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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4화 (203/256)

  

44화.

그는 정말로 내려가는 길에 암사슴을 한 마리 활로 쏘아 죽였다. 아셰는 복잡한 눈으로 사슴을 어깨에 메고 산을 내려가는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허가장만 조금 일찍 나왔다면, 그녀는 그와 결혼할 수도 있었다……. 아주 옛날에, 이런 삶을 꿈꾸었던 시절이 분명히 있었다.

자유가 있고, 마음껏 약초를 캘 수 있으며, 그녀에게 친절한 새로운 가족들, 그리고 젊고 잘생긴 남편. 그 모든 것에 사랑 같은 건 넣어 두지 않았다. 한때 그녀가 그토록 원했던 삶이 이 시기에 이런 방식으로 주어진다는 것은 참으로 역설적인 일이었다. 키가 훤칠하고, 짧은 갈색 머리에 순둥한 초록색 눈매를 가진 건강하고 순진한 청년은 그녀의 아이를 분명 아껴 줄 것이다. 어쩌면 아이를 원치 않는다는 이단보다 훨씬 더.

‘말해 줘.’

그의 끈적하고 낮았던 목소리가 귓가에 다시 울리는 것 같았다.

‘널 데려가라고. 함께 가자고.’

온몸에 오르던 열기와 통증이 다시 떠올라 그녀는 초조하게 검지에 낀 반지를 매만졌다.

‘말해.’

그때 그를 따라 떠났으면, 지금보다 편안하고 행복할 수 있었을까.

“마을에 잠시 들렀다 가자. 에소트에게 가죽을 맡기고, 고기를 무두질 값으로 줘야겠어. 식량은 성에 충분하지만, 가죽은 최대한 많이 가지고 있어야 해. 아이가 감기라도 걸리면…….”

아직 태어나지도 않은 아이를 걱정하는 켄의 목소리에 아셰가 밝게 대답했다.

“좋아. 나도 의상실에 들러 조금 큰 옷을 맞추려고 했어. 배가 나오면 입으려고.”

5. 첫눈이 내리던 바다

마을에 들어선 그들은 각자 흩어졌다. 켄은 어깨에 사슴을 얹고 무두질을 마을에서 가장 잘한다고 소문난 에소트에게 향했다. 무거운 사슴을 들고 마을에 나타난 켄을 마을 처녀들이 흠모의 눈길로 바라보며 자기들끼리 까르르거렸다. 아셰는 풀로 가득 찬 천 가방을 들고 의상실로 가서 새로운 치마와 원피스를 하나 주문한 뒤, 켄과 다시 보기로 한 약속 시간이 한참 남아 정처 없이 마을을 떠돌고 있었다.

“작은 마님!”

씩씩하게 마을을 걷던 그녀에게 양 갈래 머리를 한 여자애 하나가 달려왔다. 마을 어귀에 있는 빵집의 딸 세라였다.

“항구에서 누가 작은 마님을 찾아요! 아메탄 왕국에서 온 친구라던데요?”

“응?”

아셰는 깜짝 놀라 눈을 크게 떴다. 아무런 기별도 받은 바가 없었다. 그녀는 고개를 갸웃하며 발걸음을 돌렸다.

“혹시 여자였니?”

“잘 모르겠어요. 제게 심부름을 시킨 사람은 남자였는데, 배 안에 누가 있는지는 보지 못했어요. 소영주님이 성에 없어서 허가 없이 외국인을 들이지 못해, 카토 아저씨가 항구에 일단 계속 머무르게 했어요.”

세라가 심부름값으로 받은 동전을 보여 주었다. 확실히 아메탄의 화폐였다. 그녀를 찾아올 친구라면 리젠뿐이었다. 미리 왜 서신을 하지 않았나 싶었지만, 리스 공국의 행정은 양자 허가증도 몇 년이 걸릴 만큼 느리고 엉망진창이었기 때문에 서신이 어느 중간에 막혀 있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침 켄과의 약속 시간도 꽤 많이 남았겠다, 그녀는 세라의 머리를 한번 쓰다듬고 캐넌에 유일하게 하나 있는 항구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처음의 종종걸음이 점차 뜀박질로 변했다. 그녀는 여기서 행복하고 편안하게 살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아메탄의 동전을 본 순간부터 마음속에 울컥거리는 그리움이 출렁이기 시작했다.

화려하고 아름다운 아메니티, 온갖 마법구로 반짝이는 아메탄의 왕궁, 그녀의 몸 상태를 하나하나 확인하고 원하는 것을 가져다주던 시녀들, 그녀와 똑같은 금발 머리에 파란 눈을 지닌 다니엘, 그리고…… 유일한 친구 리젠 하카트. 아마 정말로 리젠이 휴가를 받아 이곳에 왔다면, 몇 날 며칠이고 밤을 새워 이야기할 수 있을 것이다. 마지막에 카이든에게 모든 진실을 들으라고 권유했으니, 리젠은 자신이 임신한 것을 알고 왔을 것이다. 여기서 자신이 얼마나 편안하게 지내고 있는지 말해 주면 리젠을 괴롭히던 그 죄책감도 누그러들 것이다. 그녀의 마음이 설렘으로 가득 찼다.

그녀는 달려가다가, 에소트를 도와 사슴의 다리를 고정하고 있던 켄과 마주쳤다.

“아셰, 어디 가?”

“항구!”

그녀가 깔깔거리며 웃었다.

“이따 다시 올게. 아메탄에서 손님이 온 것 같아.”

켄은 그녀의 밝은 웃음을 보고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허가를 내려야 하니 자신도 곧 항구로 향하겠다는 경쾌한 대답이 아셰의 등 뒤에 부드럽게 울렸다. 그녀가 한참을 뛰어 언덕을 내려가니, 과연 작은 항구에는 작은 배 한 척이 흔들리고 있었다. 그녀는 검은 옷을 입은 뱃사람이 담배를 씹으며 그녀를 보고 일어서는 것을 확인했다. 그녀는 본능적으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10대 초반 아이들 무리가 항구 근처에서 뛰어놀고 있었고, 시야가 닿는 곳에 낚싯대를 기울인 노인 두 명이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아메탄에서 오셨다고요? 누구죠?”

그녀는 원피스 자락을 잡고 낯선 뱃사람에게 다가가 반갑게 말했다.

“아, 아가씨께서는 뱃멀미가 심하셔서 배 안에 누워 계십니다. 불러오겠습니다. 부축이 필요할지도 모르는데, 같이 가시겠습니까?”

“네! 잠시만요.”

아가씨라는 말에 리젠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하지만 늘 의심하며 살아온 왕족답게, 아셰는 아이들 중 하나에게, 100을 셀 때까지 자신이 저 배에서 나오지 않으면 무조건 뛰어 에소트의 집에 있는 켄에게 알리라는 지시를 해 두고 배 안에 올라 선실로 향했다. 여차하면 소리를 질렀을 때 달려올 아이들의 위치까지 눈으로 확인한 후였다. 그들은 모두 아셰를 알고 있었고, 그녀의 지시에 따를 그녀의 영주민들이었다.

“리젠? 리젠이야?”

그녀가 이불을 뒤집어쓰고 선실에 누워 있는 한 인영을 향해 한 발짝 내딛었을 때, 갑자기 뒤에서 따라오던 뱃사공이 그녀의 몸을 꼼짝 못 하게 잡았다. 아셰는 그 즉시 소리를 질렀지만, 그와 동시에 이불을 뒤집어쓰고 있던 괴한이 튀어나와 그녀의 입에 그대로 유리병에 든 액체를 쏟아 넣었다.

“읍! 읍!”

그녀는 본능적으로 이 액체를 마시면 안 된다는 생각을 했으나 괴한이 입과 코를 막는 바람에 어쩔 수 없이 몇 모금 삼켜 버리고 말았다. 어차피 시간이 지나도록 자신이 나오지 않으면 켄이 올 것이다. 그녀는 겁이 나서 발버둥을 치면서도 최선을 다해 막힌 입으로 소리를 질렀다. 정체를 알 수 없는 시약이 꼴꼴거리며 그녀의 식도를 타고 넘어갔다.

“으으으읍! 읍!”

그녀가 거세게 반항하자, 괴한은 향낭을 하나 꺼내어 그녀의 코에 들이밀었다. 분홍색 연기가 퍼져 올랐다. 이건…… 수면을 유도하는 기체인데……. 불면에 익숙한 그녀는 이런 종류의 시약에 대해서 잘 알고 있었다. 굉장히 독한 기체라 올리타가 아주 가끔씩만 처방해 주었던 기억이 났다. 더 이상 생각할 틈도 없이, 아셰는 그대로 정신을 잃었다.

* * *

그녀가 눈을 떴을 땐 익숙한 침실이었다. 그녀가 벌떡 몸을 일으키자, 그녀의 곁을 지키고 있던 세 명의 남자가 깜짝 놀라 그녀를 다시 눕혔다. 아셰의 머리맡에는 걱정스런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고 있는 늙은 에곤, 복잡한 표정으로 앉아 있는 켄, 그리고 영지의 유일한 의원 리트와가 있었다. 리트와는 물을 따라서 그녀에게 건네며 떨리는 한숨을 쉬었다.

“몸은 좀 괜찮으십니까? 안 움직이는 곳은 없지요?”

아셰는 팔다리를 한 번 움직여 보고, 조심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머리가 살짝 어지럽긴 했지만 견딜 만한 수준이었다. 그녀의 흔들리는 눈빛이 리트와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리트와에게 임신했다는 이야기는 그동안 한 적이 없었다.

“정신을 차렸으니 되었습니다. 하룻밤 쉬시면 멀쩡해지실 겁니다.”

“어…….”

그녀는 걱정스러운 표정의 켄을 바라보며, 불안하게 배를 움켜쥐었다.

“아…… 아니지? 괜찮은…… 거지?”

자신이 이렇게 멀쩡하다면, 걱정할 것은 단 하나였다. 켄의 얼굴에 참담함이 스쳐 지나가는 것을 확인한 그녀가 리트와의 손목을 덥석 잡았다.

“아니죠? 아, 아이는 괜찮은 거죠? 이렇게 제가 멀쩡한데, 아이는…….”

“작은 마님이 드신 시약은…… 아드와 시약인 것 같은데, 아마도…….”

아셰의 머리가 핑 돌았다.

‘분부하시면, 아무도 모르게…… 아이를 제가…… 시약 몇 모금이면 됩니다. 왕녀님의 몸에 전혀 해가 가지 않아요.’

의료국의 올리타가 언젠가 그런 시약을 언급한 적이 있었다. 몇 모금이면 아이가 없어진다는, 자신의 몸에는 전혀 해가 가지 않는다는 그런 시약. 아셰의 얼굴을 바라보며 리트와는 어렵게 말을 이었다.

“……아이를…… 없애는…… 아, 아마…… 작은 마님이 더 잘 아실 겁니다. 부작용은 없고, 그저 옛 몸으로 돌아온 것뿐입니다.”

“아, 안 돼…… 안 돼요…….”

아셰의 볼에 눈물이 후두둑 떨어졌다. 켄과 에곤은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고, 그녀가 팔에 얼굴을 묻으며 오열하는 것을 바라보았다. 리트와는 이 모습을 바라보기 힘들다는 듯이, 에곤에게 한 번 목례를 한 뒤 방을 나갔다.

“이름도…… 이름도 붙여 주지 못 했어요…….”

그녀는 쉴 새 없이 흐느끼며 중얼거렸다.

“이제 막…… 편안한 옷을 주문하려던 참인데…….”

에곤도, 켄도 그녀를 위로할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배가 나오기 시작하면, 긴 겨울 내내 성에 틀어박혀서 바느질을 배우려고…… 내 비단옷들을 수선하여 아가 옷을 만들려고…….”

눈물이 멈추지 않았다. 에곤은 깊은 한숨을 쉬며 그녀의 등을 쓸어 주었다.

“어떻게 생겼는지도 모르고…… 품에 한 번 안아 보지도 못하고…….”

몸이 너무 멀쩡하여 더 슬픈 밤이었다. 그녀가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하고 짐승처럼 울부짖으며 이불에 얼굴을 묻었다. 피를 토하는 것 같은 괴로운 소리에 켄이 차마 바라보지 못하고 고개를 돌렸다.

[다음 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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