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0화 (209/256)

  

50화.

‘죽고 싶다는 생각이 들면 그 죽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한 사람을 죽여.’

그 어린 날, 부모조차 무심할 정도로 보잘것없는 그녀의 인생을 처음으로 걱정해 준 사람이었다.

‘좋은 결정이었습니다. 칭찬해 주고 싶군요.’

부탁을 하러 온 아메탄 왕가의 회의에서 보란 듯이 자신의 편을 들어 주던 남자였다. 그 어느 혈육과 친구도 해 주지 못한 일이었다.

‘내가 널 이해하는 것도 당연해.’

그녀는 친오라비를 죽여 놓고 ‘내 입장에서는 어쩔 수 없었다’라며 남들 앞에서 자신을 합리화할 정도로 나약하지 않았다. 자신이 한 일이 누군가의 이해를 바랄 정도로 윤리적이지 않은 것도 충분히 알고 있었다. 그러나 이해해 준다고 직접 말해 준 단 한 사람이 나타났을 때의 괴로울 정도로 차오르던 안도감은 어쩔 수 없었다.

‘나와 함께 가.’

그는 알고 있을까. 그녀에게 함께 하자는 미래를 말한 사람은 그가 처음이었다. 예쁘다는 말, 영리하다는 말, 눈치가 빠르다는 말은 수도 없이 들었지만…… 그녀는 언제나 다른 사람들 눈에는 결국엔 떠날 사람이었다. 심지어 샤틴에게도. 그녀를 어떻게 해서든 곁에 두겠다고, 함께 있어 주겠다고 한 사람은 이단이 유일했다.

충동적인 사랑을 말한 뒤 너무 많은 일이 벌어졌다. 다시 그의 얼굴과 체온을 마주하니 갇힌 궁속에서 그가 했었던 말들이 머릿속을 휘몰아쳤다. 그녀는 그를 잊을 수 있고, 사랑 따위는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한 자신이 얼마나 오만했는지 깨달았다. 익숙한 목소리 한마디에도 눈물이 나오고, 그의 품에 안기자마자 세상이 멈췄으면 좋겠다는 생각뿐인데……. 그가 정신없이 그녀의 입술에 입을 맞췄다. 

그가 짧게 떨어지는 틈도 아쉽다는 듯 입술을 붙인 채 속삭였다.

“너를 보러 왔어.”

“……이단…….”

“도저히 못 참겠어서…… 어쩔 수 없이…….”

그녀의 몸이 그의 체중을 이기지 못하고 그대로 갑판 위로 쓰러졌다. 그가 그녀의 몸을 그대로 끌어안으며 다리에 힘을 주어 그녀를 꽉 고정시켰다. 아셰가 속삭였다.

“화리트 씨는…… 그러니까, 저 사람은…….”

“둘 다 그냥 기절시킨 거야. 두 시간은 못 일어나. 마력을 담아 쳤거든. 저 사람은 게다가 마법사더군. 마법사는 마력을 맞으면 더 충격이 커.”

그가 그녀의 뺨을 두 손으로 매만지며 말했다. 그의 검은 눈이 그녀를 차례대로 훑었다. 그녀의 검지에 반지가 끼워져 있는 것을 확인한 그의 얼굴에 안도의 미소가 스쳤다. 이제야 그녀는 그의 마력이 바다에 고르게 퍼져 있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파도는 잠잠해졌고, 연결된 두 척의 배는 평온하게 멈춰 있었다. 주변은 별빛 빼고는 캄캄하기 그지없어서, 마치 세상에 둘만 있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왜 이렇게…… 왜 이렇게 말랐어…….”

“하지만 더 건강해졌어. 많이 움직여서.”

아셰가 눈물을 닦고 씩 웃으며 대답했다. 이단은 그녀의 허리를 감싸 안으며 깊게 입을 맞췄다. 아셰는 반항하지 않고 그의 손길과 혀를 받아들였다. 쉽게 잠을 이루지 못하는 밤마다 어쩔 수 없이 떠올렸던 손길과 체온이었다.

“안전하고, 행복하고, 평온한 것 맞지? 그 늙은이가 너를 범하고 있는 건 아니지?”

“아니야. 숙부님은 좋은 사람이야.”

그의 눈에 언뜻 잔인함이 비치는 것을 발견한 아셰가 부드럽게 웃으며 속삭였다.

“왕궁보다 좋아. 모두가 내게 잘 해 주고, 가족이 생긴 기분이거든.”

“웃기지 마.”

그가 그녀의 치마 속에 손을 집어넣으며 말했다.

“네 가족은 나야.”

“……응?”

“너를 곁에 두겠다고 했잖아.”

아셰는 미간을 찌푸리며 그의 손을 밀어냈다. 이 남자는 아무것도 모르겠지만, 몸은 멀쩡하더라도 아이를 잃은 지 한 달도 지나지 않았다. 아무리 그를 사랑해도 남자와 몸을 나눌 마음이 동하지 않았다.

“이단, 그게 무슨 소리야. 나는 혼인을 했고…….”

“그 늙은 영주가 죽으면, 너는 혼자가 되지. 전쟁이 끝나고, 혁명이 완성되면 곧바로 청혼을 넣을 테니 받아들여.”

“미쳤어? 네가 뭐가 아쉬워서 가난한 영지의 미망인과 결혼을 해? 나는 이제 아메탄의 왕녀가 아니야.”

“그런 게 뭐가 중요해? 난 너만 있으면 돼.”

그녀는 잠시 눈을 깜빡였다. 그가 너무나 당연하다는 듯이 덧붙였다.

“널 사랑한다고 했잖아.”

그는 아셰가 자신의 손길을 밀어내자, 부드럽게 그녀의 등을 쓸면서 다시 입을 맞췄다. 그녀가 입고 있는 원피스는 단추가 뒤에 있었는데, 그는 단추를 하나하나 풀며 그녀의 입술에 대고 으르렁거렸다.

“아니면…… 너만 허락하면…… 지금 나와 같이 가.”

“전쟁터에, 짐짝이 될 것이 뻔한 내가 거길 왜 가. 난 내 몸 하나도 못 지켜.”

그녀가 그의 손길에 그다지 달뜨지 않은 채로 한숨을 쉬며 말했다. 그를 멈출 생각은 들지 않았지만 그다지 몸을 섞지 않고 싶은 것도 사실이었다. 지금 그녀의 마음 대부분은 절반이 슬픔, 절반이 복수심이었다.

이단은 그녀가 예전처럼 반응하지 않음을 눈치채고는 눈을 가늘게 뜨고 한 손으로 아셰의 두 손을 잡아 고정한 채 그대로 원피스를 내렸다. 상체가 훤히 드러나자 아셰가 부끄러움에 고개를 돌렸다. 예전에 궁에서 나누던 정사와 또 다른 기분이었다. 밤하늘의 별들이 그들을 지켜보는 것처럼 흩뿌려져 있었고, 이곳은 바다 한가운데였으며, 이단이 기절시킨 두 사람이 지척에 쓰러져 있었다.

“아셰.”

그가 그녀의 가슴을 쓰다듬으며 힘주어 말했다. 그녀의 은밀한 곳에, 그는 의도적으로 부풀어 오른 자신의 남성을 꾹 눌렀다.

“너도 말해.”

“……뭘?”

그는 부드럽게 그녀의 유두를 두 손가락 사이에 낀 뒤 한 번 혀로 핥았다. 오랫동안 남자의 손이 닿지 않은 그녀의 몸은 그 쾌감을 기억한다는 듯이 크게 움찔했다. 아셰는 입술을 깨물고 그의 눈을 바라보았다. 그는 그녀의 가슴골에 입술을 묻고, 마치 짐승이 바라보는 것처럼 그녀의 턱 밑에서 눈을 마주쳤다.

“여전히 날 사랑한다고, 나와 함께하고 싶다고, 내 청혼을 받아들이겠다고.”

“아…….”

그의 다른 쪽 손이 그녀의 치마 속을 다시 들추고 들어와, 촉촉한 그녀의 여성을 부드럽게 쓸었다. 그는 그녀가 가장 좋아하는 애무를 이미 알고 있었다. 아래위로 동시에 자극을 주며 그가 속삭였다.

“제발 말해 줘. 나만 이렇게 널 원하고 있는 게 아니라고.”

“으…… 아…….”

그녀는 숨을 헐떡이며 눈을 질끈 감았다. 아이를 가졌던 흔적은 거짓말처럼 몸에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 배가 눈에 띄게 부풀기도 전에 아이는 사라졌고, 그녀의 몸은 마치 예전처럼 그의 손에 반응하고 있었다. 그것이 어쩐지 마음 아파 그녀는 신음 소리를 참았다.

“밤마다 날 생각하고, 날 기다렸다고…….”

그녀의 반응이 예전 같지 않자, 그가 그녀의 유두를 입에 넣고 세게 물었다.

“아!”

“보고 싶어서 들끓는 마음을 어쩔 수가 없었다고…… 제발!”

그녀의 눈에 눈물이 고였다. 만일 자신에게 아이가 없었다면, 정말로 그에 대한 그리움과 간절함만으로 밤을 보냈을 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이젠 알지 못하는 과거였다. 그녀는 그가 떠난 이후 배 속의 아이를 지키겠다는 생각으로 살았고, 아이를 안전하게 키울 생각이 언제나 머릿속에 가득했으며, 아이를 떠나보낸 이후에는 배후를 찾기 위해 끊임없이 머리를 굴리는 것만으로도 시간이 모자랐다.

그리고 배후를 찾은 지금은…… 반드시 복수를……. 그녀의 시야가 눈물로 흐려졌다. 아무리 아이를 위해 쉼 없이 달려왔어도, 그녀는 그의 손길을 거부할 수 없을 정도로 그를 사랑했다. 켄과 에곤에게서 형언할 수 없는 편안함을 느꼈어도, 그의 목소리 한 자락에 눈물이 흐를 만큼 그를 그리워했다.

“이단, 난 지금 남편이 있는 몸이고…….”

“상관없어.”

‘남편’이라는 소리에 그의 눈동자가 차갑게 번득였다. 그녀는 잠시 느껴지는 위압감에 차마 말을 더 이상 잇지 못했다. 눈치가 빠른 그녀는 그가 상당히 분노를 참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정말 역설적이게도, 그 뻗치는 분노의 기운은 예전의 황제를 닮아 있었다.

“난 아버지를 죽일 거야. 천륜을 어길 거라고.”

그가 그녀의 입술을 거칠게 빨고 나서 속삭였다. 그가 그녀를 얼마나 세게 끌어안는지 몸이 으스러지는 것 같았다.

“내 여자에게 형식상의 남편이 생겼더라도…… 그딴 윤리는 지키지 않아.”

“나, 나는…….”

“널 사랑하니까.”

그가 그녀의 다리 사이로 자신의 다리를 집어넣어 활짝 벌렸다. 그녀는 더 이상 저항할 수 없었다. 그동안은 사랑을 깊게 생각하지 않았고, 믿지도 않았지만 그의 얼굴을 보니 정답처럼 떠오르는 것이었다. 사실은 캐넌에 오고 나서 그와 다시 이어질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기대하지 않았기 때문에 오히려 그가 그녀를 잊지 않고, 원하고, 애달프게 사랑을 고백하는 이 순간이 아찔하게 황홀하고 한편으로는 안심도 되었다. 그러나…… 그러나 그녀는 그들의 아이를 지키지 못했다.

“……나를 잊었어?”

그녀에게서 대답이 없고, 평소 같은 반응이 보이지 않자 이단은 그녀의 얼굴에 대고 말했다.

“……사랑이 끝났어? 대답해.”

그녀는 빤히 그를 바라보았다. 복수를…… 내 아이의 복수를……. 당신의 오른팔인 사브르, 그 사람이 우리의 아이를 죽였어……. 그 사람을 죽여줘……. 그녀는 그런 말을 하면서 그에게 매달릴까 잠시 고민했으나, 본능적인 신중함으로 입을 다물었다. 그런 말은 언제든지 할 수 있었다. 적어도, 두 시간 안에는. 리젠에게 진실을 알아내라며 베갯머리송사를 명령했던 사람이 바로 그녀였다. 더 이상 이단은 그녀와 분리된 사람이 아니었고, 그래서 일단은 감정적으로 행동하면 안 된다는 판단이 들었다. 그에게 몸 외에는 아무것도 원하지 않던 예전과는 달랐다. 그녀는 이제…… 그에게 원하는 것이 있었다.

“그럴 리가.”

그의 눈을 마주하는 아셰의 눈에 눈물이 다시 고였다.

“널 잊을 리 없고.”

그녀는 천천히 손을 들어 그의 뺨을 쓰다듬었다. 그의 코에 입을 살짝 맞췄다. 남편이 있다는 것은 그와의 정사가 내키지 않아 대충 둘러댄 핑계일 뿐, 그녀 역시 문서상의 남편이 있다고 해서 정절을 지켜야 한다는 생각은 조금도 없었다.

“밤마다 학자자리의 여덟 개 별을 세었으며.”

그의 떨리는 숨결이 어깨에 그대로 느껴졌다.

“그 많은 밤을 당연히 기억하고.”

그의 검은 눈에 눈물이 고였다.

“언제나 당신이 준 반지를 꼈어.”

[다음 편에 계속....]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