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5화.
“좀 먹어. 먹어야 해.”
“괜찮아.”
아셰는 퀭한 눈으로, 켄이 내민 스푼에서 고개를 돌렸다. 켄은 한숨을 쉬며 수프 접시를 내려놓고, 그녀의 손을 붙잡았다.
“아셰, 네 몸은 지금 멀쩡해. 아이만 사라졌을 뿐이지, 음식이 필요하고 운동이 필요해. 제발 몸 좀 추슬러.”
“……맞아.”
그녀가 기운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이만…… 아이만 사라졌을 뿐이지…….”
그녀의 얼굴에 생기가 돌아오지 않았다. 3일을 꼬박 음식을 입에 대지 않은 그녀는 눈에 띄게 수척해져 있었다. 울다가 눈물이 말라붙으면 쓰러져 잠이 들고, 또 부스스 눈을 떠서 울다가 쓰러지는 일의 반복이었다. 켄은 그 시간 내내 마을 일도 돌보지 않고 아셰의 곁을 지켰다.
“아셰, 제발…… 산 사람은 살아야 할 것 아냐.”
“…….”
무릎에 놓여 있던 따뜻한 수프 그릇에 아셰의 눈물이 후두둑 떨어졌다. 켄은 한숨을 쉬며 수프 그릇을 치우고, 그녀를 조심스럽게 안아 주었다. 그녀가 반항하지 않은 채로 멍하니 중얼거렸다.
“……누굴까.”
“아셰.”
“대체 누가…… 왜……. 어째서 내 아이를…….”
그녀는 3일 내내 그 생각만 했다. 대체 누가 그녀의 아이를 억지로 지웠을까. 심지어 그들은 그녀를 죽이지도 않았다. 그들은 그녀를 항구 모래 바닥에 던지고 그대로 전속력으로 그곳을 떠났다. 정말로 그녀의 아이만 죽인 뒤 도주한 셈이다. 어쩌면 그녀를 죽이는 것이 가장 깔끔했을 텐데, 어차피 그 빠른 배를 쫓아올 만한 능력이 안 되는 영지에 왔으면서 왜 자신을 살렸는지 그녀는 이해할 수 없었다.
제일 먼저 생각난 것은 제국의 황제였다. 혹시나 황제가 알아챈 것 아닐까. 그렇다면 이단의 씨를 당연히 없애고 싶어 할 것이다. 그러나 만일 황제라면, 아이만 없애는 것이 아니라 그녀를 바다에 그대로 처넣지 이렇게 살려 두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 다음은 어이없게도 다니엘이었다. 어쨌든 아메탄에서 왔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아메탄에서 왔다면 ‘아가씨’라고 칭할 게 아니라 정확히 리젠 하카트의 이름을 댔을 가능성이 컸다. 게다가 마법으로 그녀를 제압하지 않았다는 점도 뭔가 이상했다. 다니엘이 수사국의 사람을 보냈다면 이렇게 원시적인 방법보다 훨씬 더 깔끔하게 처리했을 것이다. 그녀는 수사국의 사람들이 마력을 몸으로 사용하면서 얼마나 민첩하게 움직이는지 알고 있었다.
게다가 다니엘은…… 이미 아메탄의 왕궁에서, 이 아이를 죽이려면 언제든지 죽일 수 있었다. 올리타에게 몇 마디 명령만 했다면 이미 모두 끝났을 일이었다. 아셰는 어쨌든 다니엘이 자신에게 보였던 다정함을 믿고 싶었다.
그 외에는 도저히 생각나는 사람들이 없었다. 사실 자신이 임신했다는 사실을 누가 어디까지 알고 있는지도 알 수 없었으며, 캐넌은 너무 외진 곳이라 더 이상 캐낼 수 있는 것도 없었다. 모래 바닥에 쓰러진 그녀를 업고 미친 듯이 달렸다는 켄의 눈이 걱정으로 가득 차 있었다.
“아셰, 제발.”
그가 그녀의 어깨를 잡고 간절하게 말했다.
“받아들여. 어떻게 해도 아이는 돌아오지 않아.”
“……그렇지.”
아셰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의 눈에 초점이 없었다. 켄은 그녀의 파리한 볼을 두 손으로 감쌌다.
“제발 받아들여……. 뭣 좀 먹어. 슬픔은 이해하지만, 그래도 넌 살아야 할 것 아냐.”
손질하지 못한 머리카락은 엉겨 붙어 있었으며, 뺨에는 눈물 자국이 그대로 남아 있었다. 그녀가 미친 사람처럼 중얼거렸다.
“……내 아이를…… 내가 지키지 못했어……. 그러기 위해 대륙의 끝에서 끝까지 왔는데…… 결국엔 못 지켰어…….”
“넌 최선을 다했어. 아셰, 이만 보내 줘. 그 아이도 네가 이러는 걸 원하지 않을 거야.”
세 달도 채 품지 못한 아이였다. 그녀의 눈에 다시 눈물이 고이자, 켄은 그녀의 눈물을 닦아 주며 그녀의 머리카락을 쓸었다.
“아셰.”
“…….”
“다시 아이를 갖고 싶으면…… 내가 다시 갖게 해 줄게.”
그녀가 슬픈 눈으로 그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시간이 아주 많이 흘러, 네가 괜찮아지면…… 그리고 또다시 아이를 갖고 싶어지면…… 내가 언제든 네 아이를 갖게 해 줄게.”
“……말이 되는 소리를 해.”
그녀는 냉정하게 대답했다.
“숙부님이 돌아가시면 너는 이곳의 영주가 되고 나는 미망인이 돼. 그런데 너와 내가 아이를 가진다고? 그런 끔찍한 소리를 어떻게 할 수 있어?”
핏기가 없는 입술에서 어조의 변화가 없는 말이 이어졌다.
“이곳은 평화롭고 아름다운 영지야. 나는 너와 그런 지저분하고, 떳떳하지 못한 역사를 쓰고 싶지 않아. 그럴 만큼 너를 사랑하지도 않고.”
“나는 그럴 만큼 너를 사랑해.”
켄은 그녀의 얼굴에 대고 변함없는 표정으로 속삭였다.
“남들이 수군대는 건 상관없어. 이 성에 너와 나만 남는다고 해도 괜찮아. 이곳은 외부인이 오지 않는 외지고 작은 곳, 수도에 보관되는 종이 몇 장 따위 무슨 상관이야.”
“켄, 제발…….”
“지금 당장 나를 보라는 건 아니야. 물론 네게 그런 선택을 강요하는 건 아니지만…….”
그녀는 영혼이 없는 표정으로 그저 그의 말을 흘려듣고 있을 뿐이었다. 아셰는 마치 정신을 놓은 것처럼 허공만 바라보고 있었다. 예전에 마치 강아지처럼 뛰놀던 그녀의 생기발랄한 표정을 다시는 볼 수 없을 것같이 다른 사람처럼 변한 아셰를 가만히 바라보다가, 충동적으로 켄은 그녀의 입술에 자신의 입술을 가져다 대었다.
아셰는 반항할 기운조차 없는지 가만히 숨을 내쉬고 있을 뿐이었다. 켄은 그녀의 뻣뻣하게 굳은 몸을 안고 마른 입술 사이로 자신의 떨리는 숨결을 전해 보았지만, 아셰는 미동도 하지 않은 채 체념한 얼굴로 허공을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그가 입술을 떨어트리지 않은 채로 참담하게 말했다.
“제발 정신 차려…….”
그가 그녀의 어깨를 감싸고 침대 맡으로 그녀를 밀어붙였지만 그녀의 몸에는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켄은 그녀의 시체 같은 얼굴을 보며 안타깝게 말했다.
“아이는 또 가지면 돼. 네가 계속 이렇게 굶어 죽을 것처럼 아무것도 입에 대지 않으면, 억지로라도 네 몸에 내 씨를 심어서 뭐라도 먹게 할 거야.”
“……이러지 마.”
그녀는 고개를 저으며 다시 울기 시작했다. 켄은 그녀의 다시 흐르기 시작한 눈물을 닦아 주고는, 답답하다는 듯이 그녀를 끌어안았다.
“겁나. 네가 이렇게 모든 걸 놓아 버리고 죽을 것 같아 겁난단 말이야.”
그녀는 종잇장처럼 힘없이 축 늘어졌다.
“그 아이……. 위험한 사람의 아이지?”
“…….”
“그렇지 않다면, 네가 그토록 아이의 아버지를 숨기고, 이상한 사람들이 이 외지까지 찾아와 그 아이를 없앨 리 없어.”
“…….”
아셰는 힘없이 시선을 떨궜다.
“아셰, 이제 아메탄을 잊어. 이걸로 다 됐어.”
켄은 그녀를 끌어안으며 속삭였다.
“그냥 이곳에서 마음 편히 살아. 아메탄과, 그 지긋지긋하고 위험한 핏줄은 끝내. 네가 말한 대로, 위험하고, 비밀이 많고, 조심해야 하는 것들은 이제 다 사라졌어. 이곳에서 평화롭게 살자, 제발.”
그녀의 몸이 바르르 떨렸다. 날이 어느새 추워진 것 같았다. 그는 그녀의 몸에 담요를 둘러 주고, 다시 수프를 담은 스푼을 그녀의 입에 갖다 대었다.
“일단…… 먹어, 아셰. 날 봐서라도 좀 먹어. 난 지금 3일간 마을에 내려가 보지도 못했어.”
그 말에, 아셰의 입이 조금 벌어졌다. 그녀의 아이를 없앤 것은 캐넌 영지의 사람들이 아니다. 그녀의 슬픔 때문에 켄의 발을 묶어 둘 수는 없었다. 그녀의 슬픔을 받아 낼 사람이 있다면 이곳의 사람이 아니었다.
아이만 사라졌을 뿐, 아셰의 몸은 전혀 건강에 지장이 없었다. 마치 예전에 홑몸이었을 때처럼 가뿐하기까지 했다. 그녀는 곡기를 다시 입에 대기 시작한 순간부터 다시 꾸역꾸역 무언가를 챙겨 먹기 시작했고, 눈물을 닦고 일어나 성의 창고에 있는 재고를 파악하여 기록하기 시작했으며, 급격히 몸이 안 좋아지기 시작한 에곤의 곁에서 책을 읽어 주기도 했다. 에곤은 흐릿한 눈을 들어 그녀에게 말했다.
“네게 일어난…… 일들은, 슬프지만 지나간 일들이야.”
“…….”
“아이를 보내 주렴. 네 눈에 복수심이 일렁거리는구나.”
에곤은 후, 하고 깊은 숨을 내쉬었다.
“이 나이가 들도록 살다 보니, 보내는 것을 제때 하지 못해 놓친 것들에 대한 후회만이 남을 뿐이야.”
그가 쿨럭이며 힘든 기침을 이어 갔다. 그녀는 따뜻한 물을 급히 건네며 노인의 얼굴에 깊게 새겨진 주름을 안쓰럽게 바라보았다.
“샤틴……. 네 어미 샤틴…… 그 밝고 명랑하던 아이가 그렇게 변했을 줄 알았더라면…… 기쁘게 그 아이의 대부가 되어 줬을 텐데.”
아셰는 고개를 푹 숙였다. 이곳에 와서 샤틴에게 잘 도착했다는 서신을 하나 보냈을 뿐, 서로 연락을 하지 않았다. 그동안 샤틴은 그녀에게 좋은 엄마보다는 포악하고 감정적인 지긋지긋한 짐과 같았다. 그러나 아셰는 이곳에서 밝게 뛰어놀았을 샤틴을 생각하면 이상하게 마음 깊은 곳이 저릿해졌다.
“나는 오랫동안 자식을 보지 못했고, 자식이 없는 채 누군가의 대부가 된다는 것이 마치 조롱처럼 느껴졌어. 나 혼자만의 조바심이었던 셈이지. 그 조바심에 눈이 멀어 소중히 할 수 있는 것들을 모두 놓쳐 버렸다. 켄, 나의 불쌍한 켄…… 그 애가 스무 살이 되도록 나는 양자로 거두지 않았어. 지긋지긋한 욕심이지. 남들은 내가 인자하고 훌륭한 영주라고 하지만…….”
“숙부님, 인자하고 훌륭한 영주 맞으세요.”
“……아니야. 나는 있지도 않은 내 아이를 욕망하느라, 정말 나를 기쁘게 하고 곁에 있어 주었던 사람들을 오랫동안 기다리게 했다. 내가 샤틴의 대부가 되어 줬다면, 그 애의 아비가 죽고 아메탄 왕국으로 그렇게 끌려가듯 가지는 않았을 거야. 적어도 그 외로운 곳으로 혼자 보내지 않고, 리스 공국에 남아 있게는 했을 텐데. 하지만 그 애의 대부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지……. 그리고 켄, 켄을 조금 더 빨리 양자로 들였더라면 더 훌륭하게 키웠을 거다.”
“켄은 충분히 훌륭해요.”
“어린 시절, 수도에 가서 공부라도 더 시킬 수 있었겠지. 그 애의 셈은 형편없어.”
“그래도 켄은 제가 본 영주들 중 가장 훌륭해요. 영주민들을 진심으로 아끼고, 자연스럽게 녹아들어 공정한 권위를 얻고, 생각이 건강하며 멀리 볼 줄 알아요.”
“……켄을 조금 더 빠르게 양자로 들였더라면…… 그 허가증을 조금만 더 빠르게 수도에 보냈더라면…….”
에곤이 쿨럭거리며 말을 이었다.
“너와 이어 줄 수 있었겠지.”
“…….”
[다음 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