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4화.
“켄, 나는…….”
“네가 나를 보지 않는 데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우리의 관계도 그중 하나겠지. 네가 어찌 되었건 내 아내가 되었다면 모든 걸 포기하고 내 곁에 언제까지나 있을 수밖에 없었을 거야. 아내 된 도리로 나와 동침을 했을 테고, 그러다 보면 네 마음속에 있는 그 남자도 희미해졌겠지.”
아셰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그가 다른 남자를 언급한 것은 처음이었다.
“하지만 넌…… 어쨌든 대외적으로는 내 아버지의 여자고……. 그보다 더 네게 쉽게 도망칠 수 있는 명분이 있을까……. 너는 그 사실 속에 숨어서 언제까지고 닿을 수도 없는 별만 쳐다보고 있지.”
“켄, 제발 이러지 마.”
아셰는 진심을 담아 말했다.
“나는 갈 곳이 없어. 이건 진짜야. 영지 사람들이 모두 네 마음을 알아. 모르는 척하고 숨는 것도 한계가 있어. 너는 지금 나를 막다른 곳으로 내몰고 있는 거야.”
그녀가 술잔을 테이블에 쾅, 하고 내려놓았다.
아셰는 냉정하게 말을 이었다.
“너를 위해서라면 내가 어디론가 가야 하는 게 맞지만, 나는…… 나는 정말로 갈 곳이 없어. 아메탄에 돌아가기는 싫어. 이 사실이 가장 고통스러운 건 나야.”
“네가 이곳을 떠날 일은 없어. 나는 너를 사랑하지만, 네가 갈 곳 없이 떠도는 건 그 이유가 나일지라도 절대 용납하지 못해.”
그가 맑은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아셰는 한숨을 쉬었다. 이 남자는 그녀에게 부담을 주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그저 마음을 숨기지 못할 만큼 순수할 뿐이었다. 온갖 대륙을 다 뒤져도 켄보다 더 좋은 남자를 찾지 못할 것이라는 에곤의 말은 사실일 것이다. 그녀는 켄과 이단을 냉정하게 비교해 보았을 때, 당연히 켄이 훨씬 더 좋은 남자임을 알고 있었다. 물론 그가 이단보다 가진 것은 훨씬 없을 수 있겠지만, 그런 건 그녀에게 별로 중요하지 않았다.
“너는…… 그럼 이 시간들을 어떻게 보내?”
그는 쏟아질 것 같은 별을 바라보며 물었다.
“그저 갈 곳이 없어 이곳에 머무는 거라면 이 모든 시간들이 지루할 텐데.”
“……기다리면서 보내.”
그녀가 술을 한입에 털어 넣고 말했다. 캐넌의 과실주는 꽤나 독해서, 한 잔으로도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오르고 심장이 뛰었다.
“누구를?”
“……그 사람을.”
그리고 그 사람의 곁에서만 가질 수 있는 복수의 기회를.
“그 사람이…… 언제 오는데?”
“전쟁의 끝에.”
“반드시 온다는 보장이 있어?”
“…….”
켄이 한숨을 쉬었다. 그가 그녀를 바라보며 말했다.
“전쟁은 언제 끝날지 몰라. 이 영지에 박혀 있는 나조차도 제국의 내란이 쉽게 끝나지 않을 거라는 건 알아. 리트와 씨는 10년도 더 걸린다는 데에 소 두 마리를 걸었어. 그리고 전쟁에서 특정한 사람이 살아 돌아올 확률이 대체 얼마나 되는데?”
아셰는 눈을 내리깔았다. 혁명이 실패하면, 그 이후의 생각은 그 때 할 셈이었다. 그녀는 이상하게 이단이 패배할 것 같지 않았고, 사랑에 눈이 멀어 판단력이 흐려졌다 할지라도 그 생각은 변함이 없었다.
“아셰, 시간은 모든 것을 지워.”
“…….”
“네가 그 남자를 영원히 사랑할 것 같고, 언제까지고 기다릴 수 있을 것 같겠지만 시간 앞에서는 속수무책이야. 시간은 파도와 같고 기억은 모래와 같아서, 결국엔 이 모든 감정이 사라질 거야.”
“난 안 그래.”
그녀가 단호하게 말했다. 사람이란 사랑과 호의, 경외와 편리함, 이런 것들은 쉽게 잊어도 원한과 복수, 증오와 슬픔은 결코 잊지 않는 법이었다. 특히 그녀는 하나를 뺏기면 하나를 돌려준다는 마음으로 여기까지 왔다. 시간은 3개월 품은 아이에 대한 기억도 희미하게 만들었지만 복수심까지 지우지는 못했다.
“……내 말을 믿어. 아셰, 나는 부모님을 모두 보냈어. 어머니가 떠났을 때 나는 따라 죽고 싶을 만큼 고통스러웠지만 지금은 사실 얼굴도 기억이 잘 안나. 네가 나를 보지 않는 이유가 전쟁에 나간 그 남자 때문이라면…… 그건 너무 하찮아.”
“내게는 하찮지 않아.”
“그 남자에게는 하찮을 수도 있어.”
그의 말에, 아셰는 입술을 깨물었다. 사실은 그녀가 억지로 모른 척하고 있던 불안함이었다. 그를 마지막으로 본 것은 3년 전이었고, 당연히 그는 그녀를 잊었을 수도 있었다. 다른 여인을 품었을 수도 있고, 혼담이 오고갈 수도 있는 일이었다. 그리고 그건 그녀의 힘으로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녀는 전쟁 앞에 무력했고, 기다리는 것 외에는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네가 아무리 기다린다 하더라도, 그 남자가…… 네게 돌아오지 않을 수도 있어.”
아셰는 한숨을 쉬었다. 이토록 진실된 남자에게 언제까지나 거짓으로 웃어넘길 수는 없는 일이었다. 진심에 맞서는 건 진심이었기에, 그녀는 차분하게 말했다.
“네 말이 맞아.”
그녀가 또박또박 말했다.
“나는 그때 어쩔 수 없이 무조건 캐넌에 와야 했던 상황이었고, 네가 상대였다면 너와 결혼했을 거야. 네 말대로 네가 내 남편이었다면 아내의 도리를 다하기 위해 너와 동침했을 거고, 그러다 보면 너는 참 좋은 남자니까 그 남자를 잊고 널 사랑했을 수도 있지. 그건 모르는 거야. 가지 않은 길이니까.”
아셰의 어깨 끝에 오는 머리가 바람에 살랑거렸다. 그녀의 눈빛은 냉정하고 서늘했다.
“하지만 이미 벌어진 일이야.”
켄의 눈에 절망이 내려앉았다. 그가 수백 번 상상했던 일들을 그녀는 ‘이미 벌어진 일’이라며 일축하고 있었다. 아셰는 천천히 일어섰다.
“너와 남녀 간의 일을 상상할 이유가 없어. 우리의 관계는 어머니와 양아들,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냐. 우리는 에곤 숙부님이 아니면 이어질 일이 없었어. 너도 이제 포기해. 나와 그 남자의 일은, 내가 고민할 일이지 네가 신경 쓸 관계는 아냐. 혼담도 좀 받아들여. 주민들이 걱정하고 있어.”
“……그건 마음대로 되지 않는 일이야.”
그가 일어나서 그녀의 앞에 섰다.
“하지만 내 마음 때문에 네가 갈 곳이 없다는 생각까지 한다면, 내 마음을 접는 것이 맞다고 생각해.”
아셰는 한숨을 쉬었다. 켄은 훤칠한 키로 그녀를 내려다보며 그녀의 머리를 쓸었다.
“아셰, 예전에…… 내가 네게 입 맞추었을 때…….”
그녀가 아이를 잃고 산송장처럼 침대에서 물 한 모금 삼키지 않았을 때를 말하는 듯했다. 벌써 3년도 더 지난 일이었다.
“정말로…… 아무 느낌도 없었어?”
“…….”
아셰는 고개를 돌리며 중얼거렸다.
“기억에 없어. 그런 걸 신경 쓸 때가 아니었거든.”
“다시 한 번…… 네게 입 맞춰도…… 너는 정말 아무 느낌도 없을까.”
“켄.”
그녀는 냉정하게 말했다.
“너는 내게 친오빠 같은 사람이야. 다니엘과 내가 입을 맞출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해?”
“말했잖아. 우리는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았어.”
그가 그녀의 고개를 돌려 자신을 바라보게 하며 부드럽게 말했다. 그녀는 그의 맑은 초록색 눈, 살짝 각진 턱과 짧은 갈색 머리카락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그녀가 한숨을 쉬며 눈을 감았다.
“그렇게 미련이 남는다면 한번 해 봐.”
“……이번에 아무런 느낌이 없다면…… 난 정말로 깔끔하게 포기할게.”
켄은 조심스럽게 허리를 숙이고 그녀의 입술에 입을 맞췄다. 그의 키가 하도 커서 그녀는 살짝 발을 들어야만 했다. 그의 쿵쿵 울리는 심장이 그대로 느껴지는데도, 그의 조심스러운 혀가 그녀의 부드러운 입 안으로 들어오는 데도 그녀는 아무런 느낌이 없었다.
‘정말로 난…….’
이단과 처음 입을 맞출 때에는, 고작 열여섯 살이었는데도 이렇지 않았다. 척추가 찌릿할 정도로 묘한 느낌이 온몸을 감싸고 심장이 두근거렸다. 그가 새까만 눈으로 자신을 바라볼 때에는 온몸이 살짝 떨리기도 했다. 그러나 켄은 그녀에게 언제나 편안하기만 한 사람이었다.
‘……난 이단을 사랑하는구나.’
3년 전, 캐넌으로 돌아오는 배 안에서 몇 번이고 그를 안을 수밖에 없었던 그녀의 달뜬 몸짓이 기억났다. 그의 입맞춤은 불과 같이 온몸에 뜨겁게 번졌고 그의 손길에 몸이 항상 먼저 반응했다. 화려하고, 격렬하고, 그만큼 짧을 수밖에 없었던 그와의 순간들. 그가 그저 몸을 섞은 남자라고 해서 사랑하는 것이 아니었다.
‘이런 걸 두고, 못 잊었다고 하는 거구나.’
켄의 말대로, 시간은 모든 것을 희미하게 만든다. 이단의 마지막 기억은 3년 전이었고 바람결에 스쳐 오는 소식들에서나 그의 이름을 들을 수 있을 뿐이었다. 그녀를 눌러 오던 그의 체중도, 검붉은 머리카락도, 가무잡잡한 피부도 희미해졌다. 하지만 그 때 그녀의 감정은 아직도 박제된 채 그대로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켄의 커다란 손이 그녀의 등을 감싸기 시작하자, 그녀는 조심스럽게 켄을 밀어냈다.
“켄.”
그녀가 쓸쓸하게 웃으며 말했다.
“……포기해.”
켄의 말이 맞았다. 이단은 자신을 잊었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녀가 사브르를 만날 수 있는 가장 확실하고 쉬운 길은 이단을 통해서였고, 그 사이 딱히 이 모든 걸 잊게 만들 만한 다른 사랑이 찾아온 것도 아니었다. 그러므로 그녀는 무력하게 기다려야만 했다.
다음 날, 켄은 아침부터 혼비백산해서 성으로 달려온 유리아를 상대해야만 했다.
“크, 큰일 났어요.”
“응?”
“아버지가, 아버지가 열이 끓어오르고 있어요. 헛것을 보며 자꾸 이상한 소리를 하고, 온몸에 붉은 반점이 가득해요!”
“유리아.”
켄은 아침식사도 하지 못한 채로 난감한 듯 말했다. 유리아라면 대장간을 운영하고 있는 카토의 큰딸이었으며 툭하면 그에게 추파를 던지는 마을 처녀 중 하나였다.
“그런 거라면, 리트와 씨에게 가야 하지 않을까?”
“어제 리트와 아저씨에게 약 처방을 받고 나서 더 심해졌는걸요! 리트와 아저씨도 쩔쩔매고 있다고요. 에토 공국에 다녀온 이후 목에 붉은 반점이 나타났다고 하는데…… 처음에 리트와 아저씨는 괜찮다고 했단 말이에요!”
“유리아, 나는 의원이 아냐. 내가 해 줄 수 있는 건 없어.”
“하지만!”
유리아가 발을 구르며 눈물을 닦았다.
“다른 마을 사람들에게도 지금 목에 붉은 반점이 나타나고 있다고요. 제 엄마와 남동생의 목에도 작고 붉은 반점이 나타나기 시작했어요.”
그 말에 켄의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다음 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