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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화 (202/256)

  

43화.

“예전에 아메탄 왕궁에 갇혀 있을 때에는, 내가 손을 내밀기만 하면 그녀가 올 것 같아 오히려 불안하지 않았는데…… 그곳에서 행복하다 하니 더 불안하군. 그녀는 그런 평화롭고 목가적인 삶을 어릴 적부터 꿈꿨어.”

“……총독님, 편지를…….”

“여우같은 여자라, 내게 속내를 다 드러내지 않았을 거야. 내가 그녀를 믿을 수 없다. 직접 눈을 보고, 살결을 마주 대고, 그 어떤 평화 속에 있더라도 내 곁에 오겠다고 약속을 받아 내야겠어. 사브르.”

그가 몸을 옆으로 틀어 사브르를 보고 싱긋 웃었다.

“……내가 아직은, 젊고…… 잘생겼겠지?”

“예에?”

사브르의 얼굴에 경악이 스쳐 지나갔다. 이단이 웃음을 터트리며 중얼거렸다.

“한시라도 젊을 때 가야겠군.”

“아, 아니…….”

“일주일 뒤에 작은 배와 믿을 만한 시종을 하나 마련해 줘, 사브르. 이틀 안에 다녀올게.”

* * *

“세상에!”

아셰가 어깨에 멘 커다란 천 가방에는 이미 처음 보는 풀들이 가득 차 있었다.

“책에서만 보던 것들이야. 차를 우려내면 향이 좋을 거야. 이곳 사람들은 차를 마시지 않지만…….”

“쉿.”

그녀가 뿌리를 살리려고 조심스럽게 흙을 파는데, 그녀의 뒤에서 켄이 활시위를 당겼다. 그녀가 고개를 돌리기도 전에 빠르게 화살이 두 개의 화살이 날았다.

“어머.”

사냥개가 뛰어가 각각 죽은 토끼를 두 마리 물어 왔다. 정확히 눈을 찌른 화살을 보며 아셰는 혀를 내둘렀다.

“눈을 맞춰야 가죽이 상하지 않아.”

켄은 감탄하는 그녀의 표정을 보며 뿌듯해 하는 것 같았다. 산에 온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벌써 토끼를 다섯 마리나 잡았다. 그가 화살을 뽑아내고, 가죽 가방에 토끼를 담으며 저 멀리 보이는 동굴을 손가락질했다.

“저기서 점심을 먹고 가자. 주방에서 샌드위치를 만들어 줬어.”

“좋아.”

“이제 토끼는 그만 잡아야겠다. 들고 갈 수가 없겠어. 사슴이나 한 마리 더 잡아 갔으면 좋겠는데…….”

“이렇게 사냥을 잘 하는데, 왜 산에 자주 안 와?”

켄은 힘겹게 바위를 딛는 그녀의 손을 잡아 주며 씩 웃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자주 왔어. 겨울이 오기 전에 최대한 많은 식량을 확보해야 했거든. 그렇지만 이젠 굶어 죽을 지경은 아니니까.”

아셰는 발을 헛디딜 뻔하다가, 켄이 단단하게 안아 주어 그대로 편안하게 평평한 바위 위에 안정적으로 설 수 있었다. 그녀가 바위틈에 있던 노란 풀을 보며 눈빛을 반짝이자 켄이 웃으며 그녀의 손을 이끌었다.

“나중에 내가 뜯어 줄게. 여긴 균형 잡기 어려우니 일단은 점심부터 먹자.”

계곡물이 맑게 흘렀다. 작은 동굴 앞에 천을 깔아 나란히 앉은 두 사람은 계란이 들어 있는 샌드위치를 크게 한입 베어 물었다. 왕궁에서 먹던 빵과는 비교할 수 없이 거칠었고, 설탕이라고는 아주 조금밖에 들어 있지 않았지만 몸을 움직이고 나서 먹으니 그렇게 맛있을 수가 없었다. 켄이 화살촉을 다듬으며 말했다.

“네가…… 이곳에 와서 얼마나 다행인지 몰라.”

“그래?”

“곧 겨울이 오면 꼼짝 없이 또 인구의 절반을 보내겠구나, 했는데…… 그 불안감에서 벗어나서 정말 다행이야.”

“겨울이 그렇게 무서워?”

“폭설이라도 내리면 끔찍하기 그지없지.”

“난 눈을 한 번도 본 적이 없는데!”

“아메니티는 대륙의 가장 남쪽에 있으니까 늘 따뜻하겠지만, 이곳의 겨울은 혹독해. 따스히 입고 적당히 먹지 않으면 그대로 얼어 죽어. 먹을 것이 없어 지푸라기를 씹어야 할 정도가 되면…… 그대로 소들이 얼어 죽고, 소들이 얼어 죽으면 악순환이 시작되는 거야. 그렇지만.”

켄은 그녀의 입가에 묻은 계란 부스러기를 털어 주며 다정하게 웃었다.

“이번 겨울은 눈이 와도 아이들처럼 뛰놀 수 있겠어. 성에는 그 어느 때보다 많은 곡식이 쌓여 있으니까.”

“눈을 보고 싶어. 하얗고 아름답다던데.”

“개와 아이들은 눈이 오면 무조건 좋아하지. 아마 너도 그럴 것 같아.”

“뭐야! 내가 개랑 아이들 수준이라는 거야?”

아셰가 아프지 않게 켄의 팔을 주먹으로 쿵, 때렸다. 켄이 허허 웃으며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잠시 정적이 흐르고, 켄은 눈앞의 계곡으로 돌을 하나 던지며 말했다.

“아셰.”

“응?”

“네가 독살했다는 친족이…… 그 제국에 보내려고 했던 첫째 오빠 맞지?”

“……응.”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냥, 음…… 첫째 오빠도 날 죽이는 거나 마찬가지라고 생각했어. 그래서 그런 것 같아.”

“기분이 어땠어?”

“사실…… 내가 피를 본 것도 아니고, 오빠가 죽는 모습을 직접 본 것도 아니라……. 그저 비상을 탄 차를 먹였을 뿐이거든. 솔직히 말하면 현실감이 잘 들지 않았어. 그래도, 계속 악몽에 시달렸고 지금도 가끔 꿈에 나타나긴 해. 그럼 한동안 잠이 들기 어려워.”

“……그렇구나.”

“옛날엔 시녀들이라도 함께 있었는데, 가끔 이곳은 밤이 무서울 때가 있더라고. 그래도 여기 와서 나는 정말 좋아. 이런 곳에서 살았다면 오빠를 죽이는 일은 전혀 하지 않았을 것 같아. 윌리엄도 그렇게 말했어. 다음 생에, 평민 오누이로 태어난다면 그 때 잘해 주겠다고.”

“현실감 없는 얘기야.”

켄이 대답했다.

“이곳도, 굶어 죽기 직전에는 오누이고 뭐고 없어. 끔찍했던 지난겨울엔 오빠들이 제국의 매춘부로 여동생들을 팔아넘겼지. 뭐든지 여유가 있어야 아낄 수 있는 법이야. 나는 그래서…….”

그가 먼 곳을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우리 캐넌 영지만큼은, 아메니티처럼 부유하지는 못해도 인간으로서 온정을 나눌 수 있는 곳으로 만들고 싶어. 일손이 부족하면 내가 도와주고, 싸움이 벌어지면 공정하게 중재하고, 아이들에게 웃음과 희망을 가르칠 거야. 내 일을 열심히 하면 먹고사는 데 큰 지장이 없고, 어려울 땐 영주를 믿고 따를 수 있게 말이야. 아버지는 거동이 저토록 힘든데 영주민들을 위해 긴 항해를 나섰어.”

“…….”

“난 아버지 같은 영주가 될 거야. 그래서 네 아이가 평온하게 잘 자랄 수 있는 터전을 만들어 줄 거야.”

“켄.”

그녀는 배를 매만지며 부드럽게 웃었다. 계곡의 흐르는 물소리는 평화로웠으며 산새가 울었다.

“내 아이는…… 정말로 켄처럼 컸으면 좋겠어. 나도, 아이 아빠도 닮지 않고 켄을 닮았으면 좋겠어.”

그것은 그녀의 진심이었다.

“나와, 이 아이의 아빠는 목적을 위해 너무 많은 거짓말을 하고 남을 속이며, 죽음을 늘 가까이 하면서 살았거든. 남을 부리며 살았어도 늘 벼랑 끝을 걸었고, 진정으로 웃고 진정으로 화내지 못했어. 하나를 주면 하나를 받고, 하나를 말하면 하나를 숨겼지.”

“…….”

“켄처럼 바르고 올곧았으면 좋겠어. 밝고, 따뜻하고, 숨기는 것 없이 베풀 줄 아는 사람. 켄이 숙부님을 진심으로 존경하듯 우리 아이도 켄을 존경했으면 해.”

“아…….”

켄은 코를 긁었다. 멋쩍어 하는 표정이었다. 아셰가 코를 찡긋거리며 말했다.

“내가 리스의 의료 서적들은 형편없다고 했잖아. 심지어 아들인지 딸인지 손톱 모양으로 알아내는 법이 떡하니 의료 서적에 있더라고. 정말 웃겼지만 그 책에 따르면…….”

그녀가 온화하게 웃었다.

“아들이더라. 그렇다면 꼭 켄처럼 키울 거야. 물론 켄도 나중에 결혼을 해서 아이를 가지면 친아들처럼 내 아이를 돌봐 줄 수는 없겠지만…….”

“……아셰.”

켄은 부드럽게 웃었다.

“난…… 결혼 안 하려고.”

“……응? 왜?”

아셰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물었다. 에곤의 말에 따르면 근처에 혼기가 찬 영주의 딸이 없어서 멀리까지 알아봐야겠다고 하던 참이었다. 사실 굳이 영주의 딸이 아니어도, 마을에는 켄을 눈독 들이는 처녀들이 한둘이 아니었다.

“더 이상의 가족은 필요 없어.”

“……어?”

알싸한 느낌이 아셰의 뒷목을 타고 내려왔다. 이곳에서 너무 남의 눈치를 보지 않고 망아지처럼 살았나 순간 후회가 되었다. 아메탄에서 시시때때로 긴장하며 남의 기분과 감정을 파악하기 위해 애쓰고 살았던 그녀는 이곳에 들어온 동시에 남들에게서 관심을 끊고 그저 그녀의 자유와 행복만 생각하며 살았다.

“이 성에 여자는 너 하나면 돼.”

“켄. 그……게 무슨 소리야?”

그녀는 지금까지 다니엘을 대하듯 켄을 대했다. 의식을 하고 보니 켄의 다정함에서, 다니엘의 시선에서는 느껴지지 않던 다른 종류의 설렘이 느껴졌다. 분명히 여동생이 아니라, 여자를 보는 눈빛이었다. 그동안은 아무 생각 없이 살았지만 분위기가 이상해지자마자 빠르게 그의 감정을 파악한 그녀의 표정이 굳었다.

“네 아이를 이 성의 양자로 들이면…… 나는 그 아이의 아버지가 되어 줄 거야. 그리고 그 아이를 이 영지의 후계자로 키우면 돼. 아버님, 너, 나, 그리고 아이. 더 이상 완벽할 수는 없어.”

“켄, 숙부님이 돌아가시더라도…… 나는 너와 결혼할 수 없어. 호적상으로 나는 너의 어머니야. 우리가 아무리 사촌 놀이를 하더라도 그건 진실이 아니잖아.”

“호적이 뭐가 중요해? 그렇게 치면 나는 너와 피 한 방울도 섞이지 않았어. 너는 내 아버지의 아내이지만, 실제로는 전혀 그렇게 살고 있지 않잖아. 저 멀리 수도에서 관리하는 문서 따위야 뭐가 중요하겠어. 실제로 허가장만 이렇게 늦게 도착하지 않았다면, 아버지는 어떻게든 너와 나를 연결해 주었을 거야.”

그의 초록색 눈빛은 맑게 그녀를 담고 있었다.

“알고 있어. 너는 나를 정말로 오라비처럼 생각한다는 걸. 나를 남자로 봐 달라는 얘기가 아니야.”

“……켄.”

“다만 다른 여자를 성에 들이는 건…… 그 여자한테 너무 못할 짓이야. 너는 그냥, 이 성에서 네 아이와 행복하기만 하면 돼. 네게 그 어떤 것도 강요하지 않아. 아, 네가 숫자에는 나보다 훨씬 밝더군. 성의 창고 재고 관리를 앞으로도 계속 해 줬으면 해.”

아셰는 혼란스러운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켄은 벌떡 일어나 그녀에게 손을 내밀었다.

“더 깊이 들어가면 곰이 나올지도 몰라. 이제 슬슬 내려가자. 사슴이라도 한 마리 잡으면 마을에 가죽 손질을 맡겨야 하거든. 아셰, 너무 깊은 생각은 하지 마.”

그녀는 망설이다가 켄의 손을 잡고 일어섰다.

“넌 아이만 생각하면 돼. 너를 생각하는 건 나의 사정이야.”

[다음 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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