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5화 (214/256)

  

55화.

“리트와는 그게 다 술잔을 돌리는 문화 때문이라고 말하고 있어요……. 정말로, 마을 사람들에게 이 전염병이 돌면 어떡해요?”

“……그건 안 될 말이지.”

그는 황급히 옷을 챙겨 입으며 말했다.

“카토 씨에게 가자. 일단은 내가 봐야겠어.”

에곤이었다면, 영지 내에서 일어나는 심각한 일에 대해서는 무조건 최선을 다해 살피도록 노력했을 것이다. 인생을 평온하고 명예롭게 정리하고 싶을 마지막에, 40살 가까이 어린 신부를 데려왔다는 손가락질을 감수하면서까지 영지의 굶주림을 해결하려고 했으니까.

“에토 공국에서 온 뒤로 그랬다고 했지? 에토 공국에 서신을 좀 날려 봐야겠군.”

* * *

“정말로 떠나실 겁니까?”

사브르는 사단장인 리한의 막사에서 한숨을 쉬며 말했다. 리한은 푸른색의 머리를 쓸어 올리며 단호하게 말했다.

“애초부터 총독과의 약속은 폴라리아 점령까지였어. 이단 총독도 딱히 잡지 않더군.”

“……그건, 약속이었으니까요.”

리한이 짐을 정리하는 것을 바라보며 사브르가 한숨을 쉬었다.

“저는 아카날 총통님의 곁에도 있었고, 이단 총독님 곁에도 있었습니다. 두 분은 확실히 달라요. 그런데도 떠나실 겁니까?”

“사브르, 내가 충고 하나 하지.”

그는 짐을 정리하다가 사브르의 앞에 앉아 긴 다리를 꼬고 씩 웃었다. 리한은 ‘대륙을 홀린 남자’라는 별명답게 사브르가 봐도 너무나 아름다운 사람이었다. 그는 아카날의 비밀 사병 출신으로, 아이돌 그룹을 결성하여 대중의 인기를 끌고 그 인기를 이용해 ‘나의 공화주의’라는 책을 퍼트렸다. 스타람에 공화정을 세우고 아카날을 총통으로 올린 데에는 그의 역할이 가장 컸다.

그러나 그는 아카날의 장기 집권 계획을 누구보다 빠르게 눈치채고 그대로 아메탄 왕국으로 망명해 버리고 말았다. 아카날은 자신의 임기를 10년 더 늘린 것도 모자라 자신의 아들을 정치의 요직에 앉혀 스타람을 이끌 진정한 후계자는 그뿐이라며 홍보하고 있었다.

“나의 공화정은 실패했어. 그저 독재정의 말장난이 되었을 뿐이야. 인간들이 있는 곳은 모두 똑같아. 권력이 있는 곳은 모두 더럽고, 괴물들 속에서 나조차 괴물이 되어 가지. 나는 이제 전쟁도 싫고, 답도 없는 이념 싸움도 싫고, 인간에 대한 환멸로 지긋지긋해.”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혁명군들은 정의를 위해…….”

“정의? 이단 총독이 마법 한번 쓰면 그를 신처럼 받드는 혁명군이 대체 황제를 따르는 제국군과 다를 게 뭔가. 그 마력을 제어하는 혈통 때문에 이 사달이 났는데, 결국 똑같은 힘에 환호하는 꼴이라니.”

“그 마법이 없었으면 전쟁은 훨씬 더 어려웠습니다. 인정하시지 않습니까.”

“쉽게 살려면 황제의 밑에서 숨죽이고 사는 편이 훨씬 쉬웠을걸. 인간은 결국엔 자신보다 우월한 힘을 좇고, 평등보다는 복종을 원하나 봐. 스타람에서 사람들이 열광했던 건 공화정이 아니라 잘생긴 가수들이었어. 난 그걸 너무 뒤늦게 깨달았지. 아카날이 괜히 우리를 키운 게 아냐. 공화주의를 이해해서 지지한 게 아니라, 그냥 내가 좋아서 지지했다고.”

“……스타람 섬에 실망을 하신 건 이해할 수 있지만, 이곳은 다릅니다. 이단 총독은 5년 뒤에 물러나겠다는 의지가 강합니다. 마력도 없애겠다고 호언장담했고요.”

리한은 피식 웃었다.

“내가 잘생겨서 지지한 사람들과, 마법을 보고 감탄하며 지지한 사람들이 뭐가 다를까. 난 대중에게 환멸이 든 것이지 지도자에게 실망한 것이 아니야. 총독에게 충성을 다하겠다면 네 맘대로 해. 나는 떠날 테니까.”

“……그 여자 때문이지요?”

사브르의 말에 리한의 여유 있던 표정이 그대로 굳었다. 그는 다시 일어나 짐을 정리하며 돌아섰다.

“난 이미 말했어. 전쟁이라면 지긋지긋하다고. 이만큼 싸워 줬으면 됐어. 목숨 걸고 폴라리아를 안겨 줬으니, 이제 못 이기면 바보지. 길어 봤자 1년이야.”

“3년도 더 지났습니다. 유진 유니트, 그 여자가 기다리고 있을 거라고 생각하세요?”

“나라면 30년도 더 기다릴 수 있어.”

사브르가 벌떡 일어나 눈을 번득였다.

“대체 여자 하나 때문에 이 혁명군을 다 버리고 떠난다는 게 말이 됩니까?”

“네 결정적인 단점은, 사랑을 해 보지 않았다는 점이지.”

“…….”

“말이 돼…….”

리한은 나른하게 웃었다. 사브르는 가슴을 치며 어이가 없다는 듯이 한숨을 쏟아 냈다. 리한이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그동안 혁명군에 도움이 됐으면 내가 할 일은 다 끝났어. 애초부터 스타람의 실패 이후, 나는 대륙의 일에 개입하고 싶은 생각이 없었다니까. 수많은 사람들이 나를 따랐고, 그 결과가 아카날의 독재야. 더 이상 내 신념으로 무언가를 망가트리고 싶지 않아.”

“아카날과 이단 총독은 다르다니까요! 저는 오랫동안 정보원 노릇을 했습니다. 제 말을 믿으세요. 이단 총독님은 약속하면 무조건 지킵니다. 그러니 당신을 보내 주는 것 아닙니까. 심지어 아메탄으로……. 이런 결정을 내릴 수 있는 지도자는 굉장히 드물걸요.”

“그토록 유능한 정보원이, 내가 떠나는 이유도 이해를 못하는군. 형편없어. 그토록 사람 마음을 이해할 수 없으면 결국 큰코다칠 날이 올걸. 이해하지 못하는 정보처럼 위험한 건 없지. 정보는 유용하지만 위험해. 내 충고를 무시하지 않길 바라.”

사브르는 그의 충고가 귀에 들어오지 않는 듯, 답답한 표정으로 아무렇게나 테이블에 걸터앉았다. 안 그래도 리한에게 오기 전, 이단은 그에게 또 한 번 폭탄선언을 했다.

“리한이 떠나면 한동안 폴라리아에서 군대를 재정비해야 해. 그동안…… 캐넌에 갔다 올까 해.”

대체 여자 하나가 무엇이기에, 리한도 이단도 이토록 미련하게 자꾸 전장을 빠져나가려 하는 걸까. 이단만 해도 이제는 좀 잊었나 했더니 결국 여유가 생기자마자 또 그곳에 갈 궁리를 하고 있었다.

그래도 그 여자는 멍청하지는 않은 듯했다. 사브르는 그녀가 이단을 만나서 사실은 당신의 아이를 임신했고, 괴한들에 의해 아이를 잃었다고 일러바칠 수도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래 봤자 이단이 할 수 있는 일은 자신에게 그 범인을 찾으라고 하는 것뿐이겠지만. 

하지만 그녀는 그런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무언가를 숨기고 있더군.”

어느 날 술에 취해 이단은 중얼거렸다.

“하지만 무언가를 숨긴다면 나의 갈 길을 방해하기 때문이라던데. 반드시 빠르게 혁명을 성공시키고 자신을 데려가라고.”

사브르는 아셰에 대해서 잘 몰랐지만, 그래도 이단이 괜히 혁명 이외의 다른 곳에 신경 쓸까 봐 자신의 유산 사실을 숨겼다고 생각했다. 아메탄에 심어 둔 첩자들의 보고에 따르면, 그녀는 아무렇지도 않게 친구를 만나기도 했고 유산에 크게 개의치 않아 보였다고 했다. 딱히 범인을 알고 싶어 하지도 않는 데다가 오히려 자유로워져서 좋다고도 했다고.

사브르는 여자를 사랑한 적도 없었고, 아이를 가져 본 적은 더더군다나 없었기에 그럴 수도 있다고 가볍게 넘겼다. 사람의 목숨이 그다지 큰 의미가 없는 시대였다. 아이를 일곱, 여덟씩 낳는 평민의 집에서는 둘셋쯤 잃고 둘셋쯤 멀리 보내는 것이 평범한 일상이었다. 품에 안아 보지도 못한 아이가 뭐가 그리 소중하겠는가.

‘캐넌에 가야겠어. 그녀를 만나야 해. 한참을 못 봤어.’

몇 시간 전, 단호하게 말하던 이단의 목소리를 떠올리며 사브르는 한숨을 쉬었다. 할 수만 있다면 그녀를 없애고 싶었다. 하지만 만일 그녀를 죽였다가는, 캐넌 영지가 날아갈 수도 있을 것 같아 참았다. 이단은 합리적이고 현명한 리더였지만, 이상하게 아셰에 관해서는 비이성적인 집착을 보였다.

그래도 지금까지 꾹꾹 눌러 참은 게 어디인가. 폴라리아의 점령으로 어쨌든 혁명군은 드디어 확실한 승기를 잡았다. 이단에게 그 정도 휴가는 줘도 될 것 같았다.

* * *

이상한 전염병이 캐넌 지역을 휩쓴 데에는 만 이틀도 걸리지 않았다. 카토와 술을 함께 마셨다는 열몇 명의 사람들 목에서 붉은 반점이 나타나기 시작했고, 곧이어 그들과 식기를 같이 쓰는 가족들과 그들의 손님에게까지 증상이 나타났다. 리트와는 쩔쩔매며 어쩔 줄 몰라 우왕좌왕할 뿐이었다. 그가 알고 있는 의료 지식으로 카토를 치료해 보았지만 역효과가 나서 그는 단단히 망신을 당한 차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지 사람들이 의지할 수 있는 사람은 리트와뿐이었다. 하지만 그가 자신 없이 처방한 시약을 먹는 사람들마다 병의 진행이 더 빨라지는 부작용을 겪었다. 그와 술자리를 함께 했다던 스미스는 시약을 먹고 입이 비뚤어졌고, 화리트는 다른 시약을 먹고 각혈했다. 카토는 계속해서 헛소리를 해 댔고 환청이 들린다며 허공을 더듬었다.

“대체 왜 나오지 말라는 건데?”

아셰는 감금 상태가 되어서, 허리에 손을 얹고 켄에게 거세게 항의했다. 이 사태를 잘 모르는 것은 아셰뿐이었다. 켄이 무작정 방문을 걸어 잠그더니, 개인 식기를 쓰고 당분간 방에서 자신이 배달하는 음식으로만 끼니를 때우라고 한 것이다.

“이유가 뭐야?”

켄은 한숨을 쉬며 말했다.

“전염병이 돌고 있어. 괜히 나왔다가 걸리면 안 돼. 화리트 형제가 둘 다 걸렸다고. 리트와 아저씨 말로는 타액이 섞이면 옮는 것 같다던데, 그것도 믿을 수가 있어야지…….”

“굳이 날 가두지 않아도 되잖아?”

“널 가두지 않으면…….”

그가 냉정하게 말했다.

“망아지처럼 뛰어다니며 환자를 보러 갈 것 아냐?”

사실은 맞는 말이었다. 그녀는 미간을 찌푸리며 소리쳤다.

“그럼 넌 왜 돌아다니니? 전염병이 널 피해 가기라도 한다니?”

“영주가 영지의 위험을 몰라서 되겠어? 성안에서 숨어 있으라고 주어지는 영주 자리가 아니야. 어떻게든 방도를 마련해야지.”

“리트와 씨는 뭐라셔? 전염병 이름은 뭔데?”

“모르는 것 같아. 이런 말 하면 좀 그렇지만…… 리트와 씨가 손대는 족족 더 상황이 다양하게 악화되고 있어.”

켄은 문밖에서 말했다.

“나도 전염됐을지 몰라. 잠복기가 얼마인지도 파악이 안 돼. 그러니 넌 그냥 안전하게 거기 있어.”

[다음 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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