 이 영지의 주인은 너야.”

그녀가 문에 붙어 소리쳤다.

“환자라도 한번 보게 해 주면 안 돼? 나는 수없이 많은 병을 배웠어……. 걸음마를 시작할 때부터 선생님이 붙었다고. 아메탄의 산하기관 중에는 의료국이 있어. 아마도 대륙에서 가장 의술이 발달한…….”

“물론 네가 나보다 영리하겠지.”

그는 단호했다.

“그래도 만에 하나 있을 수 있는 위험을 감수할 수는 없어. 일단 내가 해 볼 수 있는 데까지 해 보고, 정말로 안 되면 네게 도움을 청할게.”

켄은 그대로 떠났다. 아셰는 씩씩대며 침대에 앉았다. 아무리 생각해도 켄은 자신을 너무 과보호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무리 켄이 영주의 자리에 올랐고, 아셰가 그 권한에 대해서 아무런 이의를 제기하지 않는다고 해도 그녀는 에곤의 미망인이었다. 그에게 말한 대로, 캐넌에 대해서는 그녀도 어느 정도의 권리와 의무가 있었다.

그녀가 이곳에서 배운 것이 있다면, 남들의 위에서 권위를 가진 자는 그만큼 책임을 져야 한다는 것이었다. 왕과 국민들은 상당히 멀었지만, 영주와 영주민들은 꽤 가까웠다. 영주민들이 굶어 죽을 위기에 처하자 다 늙은 몸을 이끌고 조카를 찾았던 에곤처럼, 학교의 울타리 하나도 직접 고쳐 주는 켄처럼, 그녀 역시 성에서 사는 임무를 다하고 싶었다.

게다가 아셰는 굉장히 영리하고 실제로도 많은 것을 배웠다. 사실 그녀는 리트와와 이런저런 얘기를 해 보았지만, 자신이 더 의학적인 지식이 풍부하다는 생각을 했다. 게다가 그녀는 아주 어린 시절부터 비상을 개발할 정도로 약초학을 상당히 잘했다. 약초학과 의학은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로, 아무리 생각해도 자신이 환자를 보면 어이없게도 쉬운 전염병일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켄은 멧돼지 사냥을 간다고 했다. 다르게 말하면, 앞으로 반나절은 그녀를 가둘 수 있는 큰 키의 청년이 없다는 뜻이었다. 물론 밖에서 그가 문을 잠그고 갔지만, 그 정도는 별로 커다란 장애물도 아니었다. 그녀는 정오를 알리는 종이 치자마자, 거세게 방문을 두드렸다.

“에타! 에타!”

에타는 주방에서 일하는 주방장이었다. 분명히 켄이 없으면 에타가 점심을 가지고 올 것이 뻔했다. 그녀의 예상은 그대로 들어맞아서, 에타는 뒤뚱거리며 문을 열었다.

“아니, 마님. 왜 이렇게 급하게 부르신대요?”

“배가 고파서. 점심은 가져왔어?”

“그럼요. 여기, 빵과 양고기예요.”

이미 켄에게 언지를 받은 에타가 방문을 막고 조심스럽게 점심식사를 내밀었다. 아셰는 냄새를 킁킁거리고 맡더니 짜증을 냈다.

“나, 양고기 안 좋아해. 우유나 한 컵 가져다줘.”

“아니, 지난번에는 맛있게 잘 드셔 놓고.”

“그럼 양고기인 줄 몰랐겠지. 어쨌든 우유 좀 가져다줘.”

그녀는 접시에서 빵만을 집어 물어뜯으며 천연덕스럽게 말했다. 에타는 한숨을 쉬며 한 손으로는 접시를 들고, 다른 한 손으로는 열쇠를 꺼내기 위해 주머니를 뒤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몸으로는 문을 받치고, 접시를 든 채로 열쇠를 꺼내는 것은 어려운 일이었다. 에타가 결국 접시를 바닥에 내려놓기 위해 몸을 구부렸을 때, 아셰는 재빠르게 문 뒤에 준비해 둔 의자에 올라타 에타의 등을 밟고 복도를 달려갔다.

“미안해, 에타!”

에타는 기겁을 하며 소리를 질렀지만, 그녀는 어차피 뚱뚱한 주방장이 자신을 좇지 못할 것을 알고 있었다.

“사실 에타의 양고기, 정말 맛있어! 저녁때 먹을 테니 남겨 놔!”

그녀가 제일 먼저 향한 곳은 성안에 있는 화리트 형제의 방이었다. 그녀는 일단 무명천으로 호흡기를 가리고, 침대에서 나란히 누워 있는 그들에게 조심스럽게 다가갔다.

“화리트 씨, 괜찮으세요?”

“아이고, 작은 마님…… 여기 어쩐 일이세요?”

“잠시 증상을 보려고 왔지요. 몸이 어떠세요? 켄은 제게 아무 말도 해 주지 않아서요.”

“얼른 방에 들어가십시오. 전염될 수도 있어요. 영주님이 아시면 경을 칠 겁니다.”

그녀를 데리고 아메탄 왕국에 간 적이 있는 형 화리트는 재빠르게 말했지만, 동생 화리트는 끙끙대며 자신의 증상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일단 목에 반점이 생긴 게 처음이었습니다. 그러면서 온몸에 반점이 번지고 미친 듯이 가려워요. 열이 끓어오르고, 온몸이 쑤십니다.”

“어…… 반점을 좀 볼까요?”

그녀는 조심스럽게 동생 화리트의 팔에 돋아 오른 붉은 반점을 보고 두 눈을 깜빡였다.

“리트와 씨는 뭐라고 하세요?”

“그 돌팔이…… 무슨 푸른 약초를 달인 물을 줬는데 그걸 먹으니 제가 각혈을 했지 뭡니까. 알고 보니 스미스에게는 붉은 약초를 씹게 했는데, 그 덕분에 입이 돌아갔답니다. 맨 처음 정체를 알 수 없는 시약을 먹인 카토에게는 환청이 들린다고 하더군요.”

“……아.”

아셰는 눈을 깜빡이며 중얼거렸다.

“내가 이럴 줄 알았어. 켄, 이 바보 멍청이. 쉽게 해결될 일을 이렇게 돌아가다니.”

형 화리트가 가는 눈을 뜨고 그녀를 바라보았다.

“작은 마님?”

“이건 포도열이에요. 옛날에 대학에서 배운 기억이 나네요. 리스에서는 뭐라고 부르는지 모르지만, 마치 포도알 같은 반점이 온몸을 덮는다고 해서 아메탄에서는 포도열이라고 이름 붙였어요. 이렇게까지 여러 가지 시약에 다양한 반응이 나오는 걸 보면 틀림없어요. 포도열은 정확한 시약을 먹지 않으면 부작용이 바로바로 나타나거든요.”

그녀는 팔짱을 끼고 밝게 웃었다.

“타액으로 옮는다는 리트와 씨의 말은 맞아요. 저는 정말 캐넌을 좋아하지만, 제 생각에도 술잔을 돌려 먹는 건 조금 비위생적이긴 했어요. 식기를 같이 쓰는 가족들이 옮는 것도 당연하지요. 죽는 병은 아니니까 걱정 마세요.”

“그, 그럼 어떻게 하면 낫지요?”

두 화리트가 눈을 빛내며 그녀를 바라보았다. 다른 사람들은 몰라도, 같은 성에 사는 그들은 아셰가 상당히 똑똑하고 아는 것이 많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 누구보다도 셈이 빠른 데다가 작은 도서관에 있는 책들은 이미 열 살 무렵에 다 읽었다며 한숨을 쉬던 여자였다.

“잠시만 기다리세요. 단순한 피부과 질환이니, 몇 개의 약초만 배합하면 금방 나을 거예요.”

붉은 반점이 옅어지고, 열이 모두 떨어진 화리트 형제가 마을에 나타날 때까지, 마을은 혼돈의 도가니였다. 리트와에게 약을 받아먹은 사람들마다 각자 다른 통증을 호소했고, 리트와는 효과가 없자 다른 약을 처방하고, 그러면 또 다른 증상이 나타나는 악순환이 반복되고 있었다. 화리트 형제가 발 디딜 틈 없는 리트와의 의원에 들어왔을 때, 리트와마저도 희망의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그, 그래. 차도가 있었어?”

“이 돌팔이 자식이!”

형 화리트는 다소 다혈질에다가, 아셰에게 강한 충성심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 문제였다. 그는 리트와의 멱살을 그대로 잡고 소리쳤다.

“작은 마님은 내 반점을 한 번 슥, 보더니 포도열이라고 하더군! 마님이 급히 만드신 시약을 먹으니 바로 열이 내리고 반점이 옅어졌어. 아니, 세상에 마님보다도 의료 지식이 없는 사람이 의원이라고?”

의원에 바글바글하던 사람들이 제각각 욕설을 퍼붓는 바람에 의원은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되었다. 동생 화리트는 일단 옆에 있는 사람들에게 시약병을 나눠 주며 말했다.

“마님은 약초를 캐러 산으로 가셨어. 일단 성에 있는 약초로는 시약이 이만큼밖에 안 나온다며, 일단 우리를 시켜 의원에 이거라도 전달하라고 하셨지.”

“아, 작은 마님께 축복을…….”

마침 운이 좋게 화리트의 곁에 누워 있던 스미스가 돌아간 입으로 중얼거렸다. 시약을 받아 마신 그가 원망의 눈으로 리트와를 바라보았다.

“뭐야, 성에 있는 약초로도 충분히 나을 수 있던 병을!”

“포도열? 그 병이 뭔지 알기나 해?”

리트와는 마른침을 꿀꺽 삼키고, 허리에 손을 짚으며 소리쳤다.

“아, 알지, 그럼! 안다고! 포도를 먹으면 나는 열 아냐!”

“헹!”

화리트가 벽에 몸을 기대며 비웃었다.

“반점이 포도알처럼 퍼진다고 해서 포도열이라는군.”

시약을 받아먹은 몇 명이 와아 하고 웃었다. 스미스의 돌아간 입이 천천히 제자리로 돌아오는 것을 지켜보던 다른 사람들도 탄성을 질렀다. 리트와가 비틀거리며 주저앉는데, 의원의 문이 벌컥 열리고 아셰가 뛰어 들어왔다.

“산에 가니 토끼발톱꽃이 천지에 피어 있더라고요! 시약을 먹을 필요도 없이, 이 꽃을 씹으면 금방 가라앉을 거예요. 워낙에 단순하고 간단한 병이니까요.”

의원에 바글대던 사람들이 푸하하, 하고 크게 웃었다. 아셰는 영문을 몰라 눈을 깜빡였다. 화리트는 누구보다도 크게 웃으며 빈정거렸다.

“단순하고 간단한 병이랍니다, 의원 나리!”

“하긴, 지난번에 리트와가 붙인 내 발목뼈는 비가 올 때마다 시큰거린다고.”

“내 화상 흉터는 아직도 안 없어졌어!”

아셰는 참담한 표정의 리트와를 보고, 자신이 실수했음을 알았다. 그녀가 입술을 깨무는 동안, 동생 화리트가 그녀가 안고 들어온 토끼발톱꽃을 하나씩 환자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그 사이에 소문을 듣고 집에서 앓던 사람들이 계속해서 들어와 의원은 금세 문 밖까지 사람들이 모였다.

한 시간도 되지 않아 사람들의 반점은 가라앉아 갔다. 왁자지껄 떠들기 좋아하는 캐넌 영지의 사람들은 의원에 그대로 앉아 수다를 떨기 시작했다.

“젠장, 그냥 두드러기 같은 거였잖아.”

“하긴 심각한 병이면 에토 공국에서 벌써 소문이 돌았겠지.”

“리트와, 공부 좀 더 해야 하는 것 아냐?”

“됐어. 난 아프면 이제 작은 마님께 갈 거야.”

[다음 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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