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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2화 (211/256)

  

52화.

화리트는 머리가 어지러운 것을 느끼며 비틀거리고 일어섰다. 벌써 새벽이 밝아 오고 있었다. 그는 허둥지둥 선실로 달려갔는데, 아셰가 생긋 웃으며 방향키를 잡고 있었다.

“작은 마님! 어떻게 된 일이죠? 제가 대체 어떻게…… 아니 구조 요청을 받아 배 하나와 연결한 건 생각이 나는데, 널빤지를 가지러 뒤를 돈 것이 마지막 기억……이군요. 작은 마님, 괜찮으신 것 맞죠?”

아셰가 너무나 멀쩡해 보여서 그는 멋쩍게 말을 이었다. 아셰는 고개를 끄덕이고 약간은 슬픈 표정을 지었다.

“아니, 적당히 나쁜 사람이더라고요. 배에 가득 실은 상자를 보았다며, 값나가는 것을 달라고 하지 뭐예요……. 구조 신호를 그런 식으로 쓰다니 천벌을 받을 거예요. 어차피 배가 작아 많이 싣지도 못하더라고요? 밀 두 상자와 목화솜 한 상자를 가져갔어요.”

“아…… 그 정도면 다행이군요. 어디 다치신 데는 없습니까?”

“네, 괜찮았어요. 아, 제가 대학에서 마법을 배우긴 했지만, 이 정도 오는 것이 최선이었어요. 항해로가 맞나요?”

“예. 이 정도면 정말 훌륭하십니다. 저희 영지에서는 저희 형제를 제외하고 가장 마법을 잘 쓰시겠는데요. 밤새 이렇게나 오셨으니, 반나절만 가면 이제 캐넌 영지입니다.”

“어머? 대학에서는 잘 못하는 축이었어요.”

그녀는 깔깔거리며 웃었다. 그녀의 밝은 얼굴을 보고 완전히 안도한 화리트가 그녀에게서 방향키를 넘겨받았다. 빙글 돌아서는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그의 표정이 불안하게 굳었다.

“마님, 치맛단이…… 조금 튿어졌군요.”

“아, 목화솜 상자에 끼어서 형편없이 찢어졌지 뭐예요.”

그녀가 천연덕스럽게 대답했다.

“올이 나갈까 봐 아예 제가 한 단을 잘라 버렸어요.”

아셰는 싱긋 웃고, 종종걸음으로 갑판에 나섰다. 북쪽으로 향하는 바닷바람이 거세서 그녀는 망토를 걸쳐야 했다. 그녀의 찢긴 흰색 치맛단은 이단의 손목에 둘둘 말아져 있었다. 그는 그녀를 상기할 만한 것을 달라고 했지만 아셰는 정말 가진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그녀는 어쩔 수 없이 치맛단을 찢어 그의 손목에 묶어 주며, 그래도 대륙에서 부유하다고 소문난 아메탄의 왕족이었던 그녀였는데 이토록 줄 것이 없는 처지에 한숨을 쉬어야 했다.

그는 그 짧은 시간에 세 번이나 그녀를 탐하고도 아쉬운 눈으로 돌아섰다. 두 시간은 너무나 짧았다. 그녀는 여전히 안에서부터 알싸하게 통증이 남아 얼얼한 몸을 웅크리며 갑판에 앉았다. 넓은 바다를 바라보는 그녀의 눈이 가늘어졌다.

“지금 당장 그 사람을 죽이면 내 속은 시원하겠지만…….”

그녀의 작은 중얼거림은 순식간에 파도 소리에 묻혔다. 그러나 이 목소리가 어디엔가는 닿기를 바라며.

“네 아버지를 어렵게 하고 싶지는 않았어. 그 사람에게는 아직도 가야 할 길이 있거든.”

하얗고 작은 것이 내리기 시작하여, 그녀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하지만 약속할게. 내가 반드시 그 사람을 눈앞에 두고, 내가 너를 잃어 얼마나 고통스러웠는지 모두 말한 뒤에 내 손으로 죽일 거야.”

차가운 하얀 결정들이 그녀의 손에 닿자 그대로 사라졌다.

“너는 나였고, 나는 너였어. 내 복수는 내가 할 거야.”

그녀가 보는 첫 눈이었다. 그녀는 헤일리의 카드점에서 마지막으로 골랐던 카드를 떠올리며 몸을 한 차례 떨었다.

‘THE KING. 왕?’

헤일리의 피를 머금었던 네 장의 카드.

‘고귀한 혈통과 관련된 문제가 생길 수 있으니 특별히 유의하는 것이 좋겠어요.’

그녀의 아이가 죽은 이유는, 이단의 피를 이었기 때문이다. 다른 이유는 없었다.

‘왕녀님이 어떻게 할 수 없는 거대한 권력과 핏줄을 뜻하기도 해요.’

그리고 그건 그녀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대륙의 끄트머리에 위치한 캐넌 영지에서도 지키지 못한 아이였다. 지키지 못했다고 후회하고 자책하느니, 아셰는 깔끔한 복수를 위해 끝까지 살아남는 것을 택했다. 그녀가 무표정으로 갑판 위에 하얗게 쌓이는 눈을 내려다보았다.

* * *

사실은 또다시 아이가 생기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했었다. 만일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막연한 계획을 세우기도 했다. 그러나 그녀의 몸에는 변화가 없었다. 그렇게 캐넌 영지에는 겨울이 왔고, 아셰는 켄을 도와 영지 살림을 꼼꼼하게 잘 챙기고, 긴 밤 동안 에곤의 옛 이야기를 들으며 뜨개질을 했다. 켄은 그녀가 갈색 털실로 만든 목도리를 선물해 주자 입이 귀에 걸린 채로 하루 종일 그 목도리를 하고 다녔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성의 모든 하인들이 갈색 목도리를 하고 다니는 것을 보고 한동안 의기소침해 있었다.

제국의 내전은 이단이 말했듯이 지루한 소강상태에 빠져 들었다. 하나를 얻으면 하나를 빼앗기고, 하나를 빼앗기면 하나를 얻는 나날들의 연속이었다. 겨울에 접어들며 부상자들이 하나둘 캐넌 영지에 돌아오기 시작했고, 지난하던 겨울도 다 지나 슬슬 봄이 오려고 산수유가 노란 꽃을 피우던 그 때에 에곤이 조용히 죽었다. 그는 죽기 전에 아셰와 켄에게 가까스로 한마디씩 유언을 남겼는데, 켄에게는 조금 더 빠르게 양자 허가증을 보내지 못해 미안하다는 말이었고, 아셰에게는…….

‘아셰, 지난 아이는 그만 보내 주어라.’

내색하지 않았다고 생각했는데, 그녀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네 곁에 실제로 있어 주는 사람에게 충실해.’

에곤의 장례는 소박하지만 오랫동안 치러졌다.

6. 시간과의 싸움

“허, 참.”

화리트는 담뱃잎을 씹으며 중얼거렸다.

“차라리 영주님이 작은 마님이랑 매일 그 짓거리나 하면 억울하지나 않지.”

“이 사람이 진짜…….”

“아니, 말은 맞잖아?”

화리트가 뱃사람다운 호탕함으로 술잔을 쾅, 하고 내려놓았다. 캐넌에는 술잔을 돌리는 문화가 있었는데, 술잔이 부족하여 여러 명이 술을 나눠 먹던 시절에서 유래한 전통이었다.

“그 집에서 일하는 나는 돌아 버릴 지경이라고. 진짜 하루에도 몇 번씩 목 끝까지 말이 차올라.”

“무슨 말?”

“거! 영주님! 영주님 꼬마 때부터 봐 온 제가 허락해 드리니까, 거!”

그가 그대로 과실주를 꿀꺽꿀꺽 삼키고 눈을 부릅뜨며 소리쳤다.

“함 시원하게 그냥 자빠트리소!”

술집 사람들이 화리트를 둘러싸고 깔깔대며 웃었다. 왁자지껄한 웃음소리가 한동안 시끄럽게 이어졌다. 에소트가 화리트가 먹던 술잔에 술을 따라 자신이 마시고, 팔짱을 낀 채 한숨을 쉬었다. 아무리 켄이 남들 앞에서 자신의 마음을 숨기려고 온갖 노력을 다 한다고 해도, 그가 아셰를 좋아한다는 사실은 영지민이라면 모두 알고 있었다.

“아니, 그냥 둘이 결혼하면 되잖아? 대체 뭐가 문제야? 피 한 방울 안 섞였겠다, 예전 영주님이 마님께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않은 것은 누구나 인정하는 바고. 그마저도 에곤 영주님이 돌아가신 지 3년이 흘렀어. 자그마치 3년이라고! 겨울이 세 번 지났어!”

“에라이, 이 경우 없는 놈아. 3년이고 30년이고 되는 게 있고 안 되는 게 있지!”

자신의 앞에 있던 술잔의 술을 단숨에 털어 넣은 카토가 한심하다는 듯이 에소트의 뒤통수를 세게 갈겼다.

“그래도 마님은 호적상 영주님의 어머니야. 세상에 어머니와 결혼하는 후레자식이 어디 있어?”

“그깟 종이 쪼가리가 뭐가 중요하다는 거야?”

에소트가 뒤통수를 매만지며 카토를 노려보았다.

“아니, 우리 영지 사람들 중에 영주님과 작은 마님이 이루어지면 안 될 사이라는 걸 모르는 사람은 없어. 하지만 우리가 괜찮다는데 대체 뭐가 문제인데?”

“난 찬성이야.”

스미스가 카토의 앞에 높여 있던 빈 잔에 술을 따르고, 에소트의 잔에 잔을 부딪치며 말했다.

“벌써 3년 반 전인가, 맨 처음 작은 마님이 그 커다란 배 안에서 나타났을 때 소영주님의 표정을 잊을 수가 없지. 이미 한눈에 반한 얼굴이었다고. 왜, 그 짐을 옮기던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이면 다 인정하잖아? 둘이 딱, 섰을 때, 캬, 당연히 영주님이 소영주님의 색시감을 데려온 줄 알았지, 자신의 색시였다는 걸 누가 알았나.”

다시 술집이 왁자지껄하게 시끄러워졌다. 카토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어쨌든 천지가 뒤집어질 일이야. 작은 마님은 어쨌거나 에곤 영주님의 여자였다고. 손가락을 댔던 안 댔던 그건 변하지 않아. 결혼식을 누구랑 올렸는데?”

“카토, 심술부리지 마.”

스미스가 그의 어깨를 툭 치며 소리쳤다.

“지금 네 딸이 영주님께 시집을 못 가서 그런 것 아냐? 유리아 고 계집애, 이제 포기하라고 해.”

“애초부터 그 외국인 여자가 이 영지에 온 것이 사달이었어.”

카토는 흥, 하며 툴툴거렸다.

“아버지와 아들이 한 여자를……. 남사스러워서 어디 말도 못 하는 일이지. 내가 에토 공국에서 오는 길인 건 알지? 에토 공국에서도 캐넌의 젊은 과부와 그보다 나이 많은 양아들에 대해서 떠들던데. 새 영주는 모든 혼사를 거부하고, 3년 동안 성안에서 단둘이 산다고.”

화리트가 벌떡 일어나 그의 멱살을 잡았다.

“말조심해라, 카토.”

그의 팔 근육이 울퉁불퉁하게 섰다.

“영주님이 작은 마님을 사랑하는 건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이지만…… 작은 마님은 맑고 깨끗하신 분이다. 영주님이 괜히 작은 마님에게 손끝 하나 건드리지 못하는 게 아니야. 네놈이 조롱할 만한 분이 아냐.”

“맞아, 카토. 실언이야.”

스미스가 화리트를 말리며 자리에 앉혔다. 스미스는 자신이 들고 있던 술잔에 술을 따라 화리트에게 건넨 뒤 침착하게 말했다.

“작은 마님이 3년 반 전, 그 커다란 배와 함께 오시지 않았더라면 우리는 지금 다 굶어 죽었어. 성안의 창고까지 텅텅 비어서, 소영주님이 위험을 무릅쓰고 산 깊숙한 곳까지 사냥하러 갔던 것, 기억 안 나? 하늘에는 참새조차 날지 않고, 바닷가에는 미역 한 줄기 떠다니지 않았던 시절이 고작 3년 반 전이야. 배은망덕한 소리 하지 마.”

“헹.”

카토가 못마땅한 표정으로 다시 테이블 중간에 있던 술잔을 비웠다.

“그래 봤자 아메탄에 감금되어 있었다는 살인자인데. 어마어마한 골칫덩이니 아메탄에서 그 큰 배를 함께 보내 우리에게 떠넘긴 것 아냐!”

[다음 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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