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6화 (205/256)

  

46화.

“켄이 널 보는 눈빛을 내가 모를 거라고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 그놈은 표정을 숨길 수 있을 정도로 영악하지 못해.”

“숙부님, 저는…….”

“켄 만한 남자를 찾는 것은 힘들어. 네 아이는 이미 없지만, 그 아이를 정말 자기 친자식처럼 키웠을 놈이다. 대륙 어디를 가도 저만큼 좋은 남자는 없을 거야. 물론 네가 지금 남자를 원할 시기가 아니라는 건 이해한다.”

아셰는 고개를 떨군 채, 에곤의 손을 더운 수건으로 닦아 주었다.

“조금만 더 빠르게 그 애를 양자로 들였다면…… 삶에 여한이 아무것도 없었을 거야. 네가 셈을 잘하니 켄의 짝으로 걱정이 없고, 나는 손주를 볼 수 있을까 하며 즐거워했겠지. 그러나 너희에게는 건널 수 없는 깊은 강이 생긴 셈이야. 호적상으로 너는 그 애의 어머니고, 그건 어떻게 할 수 없는 일이지. 다른 누구도 아닌 아메탄의 왕족이 그걸 받아들일 수 없다는 걸 안다.”

“…….”

“다시 말하지만, 나는 있지도 않은 아이를 열망하면서…….”

에곤은 따뜻한 물로 입술을 축이면서 힘겹게 말을 이었다.

“지금 내게 가장 소중한 아들, 켄에게 씻을 수 없는 괴로움을 주었다. 그깟 핏줄이 뭐라고, 그 어리석은 욕심으로 켄은 너를 원할 때마다 평생을 고통스러워할 거야. 아셰, 너는…….”

그가 눈을 감고 침대에 가만히 몸을 기대며 중얼거렸다.

“……앞만 보고 가거라. 지금 네게 소중한 사람만을 생각해. 3개월도 품지 않은, 이미 사라진 아이 때문에 지금의 행복을 놓치지 마라. 다 살아 보고 나니 알게 된 것들이구나. 아이들은 본디 약해. 캐넌의 사람들 중 아이 한둘을 잃어 보지 않은 사람이 없다. 그저 그렇게 생각하고 네 인생을 살아.”

아셰의 눈물이 다시 뺨을 타고 흘렀다. 참으로, 참으로 캐넌 영지의 주인다운 말이었다. 아름다운 바다와, 순진한 얼굴로 풀을 뜯는 소들, 바닷가에서 하루에 몇 개씩이나 새로운 놀이를 만들어 내는 아이들…….

그리고 아셰는…… 캐넌 영지의 사람이 아니었다.

* * *

“아메니티에는…… 널 가만두고 싶어 하지 않는 사람들이 있다며. 다시는 안 갈 곳처럼 말하더니, 정말로 갈 거야?”

“몰래, 아주 조용히 친한 친구만 보고 올 거야.”

태자를 죽였으며 그 대가로 먼 공국으로 쫓겨난 그녀가 당당히 아메니티의 땅을 밟을 수 있을 리 없었다. 로즈리와 그녀의 가문에게 있어서 아셰는 원수와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므로 공식적인 방문은 처음부터 할 생각이 없었다. 물론 리젠의 남편, 카이든이 다니엘에게 자신의 방문을 분명히 보고할 것이기 때문에 그녀는 당연히 다니엘까지 만날 상황을 예상하고 있었다. 켄은 걱정스러움을 숨기지 못하며 한숨을 쉬었다.

“……가면 좀 나아지겠어?”

“약속할게.”

아셰는 파리하게 웃으며 작은 항구에서 망토를 두르고 차분히 말했다. 이제 꽤 쌀쌀해진 날씨는 해가 떴는데도 망토를 벗을 수 없을 만큼 서늘했다. 켄은 영 내키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아셰를 바라보았다.

“일주일 안에 올게. 진짜야. 가서, 숙부님의 기침약이라도 받아 올게. 리스 공국보다 아메탄의 시약들이 거짓말 안 하고, 열 배는 좋아.”

켄은 가만히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켄의 말을 듣고 수프를 입에 대기 시작한 지 3일 만에 아메탄 왕국에 잠시 가 보겠다며 배를 빌려 달라고 요구했다. 종종 그녀가 말했던 약제국의 친구를 보러 가야겠다는 것이었다.

아셰는 짐짓 더 밝은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거기엔 몸을 덥히는 마법 아이템도 꽤 있고, 열을 내는 시약도 있어. 리젠은 아마 선물을 한 아름 안겨 줄 거야. 아, 만일 오빠를 만나게 되면, 곡물이라도 더 달라고 징징거려 볼게. 식량은 많으면 많을수록 좋은 거잖아? 언제 제국이 또 요구할지 모르는데.”

“……나는…….”

그가 한숨을 쉬며 말했다.

“네가 몸은 좀 회복하고 갔으면 좋겠어. 그 일이 있고 나서 얼마 지나지도 않았잖아.”

“내 몸은 멀쩡해. 진짜야.”

아셰는 걱정 어린 그의 얼굴을 올려다보며 힘주어 말했다. 아드와 시약은 예전에 올리타가 말했던 대로 그저 그녀의 몸을 예전으로 되돌렸을 뿐이었다. 그녀의 건강한 위장은 음식이 들어가니 무리 없이 소화를 해내고 순식간에 몸을 회복시켰다. 억지로 정신을 차리자마자 기다렸다는 듯이 회복된 몸에 아셰는 자기 자신이 쓸쓸할 지경이었다.

“켄, 너와 아무리 가까워졌다 해도 내게는 몇 년간을 친하게 지낸 친구가 있어. 이곳이 아무리 아름답고 평화로워도, 나는 오랫동안 아메탄 왕국에서 지냈어. 아직은 정말 힘들 때에 오랜 친구의 위로가 필요해.”

“…….”

“말했지만, 아메니티에 있는 리젠 하카트의 집에 머물 거야. 이곳 서신은 끔찍하게 느리지만 급한 일이 있으면 그쪽으로 연락해 줘. 금방 올게.”

아셰는 그를 한 번 꼭 끌어안고, 작은 배에 종종걸음으로 올라탔다. 3일 동안 곡기를 끊었던 것이 무색할 정도로, 아셰는 자리에서 일어나자 창고의 재고 정리를 모두 셈해 놓고 야무지게 그동안 모아 두었던 풀들까지 정리했다.

이곳에 있으면 슬픔이 너무 커서 극복하기 힘드니, 기분 전환으로라도 친구를 보러 가야겠다는데 켄이 그녀를 말릴 명분은 전혀 없었다. 그러나 켄은 멀어지는 배를 보며 이상한 불안감에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아무리 푸른 리본으로 짧은 머리를 높게 묶고, 리스 공국의 전통 의상인 허리에 커다란 붉은 벨벳 천을 댄 흰색 원피스를 입어도 그녀는 마을 여자들 중 독보적으로 빛났다.

그녀를 태운 배가 멀어져 보이지 않게 되자, 그는 그길로 뛰어서 화살 통과 활을 집어 들고 한때 그녀와 사냥을 나갔던 산을 급하게 올랐다. 떠도는 잡념이 그를 잠식하여 괴로움에 미칠 것 같았다. 혹시라도 그녀가 위험해질까 봐, 원래 사냥을 나서는 입구까지도 그녀를 안내하지 않았다. 그녀와 샌드위치를 나누어 먹던 동굴까지 단숨에 오른 그가 소리를 질렀다.

“으아아아아아!”

그의 포효 때문에 동굴 깊숙한 곳에 잠들어 있던 박쥐 떼가 후드득 날았다. 그가 머리를 감싸고 또 한 번 괴로운 소리를 뱉어 냈다.

“아아아아아!”

마치 짐승이 우는 것 같은 커다란 소리였다. 그는 아셰를 바라볼 때마다 갑갑해서 참을 수 없는 속을 어쩌지 못해 항상 이토록 소리를 지르고 싶었다. 목이 쉬도록 소리를 지른 그가 날렵하게 바위를 타 활시위를 당겼다. 참새 하나가 맞고 그대로 떨어졌다.

긴 금발 머리채를 빛내며 그의 짝인 줄 알고 키득거리던 사람들 속에서 자신은 영주님의 부인이라고 말하던 그 차분한 목소리. 버터 상자라도 들겠다며 고급스러운 실크 소매를 걷어붙이던 하얗고 뽀얀 손.

화살 하나가 더 길게 날았다. 저 멀리 짐승이 꽥 하고 우는 소리가 들렸다.

토끼같이 마을을 뛰어다니며 온갖 사람들을 제 편으로 만들고, 마치 오랫동안 캐넌에 속해 있었던 것처럼 전통 의상에 천 가방을 들고 산을 오를 때 높게 묶은 머리카락 밑으로 보이던 흰 목덜미. 습관처럼 쓰다듬던 아직 납작한 배와 조심스럽게 ‘아가’라고 속삭이던 목소리. 그는 정말로 그 아이를 자신의 아이처럼 키울 셈이었다. 아셰와 셋이 함께 언덕을 오르고, 수영을 가르치며, 아이가 열 살이 되면 당나귀를 한 마리 사 줄 생각이었다.

화살이 또 하나 날았다. 이번에도 참새 한 마리가 툭 하고 숲속 어딘가로 떨어졌다.

그녀를 좋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어떻게 그녀를 눈에 담지 않을 수 있단 말인가. 밝고 명랑하며 특유의 아름다움으로 사람들을 무장해제 시키곤 했다. 음모와 정치질이 난무하는 왕궁에서 벗어났다는 해방감이 그녀 주위의 공기에 항상 감돌았다. 시골구석에서 제 처지를 슬퍼할 만도 한데, 이 캐넌 영지의 모든 것을 감사하는 눈빛으로 바라보는 그녀가 사랑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화살은 또 정처 없이 어느 생명을 하나 거두었다. 사냥은 늘 영지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평온한 일상을 이어 가던 청년이 알고 있는 단 하나의 고독한 행위였다. 그는 그 누구와도 소통할 수 없는 갑갑함을 어쩌지 못해 활시위를 다시 당겼다.

……그녀는 호적상으로 그의 어머니였다. 아셰의 마음이 돌아서 그를 사랑한다고 해도 평생 떳떳한 관계로 살 수 없다. 그러나 그녀가 성에 남아 있는 한 켄은 그녀를 원하고 원할 수밖에 없었다. 에곤이 숨이라도 거두게 되면, 영지 성에 단둘이 남은 젊은 남녀를 두고 사람들은 뭐라고 수군거릴까. 그러나 다른 여자를 들일 수도 없었다. 그것은 그 여자와 그에게 모두 상처가 되는 일이었다.

모든 화살이 하늘을 날자, 그는 힘없이 활을 툭, 하고 동굴 입구의 바닥에 떨어트렸다.

그리고…… 그녀가 한 번도 말하지 않았던 그 아이의 아버지……. 켄은 털썩 주저앉아 머리를 감싸 쥐었다.

그녀는 가끔 그 내면을 도저히 짐작할 수 없는 쓸쓸한 표정으로 밤하늘을 멍하니 응시하곤 했다. 그 방향은 항상 같았기에 켄은 문득문득 그녀의 시선이 캐넌 밖을 향한 것 같아 불안했다. 위험한 인물이 분명한 그는 대체 어떤 사람일까. 아메탄의 귀족? 혹은 왕족에게 붙는다는 호위 무사? 감금당한 왕녀가 어떻게 임신을 했는지 그는 추론조차 할 수 없었다. 그녀는 무의식적으로 검지에 늘 끼워진 반지를 매만졌으며, 켄은 한 번도 묻지 않았지만 그것이 그녀에게 남은 징표와 비슷하다는 생각을 했다.

아직 그녀는 그를 사랑하는 걸까……. 그래서 자신에게 줄 마음이 없는 것일까……. 그는 벌건 노을이 산기슭에 스며들 때까지 꼼짝하지도 않고 앉아 멀리 보이는 푸른 바다를 응시했다.

* * *

이단은 빠르게 성곽의 계단을 내려가다가, 급히 자신을 찾는 사브르를 발견하고 미간을 찌푸렸다. 그를 마주하자마자 사브르가 헉헉대며 말했다.

“총독님.”

“……무슨 일이야?”

그는 당장 오늘 밤, 히치 해협을 통해 리스 공국으로 들어가 캐넌 영지로 잠입할 계획이었다. 몇몇 장군들에게는 이틀간 머리를 식힐 수 있는 휴가를 달라고 미리 공언해 둔 차였고, 그의 행선지는 사브르만이 알았다. 배를 준비하고 있어야 할 사브르가 그를 찾자 이단은 무언가 일이 잘못되었음을 알았다.

“아셰 왕녀님이 오늘 아침, 아메탄 왕국으로 떠났다고 합니다.”

“……뭐? 왜?”

“친구인 리젠 하카트 양의 집을 방문한다고 하던데요.”

“하, 이 여자는 진짜…….”

[다음 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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