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7화 (206/256)

  

47화.

이단은 허리에 손을 얹고 한숨을 쉬었다. 그녀가 리스 공국에 간 지도 꽤 되었다. 친구를 보고 싶어 할만 했다. 원칙적으로 그녀는 아메탄 왕가의 죄인이 아니라 이제 리스 공국의 사람이었고, 아메탄 왕국에 가지 못할 제도적인 이유는 없었다.

“아셰 왕녀님이 돌아오시면 그 때 움직여야 할 것 같습니다. 설마 아메탄 왕국에 가시겠다는 소리는 아니겠죠.”

“……그 정도로 바보는 아냐.”

이단은 한숨을 쉬며 성벽에 기대어 착잡한 표정으로 사브르를 바라보았다. 사브르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말을 이었다.

“소영주에게 일주일 안에 온다고 했답니다. 오래 걸리지 않을 거예요.”

“……소영주?”

“아.”

더 설명해 보라는 이단의 눈빛에 사브르가 재빠르게 말했다.

“에곤이 후사가 없어 양아들을 들인 모양입니다. 병색이 짙어 이번 겨울을 못 넘길 것 같다는 소문이 돈다는군요. 영지의 일은 그 소영주가 도맡아 한다고 들었습니다.”

이단은 별다른 흥미가 없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대화가 끝났음을 알아챈 사브르는 그대로 사라졌고, 그는 한동안 성벽에 기대어 여덟 개의 별을 바라보았다. 그의 곁에는 아무도 없었고, 밤하늘 아래 오롯하게 그만 존재하는 것 같은 기분에 휩싸였다.

“너를 떠올릴 수 있는 것이…….”

찬 밤공기에 그의 입김이 흩어졌다.

“저 여덟 개의 무심한 별뿐이라는 게 내게는 너무 절망스럽다.”

그가 습관처럼 한때 제 새끼손가락을 지키던 반지의 자리를 더듬었다.

“이럴 줄 알았다면 옷감 한쪽이라도 찢어 올 것을.”

부드럽게 손에 달라붙던 살결의 감촉, 도대체 진심을 내보이지 않던 파란색 눈동자,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랑한다며 먼저 속삭였던 떨리는 목소리, 좁은 침대 안에 떠돌던 끈적한 공기까지 그는 단 하나도 잊을 수 없었다.

“보고 싶다.”

어느새 터져 나온 진심에, 그는 손으로 눈을 쓸었다.

“너를…… 너를 미치도록 보고 싶어.”

모든 것은 중요하지 않았다. 아셰가 그 가난하고 좁은 영지에 있다는 것도, 호적상으로 70이 다 된 늙은이의 아내라는 것도, 그녀가 평화 속에 그를 잊었을지 모른다는 불안함도. 결국에 그를 리스 공국으로 내몰고 있는 것은 단순하기 짝이 없는, 그녀가 보고 싶다는 어쩔 수 없는 욕망이었다.

* * *

“왕녀님!”

리젠은 항구에서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아셰는 허리를 굵은 천으로 동여맨 새로운 스타일의 옷을 입고 있었다. 리스 지역의 전통 의상이라는 것을 알아챈 리젠이 묘한 표정으로 웃었다. 아셰는 뱃사공의 도움을 받아 깡충깡충 배에서 가볍게 내렸다.

“오랜만이에요, 왕녀님. 잘 지내셨어요? 왜 이렇게 마르셨어요…….”

아셰는 짧은 머리를 하나로 높게 묶은 채 두르고 있던 망토를 벗었다. 그녀가 도도하게 웃으며 말했다.

“역시 아메니티는 덥구나. 캐넌은 바람이 꽤 쌀쌀하거든.”

“항해는 힘들지 않으셨어요?”

“응. 아, 선물은 없어. 캐넌의 모든 것이 아메탄보다 별로거든. 다만 풍경이 좋고 공기가 맑은 데다가 치즈가 신선하단다. 나중에 한번 놀러 와.”

“왕녀님이 말리시더라도, 다음 휴가 때 바로 갈 참이었어요. 몸은 좀 괜찮으시고요?”

리젠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아셰는 싱긋 웃고 그녀의 팔짱을 꼈다.

“할 얘기가 많으니, 회포는 천천히 풀자.”

“네. 방 하나를 비워 놓았어요. 옛날에 르엘라가 쓰던 방인데…….”

“아, 아냐. 편지에는 말하지 않았지만…… 난 가까운 여관을 쓰려고 해.”

“……네? 무슨 말씀이세요?”

리젠의 눈이 둥그렇게 변했다. 아셰가 깔깔거리며 대답했다.

“어쩌면 다니엘이 날 보러 올지도 모르는데, 어떻게 너희 집에 있겠어? 게다가 너 정리 정돈 못 해서 집안 꼴 더러울 것이 뻔한데 그런 부담을 카이든에게 주고 싶지 않아.”

“아…… 그래도 여관에 묵는다는 건 말도 안 돼요. 왕녀님은…….”

“리젠.”

아셰는 단호하게 말했다.

“난 이제 왕녀가 아니야. 리스 공국에서는 모두 나를 작은 마님이라고 불러. 왜 작은 마님인지는 모르겠지만, 내가 영주님에 비해 어려서 그런가 봐.”

“……하, 하지만…….”

“물론 여관비는 네가 내주어야 해. 캐넌은 지금 한 푼이 아쉽거든. 괜찮지?”

“……가장 좋은 여관으로 모시겠어요, 왕녀님. 산하기관 월급이 꽤 되는 건 아시죠?”

리젠은 눈치 빠르게 대답했다. 그녀는 아셰가 한번 마음을 먹으면 돌리지 않는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괜히 길거리에서 피곤한 사람을 붙잡고 실랑이하느니, 빠르게 편한 숙소를 잡아 주는 것이 현명한 일이었다.

아메니티는 그대로였다. 여기저기 마법 아이템들이 온갖 편리함을 자랑하며 설치되어 있었고, 캐넌의 인구 모두를 한 시간 만에 본 것 같았다. 처음 보는 물건들이 벌써 눈에 들어와, 그녀가 리젠의 팔을 붙잡으며 물었다.

“저건 뭐야? 엄청나게 큰데.”

“아, 기술국에서 개발한 건데…… 너무 커서 실용화는 안 되고 있어요. 다리미……라나? 저기에 옷을 넣으면 펴진대요. 마력이 하나도 안 들어요. 하지만 가정집에서 사용하기엔 너무 크고 터무니없이 비싸죠.”

“……그래도 대단한데. 기술국이 들어오자마자 마력 없이도 뭔가 할 수 있는 것을 만들다니.”

“밀수꾼들이 한몫했죠. 스타람의 물건을 대놓고 베끼라며 우르르 기술국에 갖다 바쳤으니까.”

리젠은 못마땅하다는 듯이 고개를 저었다. 객관성과 연구 윤리를 중시하는 그녀는 외국의 것을 허락도 없이 마구 베낀다는 것에 대해 못마땅한 듯했다. 그녀가 고개를 들자, 화려하고 커다랗게 자리 잡은 아메탄의 왕궁이 아메니티 중앙에 거대한 존재감을 뽐내며 자리하고 있었다.

“나는…….”

아셰가 키득대며 말했다.

“왕궁이 저렇게 크고 아름다운지 이제 알았지, 뭐야.”

리젠이 복잡한 눈으로 그녀의 팔짱을 꼭 꼈다. 그녀의 집에서 가까운 여관의 가장 넓고 좋은 방을 계산하는 리젠을 아셰는 가만히 바라보았다.

‘윌리엄 태자 마마는 아셰 왕녀님의 차를 마시고 독살당하셨습니다.’

많은 사람들 앞에서 그녀를 고발하던 떨리는 목소리를 기억하며 아셰는 작은 한숨을 쉬었다. 리젠의 입장에서는 어쩔 수 없었을 것이다. 그녀에게는 진실을 밝혀야 한다는 올바른 신념이 있으니까. 아무리 친구라고 할지라도 그녀는 그 올곧음을 배우며 자랐다.

널찍한 방에 작은 가방 하나뿐인 짐을 던지고, 아셰는 여관의 방문을 닫았다.

“마음에…… 드세요?”

“물론이야. 내가 캐넌의 성에서 쓰던 방보다 넓은걸. 다니엘에게 기별은 하지 않아도 되겠지? 카이든이 전달할 테니까.”

“아마도…… 그렇겠지만, 말씀을 전달하시면 더 반가워하실지도 모르지요.”

“음, 그냥 내가 왔고…… 기분이 좋아 보인다고, 다니엘을 만나면 기쁠 거라고만 전해 줘.”

“……예, 알겠어요. 그런데 왕녀님, 몸은…….”

그녀의 시선이 아셰의 납작한 배로 향했다. 아셰가 빠르게 그녀의 말을 끊었다.

“할 말이 너무 많아. 정말 미친 듯이 많아. 게다가 나는 이제 남자를 어떻게 받아들이는지 아는 몸이 되었거든. 너와 이야기하고 싶어 입이 정말 근질거렸단다.”

“……예?”

당황한 리젠의 말을 끊으며 아셰가 작게 웃고는 목소리를 낮췄다.

“조금 천박한 이야기일 수도 있지만…… 아, 그래. 아메탄의 왕녀가 리스에서 추잡해졌다는 소문이 돌면 안 되지. 혹시 여기 도청 마법 걸려 있니? 내가 마법을 잘 못해서…… 파악이 안 되네?”

“도청 마법은 안 걸려 있지만…… 그래도 찝찝하시다면 제가 방음 마법을 칠게요. 옆방에서 들릴 수도 있으니까요.”

리젠이 아무런 의심도 없이 온 방에 방음 마법을 꼼꼼하게 치기 시작했다. 아셰는 도청 마법을 감지할 정도로는 마력의 흐름을 읽을 수 있었지만, 리젠이 벽을 돌아다니면서 훌륭한 마법 실력으로 방음 마법을 치고 나자 그녀를 꼭 끌어안았다. 아셰는 벽에 커다랗게 난 창문 밖으로 리젠의 얼굴이 보이도록, 그리고 자신의 얼굴은 보이지 않도록 몸을 틀었다.

“리젠, 정말 보고 싶었어. 너무 그리웠어.”

리젠도 그녀를 꼭 안으며 웃었다.

“저도요, 왕녀님. 정말 너무 보고 싶었어요.”

아셰는 그녀를 놓지 않은 채로, 목소리를 낮춰 전혀 다른 어조로 말했다.

“……리젠, 계속 웃고 있어. 표정을 변화시키지 마.”

그녀를 안은 리젠의 몸이 흠칫하는 것이 느껴졌다. 아셰는 그녀의 허리를 더 꼭 끌어안으며 차가운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넌 내 친구고, 내게 도움이 될 만한 것들은 모두 한다고 이미 약속했어. 맞아?”

“네, 왕녀님. 당연하지요.”

아셰의 낮고 빠른 말에 대답하는 리젠의 목소리는 밝고 온화했다. 역시 영리한 리젠은 아셰가 혹시나 창 밖에서 누군가의 추적을 받고 있을까 봐 온 신경을 쓰고 있다는 걸 눈치챈 듯했다.

“마지막에 네가 말했던 대로, 내게 조금이라도 미안하다면, 약속해. 내 부탁을 들어줘. 네가 말했던 친구의 약속을 지켜. 최선을 다해 노력하겠다고, 네 온갖 능력을 모두 다 끌어내겠다고 말해.”

“왕녀님, 다시 뵙게 되어 얼마나 좋은지 몰라요. 갖고 싶은 것이나 알고 싶은 것이 있다면 뭐든 말씀하세요. 제가 아메니티에서 베풀 수 있는 것은 무엇이든!”

아셰의 눈에 눈물이 고였다. 이 영리하고 충실한 친구는, 아셰가 수사국의 눈을 속이려고 한다는 걸 알고 자신의 방식으로 연기를 하고 있었다. 협박 아닌 협박을 받고 있으면서도, 밝고 명랑한 목소리에 포근한 표정을 담아서.

“내 아이가 죽었어. 아메탄에서 친구가 왔다고 하여 항구에 나가 보니, 괴한 둘이 나를 붙잡고 시약을 먹였어. 대체 누가 내 아이를 죽였는지 나는 알아야겠어.”

“……제 결혼식 때 가장 값진 보석을 선물로 주시고, 제 첫사랑을 이루어 주기 위해 진심으로 저를 예쁘게 꾸며 주셨던 나의 유일한 친구인 왕녀님……. 부디 당신의 인생에 슬픔이란 없기를…….”

그녀를 안고 있던 리젠의 팔이 부들부들 떨렸다. 아이를 잃은 여자의 처연한 슬픔이 그대로 전해졌기 때문이었다. 아셰가 끊임없이 말을 이었다.

“네 남편, 카이든을 통해서 반드시 알아 와. 카이든은 수사국의 인재이고, 다니엘과 가장 가까운 친구이니 아메탄 왕국, 아니 대륙에서 일어난 모든 일을 알 수 있을 거야.”

[다음 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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