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8화 (207/256)

  

48화.

리젠은 팔을 풀어 그녀의 한쪽 어깨를 짚었다. 그녀의 눈은 웃고 있었지만 손으로 가린 입 속에서는 떨리는 목소리가 배어 나왔다.

“카이든은…… 제게 말해 주지 않을 거예요. 왕녀님이 이단 황자님의 아이를 밴 것도 끝까지 말해 주지 않았어요. 왕녀님이 허락했다는 말을 해도 몇 날 며칠을 망설인 남자예요. 실제로 수사국의 사람들은 절대 가족에게 국가 기밀을 말하지 않아요.”

“그건 네가 알아서 해야지. 쉬운 일이라면 내가 네게 부탁했겠어?”

아셰의 푸른 눈이 번득이며 빛났다. 리젠은 마른침을 삼키며 자신도 모르게 한 발짝 뒤로 물러섰다. 그녀는 무도회에서 아셰가 자신을 무시하던 귀족 여인들에게 서슬 퍼런 독기를 뿜어내던 것을 잊지 않았다. 아무리 리스 공국의 작은 영지에 박혀 있었다고 하지만, 아셰는 애초부터 제왕 교육을 받은 왕족이었다. 원한이 생긴다면 절대 잊지 않을 것이고, 친구인 자신조차 이용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 그리고 리젠은 그녀에게 영원히 갚지 못할 심리적 빚이 있었다.

“어떻게든 알아내. 잠자리에서 달콤한 말을 속삭이고 눈물로 빌어서라도 내 아이를 죽인 배후를 알아내. 내가 괜히 여관에서 머무는 것이 아니야. 네게 복수까지 부탁하지는 않아. 그저 내게 알려 주기만 하면 돼. 그건 다른 누구도 아닌, 카이든을 남편으로 둔 너만이 해 줄 수 있는 일이야.”

“……왕녀님, 카이든은…… 절대로 말하지 않을 테고, 아무리 둘러 묻더라도 그저 넘어가고 싶어 제게 거짓을 말할 수도 있어요. 혼동을 주기 위해 일부의 정보만 말할 수도 있고요. 결국엔 제가 추론해야 해요. 저는 수사국 사람이 아니니 정확한 배후를 찾을 수 있다는 약속은 절대 못 드려요.”

“정확하지 않으면, 나는 무고한 사람을 해하게 되겠지. 그게 싫으면 네가 어떻게든 정확한 정보를 얻어 와. 리젠 하카트, 너는 내가 대학을 다닐 때에 카이든과 쌍벽을 이루던 수재였어. 너의 능력을 믿지 않으면 나는 그 누구도 못 믿어.”

리젠은 한숨을 삼켰다. 그녀가 수사국에 몸을 담고 있었다면, 아셰가 자신을 죽이겠다고 협박해도 국가의 기밀을 알리지 않겠다며 입을 닫았을 것이다. 그것이 수사국의 강령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리젠은 약제국 소속이었고, 그녀에겐 딱히 아셰의 부탁을 들어주지 않을 명분이 없었다. 카이든이 자신에게 작은 단서라도 말한다면, 그것은 가족에게도 마음을 놓고 기밀을 누설한 카이든의 부족함이다. 리젠은 막다른 골목에 다다른 느낌이었다.

예전에 이런 상황이 있었다. 가장 친한 친구가 살인을 저질렀고, 그 사실을 그녀만이 알고 있을 때였다. 당연히 숨겨 주고 싶은 마음이 더 컸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자신을 물심양면으로 도와준 아셰의 손을 놓았다. 그리고 그 결과로…… 아셰는 이렇게 (그녀의 눈에) 누더기 같은 이상한 옷을 입고, 풍성했던 머리채도 자른 채 화장기 없는 얼굴로 그녀의 앞에 서 있었다. 아이를 잃고 분노에 휩싸인 작은 몸을 어쩔 줄 모르는 왕녀는 더 이상 고고하고 아름다웠던 예전의 당당한 아셰 사이나카라 아메탄이 아니었다. 그저 허망함에 몸서리치고 있는 그녀의 가장 친한 친구였다.

어떤 결정을 내려도 후회하겠구나. 리젠은 떨리는 숨을 내쉬며 그녀의 단 하나뿐인 친구를 바라보았다. 이어지는 수많은 생각을 뒤로한 채 리젠은 이미 자신이 결론을 내렸음을 알았다. 아셰는 자신의 죄가 밝혀져 감금이 결정되었을 때조차도 자신에게 망가진 모습을 보여 주지 않았다. 그러나 지금 그녀는 온몸으로 뻗어 나오는 슬픔과 분노를 주체하지 못할 정도로 제정신이 아니라는 것이 느껴졌다.

인간이기에 어쩔 수 없이, 이번에는 아셰의 손을 잡아 주고 싶었다. 리젠은 이미 아셰가 리스로 떠날 때에, 도울 수 있는 일이 있다면 무조건 돕겠다는 약속을 한 적이 있었다.

다음 날 아셰를 찾아온 것은 다니엘이었다. 그는 호위 무사들과 함께 비밀리에 여관을 찾아와 그녀를 꼭 안아 주었다.

“좋아 보여, 다니엘.”

아셰는 환히 웃으며 말했다.

“잘 지냈어?”

“……넌 왜 이렇게 말랐어?”

다니엘은 그녀의 파리한 얼굴을 보며 쓸쓸하게 물었다.

“머리는 왜 잘랐고…… 이 옷은 또 뭐야?”

“음, 캐넌에서는 비누도 아껴 써야 하거든. 머리가 길면 관리가 너무 힘들어. 캐넌의 여자들은 모두 머리를 이렇게 짧게 잘라. 그리고 이건 리스 공국의 전통 의상이야. 실크가 비싸고 또 활동하기에 불편하기도 해서…….”

“……아.”

다니엘이 참담하다는 듯 이마를 짚었다. 아셰는 어깨를 으쓱하며 씩씩하게 웃어 보였다.

“불쌍하면 가는 길에 곡식이라도 좀 얹어 주든가.”

“비누도 잔뜩 실어 줄게.”

“질 좋은 건 필요 없고, 싼 걸로 많이 주는 게 좋을 것 같아. 영주민들을 나눠 주면 되겠다.”

다니엘은 차마 말을 잇지 못하고, 한숨을 쉬었다. 아셰가 웃으며 그의 어깨를 쳤다.

“그런 표정 짓지 마. 난 너무 행복해. 정말이야.”

“…….”

“숙부님, 아니 에곤 영주님은 나를 아예 건드리지 않으셔. 나는 정말 자유를 찾은 거야. 오빠는 내가 항상 뭘 원했는지 알지? 작은 영지라도 좋으니 자유가 있는 곳, 지루해도 좋으니 암투가 없는 곳, 외져도 좋으니 외롭지 않은 곳. 캐넌은 내게 바로 그 꿈의 땅이야.”

“……외롭지 않아? 나는…… 네가 없으니 외로웠는데.”

“당연히…… 리젠도 오빠도, 가끔은 카이든도 보고 싶었지만…….”

그녀는 그의 눈을 바라보며 웃었다.

“그래도 그곳 사람들은 따뜻해. 몇 명 되지 않아 서로 다 알고 지내. 나는 괜찮아. 아, 켄이라는 소영주가 있어. 친하게 지내고 있는데…… 켄이랑 이야기하면서 네 생각이 많이 났어. 우리도 어린 시절에 그렇게 둘이 붙어 지냈는데 말이야.”

“……그렇구나. 그 양자가 드디어 호적에 올랐다는 소식은 전해 들었어.”

“응, 5년 동안 감금되어 죽을 날만 기다리던 그때보다는 훨씬 행복해. 다 오빠 덕분이야. 기지를 발휘해서 나를 그리로 보낸 건 정말 대단한 수였어. 정말 고마워.”

“……뭐…… 네가 좋다면…….”

다니엘은 한숨을 쉬고 고개를 숙였다. 그의 시선이 자신의 배로 향하는 것을 눈치챈 아셰가 쓸쓸한 얼굴로 말했다.

“아, 다니엘, 그리고 할 말이 있어.”

“……뭔데?”

“아이가…… 아이가 죽었어.”

“뭐?”

“어느 날 괴한들이 내게 무슨 시약을 억지로 먹였고…… 그대로 아이가 사라졌어.”

다니엘은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지 모르는 눈빛이었다. 그가 그녀의 손을 잡고 낮게 물었다.

“대체 언제?”

“…….”

“상황을 자세히 말해 봐.”

“……상황이라고 할 것도 없어. 그게 다야.”

아셰는 눈을 내리깔고 씁쓸하게 말했다.

“이미 알고 있을지도 모르겠지만, 사실 이단의 아이였어.”

그녀는 다니엘이 아무런 말을 하지 않는 것을 보고, 수사국의 능력에 내심 감탄했다. 추론이든 추측이든 어쨌든 이미 알고 있었음에 틀림없었다.

“제국이겠지, 뭐. 황제의 끄나풀이거나…… 아니면 이단일 수도 있고.”

“……그 개자식이…….”

다니엘조차 믿을 수 없었던 그녀는 일부러 가장 의심하지 않고 있는 사람을 언급했다.

“내가 임신한 건 거의 대다수가 모르지만…… 혹시라도 이단의 귀에 들어갔다면, 나중에 발목 잡힐까 봐 아이를 없애고 싶어 할 수도 있다고 생각했어. 아니, 내가 임신한 걸 몰랐더라도 확실히 하기 위해 사람을 보냈을 수도 있지. 마지막에 내게 임신 가능성은 없냐고 물었고, 자신은 아이가 싫다고 했었거든.”

다니엘이 벌떡 일어났다. 그의 눈에 분노가 일렁거렸다. 그는 고상하게 자라 차마 욕설을 내뱉을 수 없었지만, 속으로는 루벤에게 배운 온갖 쌍욕을 중얼거리고 있다는 것이 느껴졌다.

“그 개자식이…… 결국에는…… 넌 그 아이를 지키기 위해 캐넌까지 갔는데…….”

“오빠, 진정해. 정말 괜찮아.”

아셰는 그의 팔을 잡으며 그대로 자리에 앉혔다. 그녀가 반달로 눈을 웃어 보이며 차분하게 말했다.

“아이가 사라지니까, 오히려 홀가분해. 그런 남자의 아이를 키워 봤자, 평온한 캐넌 영지에 피바람만 불 거야. 아메탄의 왕궁에 갇혀 있을 땐 내 새끼가 소중했지만, 아름다운 곳에서 자유를 만끽하니 조금 답답했던 건 사실이야……. 숙부님이 돌아가시면 난 재혼을 할 수도 있는데 말이야. 그래서 난 그냥, 조금 슬프지만 받아들이기로 했어.”

“……아셰, 하지만 그놈은…….”

“나는 여기서 너무 행복해. 정말이야. 그래서 괜찮아.”

“하…….”

다니엘은 분노가 진정이 안 된다는 듯이 심호흡을 했다. 아셰가 괜찮다는데 자신이 어떻게 할 수 없다는 생각인 듯했다. 그녀는 조곤조곤하게 말을 잇기 시작했다. 이제 다니엘의 관심사를 다른 곳으로 돌릴 때였다. 그녀는 무의식적으로 검지에 끼워진 반지를 매만지며 말했다.

“리젠과 함께 오면서 보니까, 이상한 것들이 많더라. 기술국의 전기용품이라던데?”

“아.”

그가 조금 누그러진 표정으로 부드럽게 말했다.

“기술국이 생각보다 성과가 좋아. 아직 너무 비싸고, 상용화하기엔 오래 걸리겠지만 모두가 열심히 개발 중이야. 그 7일간의 어둠을 잊지 않았기 때문에, 국민들도 몹시 지지하고 있어. 귀족들도 처음엔 반대했지만 슬그머니 개발되는 것들에 관심을 갖는 모양이야.”

“스타람은 약 좀 오르겠네. 원래 그것들 다 대륙에 팔아먹으려고 했을 텐데.”

“물론 약제국 같은 산하기관은 연구 윤리를 들이밀며 엄청나게 반대했어. 남의 독자적인 기술을 베껴 우리 것인 것마냥 배포하면 안 된다느니…… 하지만 먼저 뒤통수를 친 건 그쪽이야. 7일간 스타람에 흘러간 돈만 해도 얼마야.”

“다니엘, 넌 역사에 남을 왕이 될 거야.”

아셰는 싱긋 웃어 보이며 말했다.

“이 변화하는 세상에 아메탄의 키를 훌륭하게 잡아 이끈 사람으로 말이야. 기술국이 성공하면 그 누구도 공화국의 공 자도 꺼내지 못할걸. 공화정 국가에서 누가 이런 판단을 내리고 재빠르게 움직이겠어?”

[다음 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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