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3화 (212/256)

  

53화.

“분명 실수였을걸.”

에소트는 어깨를 으쓱했다.

“작은 마님은 그러실 분이 아냐. 분명 싸우다가 계단에서 밀었는데 발을 헛디뎌서 사망했다거나, 그런 일일 거야.”

화리트 역시 고개를 끄덕였다. 아메탄 왕국은 대륙의 건너편에 있었고, 작은 영지 캐넌에서 저 멀리 외국의 옛 소식을 자세히 알 리 없었다.

“그 고사리 같은 손으로 누굴 죽이나. 만일 작은 마님 손에 뒈졌다면 그놈이 병신이지.”

“……나도 작은 마님이 좋은 사람이라는 건 인정하지만.”

조용히 구석에서 술을 마시고 있던 리트와는 한숨을 쉬며 조용히 끼어들었다. 영지에 하나뿐인 늙은 의원과 아셰가 몹시 친하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리트와는 절대 술잔을 돌려 마시지 않았는데, 병균이 전염된다는 이유였다. 그러나 리트와가 아무리 영지 주민들에게 술잔을 돌려 마시지 말라고 설교해도, 아무도 듣는 사람이 없었다.

“저렇게 젊은 남녀가 성안에서 둘이 언제까지고 지낸다는 것이 남들의 시선에 이상하게 보인다는 건 사실이야. 에곤 영주님이 돌아가신 지 3년이야. 게다가 영주님은 자신의 마음을 숨기지 못해. 우리 영지에서 가장 어린 겐지의 딸도 영주님이 어떤 눈으로 작은 마님을 보는지 알걸. 작은 마님이 언제까지나 모르는 척하고 살 수 있겠어?”

“아, 그러니까 차라리 얼른 자빠트려야 보는 사람이 답답하지라도 않을 거란 말 아뇨!”

화리트가 가슴을 쾅쾅 치며 짜증을 냈다.

“이렇게 뒤에서 사람들은 수군댈 대로 수군대는데, 차라리 둘이 그렇고 그런 사이라면 억울하지라도 않겠소. 난 남들이 욕하든 말든 우리 영주님과 작은 마님이 행복했으면 해.”

리트와는 화리트의 말을 무시한 채로 조용히 말했다.

“게다가 후계 문제도 있어. 영주님은 혼기를 한참 넘겼지. 이대로 둘이 그 성에서 늙어 죽는 건 우리도 바라는 바가 아니잖아.”

“제기랄, 우리라고 영주님께 말씀을 안 올린 줄 알아? 후계자 얘기는 매일같이 했다고. 듣는 척도 안 해. 영주님은 절대 다른 여자를 성에 들일 생각이 없어. 사실 그건 그렇지. 그 성에 들어가는 여자에겐 그게 무슨 지옥이야?”

화리트는 한숨을 쉬며 술을 한 병 더 시켰다. 스미스가 덩달아 한숨을 쉬며 말했다.

“작은 마님도…… 영주님을 좋아하시는 건 아냐? 조금도 그런 내색이 없어?”

“속을 알 수가 없어.”

그 말에 대답을 한 건 에소트였다. 에소트의 아내인 헤라는 의상실에서 일하는 여자로, 아셰와 가장 마을에서 가깝게 지내는 사람이었다.

“헤라가 그러는데, 그런 얘기를 꺼내기만 하면 3년 내내 한결같이 ‘저와 영주님은 형제와 같은 사이예요.’라고 대답한다던데. 말은 맞지.”

“그 여자는 왕족이야.”

카토가 팔짱을 끼고 코웃음을 쳤다.

“그 고고한 여자가, 모자 관계로 얽힌 영주님을 남자로 볼 리 없어. 영주님은 희망을 버려야 돼. 그 여자를 완전히 떼어 놓기 전에 우리 영지에 안정된 후계자는 없다고.”

“흠, 그런데 카토?”

에소트는 갑자기 카토의 얼굴을 바라보며 미간을 찌푸렸다.

“목에 붉은 반점이 올랐는데? 이거 뭐야?”

“엥? 그게 아직도 있나? 에토 공국에서 돌아오던 며칠 전부터 좀 가렵긴 하던데…… 리트와, 좀 봐 주쇼.”

리트와는 안경을 밀어 올리며 그의 목을 한동안 바라보더니, 별거 아니라는 듯 손사래를 쳤다.

“별거 아냐. 술을 너무 많이 마셨군. 내일까지 안 없어지면 나한테 들러.”

* * *

“한참 찾았어.”

아셰는 켄의 부드러운 목소리에 뒤를 돌아보았다. 켄은 언젠가 말했던 것처럼 아스의 언덕에 나무로 된 작은 테이블과 의자를 설치해 주었다. 밤하늘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던 아셰가 가만히 웃었다. 그가 그녀의 어깨에 망토를 둘러 주었다.

“겨울이 지났어도, 밤바람이 아직 찬데.”

“괜찮아. 그래도 고마워.”

그가 술잔을 건넸다. 따뜻한 과실주가 안에서 찰랑거렸다. 이 지역에서는 겨울에 술을 따뜻하게 데워 먹는 풍습이 있었는데, 아셰는 처음엔 참 이상한 풍습이라고 생각했지만 점차 몸을 녹이는 따뜻한 술의 매력에 금세 빠지고 말았다. 향이 좋은 술을 한 모금 마신 그녀가 생긋 웃었다.

“아, 맛있다.”

“리스 사람 다 됐네.”

켄이 그녀의 머리를 한 번 쓰다듬고 맞은편에 앉았다. 아셰가 턱을 괴고 대답했다.

“절반은 리스 사람인걸. 엄마가 리스 사람이니까.”

“리스에는 너처럼 밝은 금발 머리를 가진 사람이 없어.”

“아, 이건 아메탄에도 몹시 드물어. 괜히 왕족의 상징이라고 하는 게 아니지. 아메탄에서 가장 흔한 머리 색깔은 갈색이야. 너처럼.”

그녀가 얄밉게 쏙 혀를 빼물었다. 그가 피식 웃으며 따뜻한 술을 들이켰다.

“숙부님을 저기 모신 것은 잘한 일 같아.”

아셰가 눈을 가늘게 뜨며 말했다. 에곤이 죽은 지도 벌써 3년이었다. 다시 말하면, 아셰가 캐넌에 온 지도 3년 반이 흘렀다는 소리였다. 그 사이 리젠이 한 번 캐넌에 놀러왔고, 다니엘이 산하기관인 법무국의 여자와 결혼을 했다. 에곤은 자신의 바람에 따라, 성안의 지하 묘지에 묻히지 않고 화장하여 바닷가에 묻었다. 아스의 언덕에서 내려다보면 그의 작은 비석이 보였다.

“있잖아, 나는…….”

그녀는 눈을 내리깔고 말했다.

“내게도 친척이 있을 거라고 생각해 본 적이 없어. 리스 공국은 너무 멀고, 엄마는 나를 학대하다시피 했으니까. 아메탄 왕족들은 모두 나를 무시했고, 어딘가로 시집보내 버릴 정치패 하나로 생각했지. 그런데 숙부님은 정말로 나를 가족으로 대해 줬어.”

“……좋은 분이시지.”

“내게…… 아이는 잊으라고 하시더라. 그런데 그게 정말로 나를 생각한 조언이라는 게 느껴졌어. 나는 나의 핏줄이, 온전히 나를 위해 그렇게 말해 주는 건 처음이었어. 아마 죽을 때까지 못 잊을 거야.”

그녀가 한숨을 쉬었다.

“여기서…… 그럼 숙부님의 묘비를 보고 있었던 거야?”

“응? 그냥 이것저것.”

“밤하늘을 보고 있던 것 같은데.”

“아.”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검지에 끼워진 반지를 엄지로 훑었다.

“그냥, 별을 봤지.”

“……무슨 별?”

켄은 그답지 않게 캐묻고 있었다. 아셰는 고개를 들어 손가락으로 여덟 개의 별을 가리켰다.

“저기, 여덟 개의 별…… 학자자리. 아, 제국에서는 목동자리라고 한다더라. 너희도 제국에 가까우니 목동자리라고 하겠지?”

“응? 목동자리는 저기, 서쪽에 있는 붉은 별을 낀 저거지. 저건 사슴자리야. 위의 세 개가 마치 사슴뿔 같잖아.”

아셰가 어이가 없다는 듯이 깔깔거리며 웃었다.

“저게 어떻게 사슴이야?”

“학자라고 보는 것이 더 웃겨.”

“아, 리스는 목축업이 발달한 곳이라서…… 목동자리는 훨씬 더 크고 아름다운 별들로 구성했구나. 저 붉은 별은 히아스라는 행성인데, 아주 옛날부터 독특하고 아름답다고 해서 늘 국가의 가장 중요한 별자리에 등장하거든.”

그녀가 잠시 생각하더니 천천히 웃으며 말했다. 그가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그런 걸 어떻게 알아?”

“그냥 알지. 이 정도야 쉽게 추론할 수 있는 거잖아?”

켄은 그녀가 아무렇지도 않게 이런 것들을 말할 때마다 다소 위축되는 느낌이 들었다. 그는 그 붉은 별의 이름이 히아스라는 것도 몰랐다. 그녀가 약초들을 분류하며 생전 처음 듣는 이름을 말할 때나, 아이들의 밑도 끝도 없는 질문에 성의 있게 마을 학교의 선생님보다 자세한 대답을 해 줄 때나, 그가 더듬거리고 있는 셈을 빠르게 정리할 때마다 이상한 초조함을 느꼈다. 그의 망설임을 눈치챈 아셰가 또 깔깔거리며 웃었다.

“켄, 나는 어릴 때 아메탄에서 가장 똑똑한 사람들로부터 제왕교육을 받았어. 네가 무식한 게 아니라, 내가 제국에서 손꼽힐 정도로 영리한 거야. 왕족이라는 이유만으로 아메탄에서 가장 똑똑한 평민들 사이에서 대학을 다녔다고.”

“아셰.”

그가 한숨을 쉬었다.

“넌 너무 영리한데다가…… 눈치까지 빨라서 뭘 어떻게 할 수가 없어.”

“대신 너는 내가 할 수 없는 많은 것들을 하잖아.”

그녀가 그의 잔에 자신의 술잔을 부딪치며 말했다.

“날 믿어. 내가 본 그 어떤 지도자들보다 넌 훌륭한 영주야. 난 아메니티에서 뱃살에 기름 낀 귀족들만 봐서, 영주들은 다 성에 틀어박혀서 남들이 고생해서 추수한 곡식을 빼앗고 감시나 하는 줄 알았거든.”

“난…… 그저 아버님이 했던 그대로 보고 배운 것뿐이야.”

그의 얼굴이 붉어졌다.

“내 어머니는 성에서 일하던 청소부였고, 나는 아버지의 얼굴도 이름도 몰라. 그냥 아주 어렸을 때부터 어머니의 아들로 성에서 자랐을 뿐이야. 영주님은 어머니가 일할 동안 딱히 갈 곳이 없는 나를 성에서 크게 했고, 그렇게 나는 성에서 유일한 어린아이로 자랐어.”

“그래서 가끔 화리트 씨가 그렇게 널 애 취급 하는구나?”

그녀가 킬킬거리며 웃었다. 켄은 한숨을 쉬며 말을 이었다.

“성에서 학교를 다니고…… 가끔은 영주님을 도와 산책을 나갔지. 영주님은 내가 열 살 때 당나귀를 사 주셨는데, 정말 하늘을 날아갈 것 같았어. 어머니가 마차에 치여 죽은 이후에도 나는 그냥 영주님의 은혜로 성에서 살았어. 영주님은 친아들처럼 나를 아끼셨고 마을의 일을 살필 때 나를 꼭 대동하셨지. 그때만 해도 너 말고, 마님이 계셨는데 내가 스무 살 때 돌아가셨어. 그 이후, 영주님은 내 아버님이 되었지.”

그녀는 가만히 그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그렇다면 에곤은 부인이 죽은 뒤에야 켄을 양자로 들일 결심을 한 셈이었다. 에곤이 왜 끝까지 켄에게 미안해했는지 알 것 같았다. 그는 끝끝내 자신의 혈육에게 영지를 물려줄 수도 있다는 욕심을 버리지 못했던 것이다.

“리트와 아저씨는…… 아버님에게 자식을 가질 수 없는 몸이라는 이야기를 수도 없이 많이 했지만 끝까지 듣지 않으셨어. 그치만 나는 단 한 번도 아버님을 원망해 본 적이 없어. 원래부터 내 것이 아닌 영지였고, 영주님은 처음부터 끝까지 내게 베풀기만 하셨으니까. 스물다섯까지 허가증에 직인이 찍히지 않아 장가를 가지 못해도 아무런 생각이 없었어. 진심으로 난 아버님을 존경하기만 했지, 이 영지를 가지고 싶다는 생각은 안 했거든.”

아셰는 그의 초록색 눈을 조용히 들여다보았다.

“그런데 난 네가 오고 나서 처음으로…… 난생처음으로 아버님이 미웠어.”

“…….”

“고작 몇 달, 몇 달만 더 일찍 결정해 주었더라도…….”

켄은 그녀의 손을 잡았다. 그녀가 빼려고 했지만, 그는 놓아주지 않았다.

“너는 내 여자였을 거야.”

[다음 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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