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9화.
“……그런가. 하지만 분명 개혁에는 피해를 보는 사람들이 있어. 정당한 장사를 하던 상단들의 입지가 상당히 좁아졌거든. 그래도 어쩔 수 없지. 역사에는 그런 건 남지 않아.”
다니엘은 피식 웃고 머리를 쓸어 넘겼다. 아셰는 일단 잘 넘어갔다고 생각했으나, 다니엘은 절대 잊지 않을 것이다. 아까 보여 주었던 다니엘의 분노는 분명 진심인 것 같았다. 그는 분명 카이든에게 아셰의 아이를 누가 없앴는지 알아보라고 지시할 테고, 수사국의 전무후무한 인재라고 평가받는 그 검은 머리의 무뚝뚝한 남자가 반드시 정답을 알아낼 것이다. 그녀는 리젠은 믿을 수 있었지만 다니엘은 믿을 수 없었다. 다니엘은 진실을 알아채더라도 무언가 아메탄 왕국에 해가 될 것 같다면 그녀에게 말하지 않을 것이다.
게다가 다니엘이…… 아셰는 별로 관심이 없다고 카이든에게 말해야만, 카이든도 별다른 의심 없이 리젠에게 작은 단서라도 말해 줄 것이다. 아메니티에 도착하자마자 말 한마디 한마디에 계산을 시작한 그녀의 표정은 이미 캐넌에서와 조금 달라져 있었다.
“아셰.”
그가 그의 여동생을 바라보며 낮게 말했다.
“에곤이 죽고 갈 곳이 마땅치 않으면, 언제든 와도 돼. 넌 이제 자유고, 아메니티의 시민권 같은 건 어떻게 해서든 줄게.”
“밤에 자다가 로즈리에게 목 졸려 죽을 일 있어? 하지만 생각해 볼게. 그런데…… 오빠는 정말 결혼은 안 할 거야? 혼기가 한참 지났어.”
“아, 안 그래도…… 요즘 눈길이 가는 여자가 하나 있어.”
살짝 수줍어하는 다니엘의 말에 아셰의 눈이 반짝거리며 빛났다. 그녀의 눈빛에 흥미롭다는 감정이 맴돌자 그가 머쓱한 듯 말을 이었다.
“키가 작고 귀여운데, 씩씩하고 영리해. 무엇보다 심지가 굳고 강단 있는 전형적인 산하기관 여자…….”
“오빠, 취향이 왜 이렇게 한결같아?”
아셰가 까르르 웃으며 말했다.
“듣기만 해도 리젠이랑 비슷한 애잖아! 귀족 영애들 희망 고문은 다 시켜 놓고서, 결국 고른다는 게 산하기관 여자야? 정말 카를 왕의 후예가 되고 싶은가 보지?”
다니엘은 비로소 익숙한 제 동생과 이야기를 나누는 것 같아 몸에 힘을 풀고 안도의 미소를 지었다.
* * *
켄에게 말했던 대로, 그녀는 아메니티에서 딱히 오래 머물지는 않았다. 그래도 그녀가 타고 온 작은 배가 캐넌으로 다시 향할 때에는, 다니엘과 리젠이 몰래 선물해 준 여러 가지 물품들이 쌓여 있었다.
검은 물이 일렁이고, 아셰는 멍하니 작은 배의 갑판에 앉아 밤하늘을 바라보았다. 희미한 여덟 개의 별을 세고, 또 세는 동안 작은 배는 부지런히 바닷물을 가르고 있었다.
‘배를 보내 왕녀님께 시약을 먹이도록 지시한 사람은 혁명군의 사브르 키렐이에요. 이단의 오른팔이자 정보원 역할을 하고 있다고 해요.’
그녀는 작별 인사를 할 때, 그녀를 꼭 껴안은 리젠의 속삭임을 기억하며 자신의 검지에 둘러져 있는 금반지를 매만졌다.
‘이단은 임신 사실을 전혀 모르고 있어요. 사브르 키렐은 스타람 출신의 공화주의자로, 아카날이 장기집권을 선언하고 자신의 아들을 후계자로 키우고 있는 걸 보며 커다란 좌절을 느꼈다고 해요.’
배가 북쪽으로 나아갈수록 공기가 차가워졌다. 그러나 그녀는 걸치고 있는 망토를 조금 더 추스를 뿐이었다. 규칙적인 파도 소리가 그녀의 복잡한 마음을 어루만져 주는 것 같았다.
‘이단이 무슨 성을…… 마법으로 함락했다는데…… 마법을 쓰지 못하는 스타람인들 사이에서 동요가 조금 일었나 봐요. 진정한 혁명의 정신이 아니라면서 말이에요. 그러나 제국 출신의 혁명군들은 당연히 환호하고…… 사브르는 이단의 아이가 왕녀님에게서 자라고 있다는 걸 알아챈 뒤 이단이 아카날처럼 될까 봐 두려워했다고 해요.’
사브르 키렐. 이단의 오른팔이자, 스타람의 공화주의자. 현재 혁명군의 정보원을 맡고 있으며, 아마도 그녀의 정보를 선택적으로 이단에게 전달해 주고 있을 남자. 그녀는 천천히 생각을 곱씹었다.
‘지금 마법으로 인해 이단의 지지율은 하늘을 치솟는다고 해요. 당연하겠지요, 한 소대의 군인들도 못 해낸 일을 이단은 금방 해내니까요. 이대로라면 이단이 장기집권을 선언해도 축제일 듯한 분위기고, 당연히 이단은 그 힘을 아들에게 물려주고 싶겠지요. 사브르는 이단이 황제를 직접 죽여 핏줄의 고리를 끊기 전까지는, 그에게 아이가 있으면 안 된다고 생각한 모양이에요.’
사브르가 그런 걱정을 하게 된 이유는 알 것 같았다. 아셰는 한때 그의 가장 가까운 곳에서 그를 지켜봤다. 어쩔 수 없는 황족 핏줄의 특징이 보일 때면, 그녀조차도 그가 정말 공화주의자가 되어 공화정을 선포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을 하곤 했다. 잠자리에서 그가 이성을 잃을 때면 무조건적인 명령조를 썼던 것을 잊지 않았다. 그는 관계를 가질 때에 아셰를 배려해 주었지만 그 배려의 정도조차도 그가 결정했다.
가끔은 독단적이고, 지나치게 영리하며, 가만히 있어도 누군가에게 위압감을 내뿜는 남자. 그는 남들의 의견을 참고하면서 언젠가 물러날 통령보다는 남의 위에서 군림하는 황제가 어울리는 남자였다. 아셰가 알아챈 것을 오른팔이라는 사브르가 알아채지 못했을 리가 없었다.
‘제가 처음에 말한 것을 잊으면 안 돼요, 왕녀님. 카이든을 통해 추론해 낸 것이므로 일부의 정보가 누락되거나, 의도적으로 그가 제게 숨겼을 수도 있어요. 그 역시 영리한 사람이라는 걸 잊지 마세요. 오히려 저희가 파악 당했을 수 있어요. 저도 물론 개인적으로 알아본 것들을 조합하여 결론 내린 것이지만, 분명히 제가 놓치고 있는 것들이 있을 수 있어요. 저는 수사국 사람이 아니니까 알 수 있는 정보에 한계가 있거든요.’
‘이 정도만 해도 고마워. 그 고리타분한 모범생을 어떻게 꾀어낸 거야?’
‘카이든이 무심결에 단어 하나 뱉어 내면 몇날 며칠을 몰래 알아봤죠. 물론 그 단어 하나를 얻는 데에는 왕녀님 명령대로 베갯머리송사도 좀 이용했어요. 아직도 온몸이 얼얼해요. 왕녀님, 제 우정을 잊지 마세요.’
그녀는 아무런 흔적도 없이 납작해진 자신의 배를 무의식적으로 만졌다. 아이는 없다. 아무런 통증도 흔적도 없고, 실제로 그녀의 몸은 마치 홀몸처럼 돌아갔으며 이제 아이는 없었다.
한 번은 이단이 자신의 아이를 죽였을지도 모른단 생각도 해 보았으나, 그녀는 결국 그럴 리는 없다고 결론지었다. 그가 정말 자신과 아이를 방해물이라고 생각해 없앨 셈이었으면 그 어떤 후환도 남지 않게 그녀를 죽였을 것이다. 그녀는 마지막에, 그가 임신을 바랐던 눈치였다는 것을 기억하고 있었다. 물론 그 말을 전적으로 믿어선 안 된다는 것도 알지만…….
그때, 그를 따라갔더라면…… 아메탄 왕족의 자존심이고 뭐고, 다니엘이고 샤틴이고 뭐고, 그저 그의 손을 잡고 국경을 넘었더라면 아이는 살아 있었을까……. 그녀의 눈에 눈물이 고였다.
작은 배의 선실에서 배를 조정하던 화리트가 갑판으로 나오자, 아셰는 고개를 들어 눈물을 닦은 후 그를 바라보았다.
“화리트 씨? 무슨 일이세요?”
화리트는 그녀의 유일한 뱃사공으로, 캐넌에서 가장 능력 있는 마법사였다. 물론 마력이 없는 시대에 마법사는 굶어 죽기 딱 좋았기 때문에, 그는 마력으로 바람과 파도를 적절히 조정하여 배를 이끄는 훌륭한 항해사를 겸하고 있었다.
“저기 배가 한 척 보이는데, 구조 신호가 반짝이는 것 같아요. 잠시 가까이 가야겠습니다. 위험해 보이지는 않지요?”
아셰도 함께 일어나 눈을 가늘게 떴다. 그녀가 탄 배보다 훨씬 작았다. 인영이 딱 둘만 보이는 것을 봐서 그다지 위험해 보이지는 않았다.
“……가까이 가 보겠습니다. 구조 신호를 무시하는 건 뱃사람의 예의가 아니죠. 혹시 모르니 작은 마님은 선실에 들어가 있는 것이 좋겠습니다. 아니, 작은 마님의 안전은 무엇보다 중요하니 아메탄에서 가져온 목화솜 속에 숨어 계십시오.”
“네.”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배 뒤편에 쌓인 목화솜들 속에 몸을 숨긴 아셰는 눈을 빼꼼 뜨고 빠르게 다가오는 작은 배를 가만히 노려보았다. 배의 중앙에는 후드를 둘러써서 도저히 외형을 알아볼 수 없는 사람이 가만히 앉아 있었다. 그 옆에 조악한 방향키를 잡은 소년이 형체를 알아볼 수 있을 정도로 가까이 다가왔다.
“무슨 일이오?”
화리트가 망망대해 속에서 서서히 시야에 잡히는 유일한 작은 배에게 커다랗게 마력을 담아 소리 질렀다. 소년이 마력이라고는 전혀 없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갑판에 물이 새요! 여분의 널빤지가 있으신가요?”
“가까이 오시오! 못과 망치는 가지고 있소?”
“네! 널빤지만 있으면 돼요!”
화리트는 순조롭게 배를 가까이 댔다. 아셰는 주근깨가 가득한 소년이 감사의 표시라며 과일 몇 개를 건네는 것을 보았다. 화리트가 클클 웃으며 담뱃잎을 씹고, 선실로 돌아서 널빤지를 가지러 가려고 할 때였다.
아셰는 깜짝 놀라 벌떡 일어설 뻔했다. 후드를 둘러쓴 사람이 재빠르게 일어나 소년의 뒷목을 쳐서 기절시키고, 순식간에 아셰의 배로 건너오더니 화리트까지 기절시켰던 것이다. 그녀는 소리를 지르며 뛰쳐나가지 않을 정도의 지능은 있었기 때문에, 숨을 죽이고 천천히 목화솜 사이로 완전히 모습을 숨겼다. 바다는 파도 하나 없이 잔잔했고, 후드를 둘러쓴 남자는 두 배를 어렵지 않게 쇠사슬로 연결하더니 주위를 둘러보기 시작했다. 그녀는 재빨리 머리를 숙이고 자신의 머리 위에 목화솜 상자 하나를 더 얹었다.
시간이 얼마 지나지 않았는데도 그녀의 심장은 세차게 뛰었다. 누구일까. 해적일까? 아니면 정말로 이제 그녀를 죽이러 왔을까? 그렇다면 왜? 그녀가 하얗게 질려 손톱을 물어뜯고 있는데, 거짓말처럼 그녀의 머리 위에 얹어 놨던 목화솜 상자를 누군가가 들었다. 그녀가 품에 지니고 있던 단도를 꺼내려고 조용히 손을 움직이는 순간,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찾았잖아.”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들었다. 그녀를 둘러싸고 있던 목화솜 상자를 성의 없이 치우며, 그가 와락 그녀를 끌어안았다.
“얼마나…… 얼마나 너를 보고 싶었는지…….”
그녀의 의지를 배신하고 눈물이 주룩주룩 흘렀다.
[다음 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