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2화 (201/256)

42화.

“다니엘은 힘겹게 하루하루를 살 텐데, 내가 여기서 행복해서 그런가 봐. 게다가 나는…….”

그녀가 켄을 올려다보며 나지막하게 말했다.

“……여기서 켄을 만났잖아.”

“어, 어?”

켄이 당황하며 숨을 들이켰다. 아셰는 쿡쿡 웃으며 말을 이었다.

“켄은 다니엘처럼, 내게는 정말로 친오라비 같은 사람이야. 내가 장담하는데, 나는 돌아가신 나의 친부보다 숙부님을 더 좋아해. 그것처럼, 윌리엄과 루벤에 비교할 바 없이 켄은 내 혈육과도 같아.”

“음…….”

켄이 뒤통수를 긁으며 말했다.

“다니엘? 그 사람하고는?”

“꽤 비슷한 것 같아, 정말로!”

아셰가 환한 미소와 함께 대답했다. 그녀는 여기서 아무것도 숨기지 않았다. 남에게 잘 보이려고 미묘한 의도를 파악하기 위해 안달하지도 않았다. 이곳의 사람들은 목적이 없어 늘 순수했고, 끼니만 해결되면 복잡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마치 다른 사람이 된 것처럼, 그녀는 정말 아무 생각이 없이 살았다. 반란군은 저 멀리 제국의 남쪽에 포진하고 있었고, 이단과 그녀 사이에는 지리적으로 제국의 수도가 버티고 있었다. 반란군과 제국군은 엎치락뒤치락하며 긴 소강상태의 내란에 접어들었으나, 리스 공국에서는 어쨌든 남의 일이었다.

그러나 가끔 그녀를 불안하게 한 것은, 지난 생일 때 헤일리가 점쳐 준 바로 그 카드 때문이었다. 정말 이곳에 소속되고 싶은데, 이방인으로 남을 것이라는 조심스러운 그녀의 말에 가끔 아셰는 밤에 잠을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곤 했다. 이곳에서는 밤에 빛을 내는 마법구가 몇 개 없었기 때문에, 모두가 일찍 잠에 들곤 했다. 잠에서 깨어 어두컴컴한 밤하늘을 바라보고 있자면, 자신도 모르게 학자자리의 여덟 개 별을 헤아리고 있었다.

‘이단.’ 

이단을 잊으려야 잊을 수 없었다. 푸른 하늘과 아름다운 들꽃이 펼쳐진 잔디밭을 보면서도, 그 모든 밝음을 함께하고 싶다던 이단의 말이 떠올랐다. 그리고 이렇게 어두운 밤이 되면, 거센 짐승처럼 그녀를 탐하던 이단의 손길과 밤마다 해 주던 조곤조곤한 이야기들이 머릿속에 가득히 떠다녔다.

그도 그의 자리에서, 목동자리의 여덟 개 별을 헤아리고 있을까. 아니면, 전쟁에 정신이 팔려 그녀를 잊었을까. 젊은 지도자이니 혼담으로 그를 엮어 두려는 영주들도 많을 것이다. 아주 작은 영지의 소영주인 켄에게도 마을의 많은 여자들이 추파를 보내는데, 혁명군의 지도자에게는 오죽할까.

‘미안해.’

믿고 기다려 달라고 했는데…… 만일 그가 그녀를 잊지 않았다면, 정말로 그 사랑이 찰나의 것이 아니었다면 그는 그녀의 혼인 소식을 듣고 어떤 반응을 보였을까.

‘하지만 내게는…… 아이가 너무 소중해서 어쩔 수 없었어.’

아이의 아버지는 그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었다. 힘겹게 아이를 임신했음을 고백했을 때 에곤은 아무것도 묻지 않고 너털웃음을 지으며 이 나이에 손주를 볼 수 있으니 얼마나 기쁜 일이냐고 그녀의 어깨를 두드려 주었다. 켄은 종종 말아 피우던 담뱃잎마저 모두 갖다 버렸다.

‘믿고 기다려.’

너무나 많이 생각해서, 그 때 그의 눈빛과 숨결, 팔에 솟아오른 갈라지던 근육, 쏟아지던 붉은 머리카락까지 아직도 눈에 생생했다.

‘무슨 일이 있더라도…… 널 데리러 올 거야.’

그녀의 안을 깊숙하게 채우던 그의 체온과 섞이던 타액, 정적에 울려 퍼지던 살결이 부딪히는 소리까지도 그녀는 잊지 않았다.

‘널 사랑해.’

살짝 눈물이 고였다. 이제와 생각하니, 아주 어렸을 때부터 혼자였던 그녀는, 아메탄의 왕궁에서 그 누구도 믿지 않도록 교육받은 그녀는 그 말조차 믿지 않았던 것이다. 그녀의 시선이, 받은 이후 한 번도 몸에서 빼지 않은 검지의 금반지에 툭 하고 떨어졌다.

* * *

“뭘 보십니까?”

“밤하늘이지, 뭐.”

이단은 목동자리의 여덟 개 별을 한참 동안이나 바라보다가, 어느새 다가온 사브르가 말을 걸자 한숨을 쉬며 성을 한 번 바라보았다. 막 함락된 시카 성은 몹시 혼잡했다. 난공불락의 요새라는 말이 무색하게, 이단의 마법 몇 번에 크게 무너진 성벽이 아직도 흔들렸다. 어렵지 않게 남쪽 지역을 평정한 혁명군의 사기는 하늘을 찌를 듯 높았고, 이단은 무고한 사람들은 죽이지 말고 제국에 충성을 맹세한 영주와 군사들만 감금하라고 이미 지시한 상태였다.

“……리한은 여전히 기분이 좋지 않은가.”

“그런 것 같지만, 지금 그런 내색을 할 수는 없겠지요. 대다수의 장군들과 군인들이 몹시 기뻐하고 있으니까요.”

스타람 군대의 사단장인 리한은 이단의 마법 공격을 반대한 두 명의 사람 중 하나였다. 그는 세 가지의 문제 제기를 했다. 첫 번째는 원래 폴라리아를 점령하려던 계획을 왜 급선회하였는가에 대한 것이었는데, 폴라리아는 황제가 일전에 마법을 쓴 지역이라 마력이 부족하여 급히 칠 이유가 없다는 반박이 나왔다. 

두 번째는 황제의 마법을 황자의 마법이 이기는 것은 공화정 혁명 정신에 맞지 않는다는 것이었는데, 이길 수 있는 수단을 두고 무고한 희생을 늘릴 수 없다는 혁명군들의 주장에 수적으로 밀릴 수밖에 없었다.

세 번째는, 한번 마법을 쓰기 시작하면 그 누가 총칼의 훈련을 받겠냐는 날카로운 지적이었다. 리한은 다른 혁명군과 다르게 마력이 전혀 없는 스타람 출신이었고, 혈통으로 이어지는 마력의 힘을 늘 경계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렇게 한 사람으로 인해 쉽게 전투에서 이기면 이단은 혁명군에서 대체할 수 없는 존재가 되고, 세습의 고리를 끊고 누구나 지도자가 될 수 있는 공화정부에 큰 걸림돌이 된다는 것이었다.

“리한은 폴라리아만 점령하면 아메탄으로 돌아가겠다고 했지. 적당히 보내 주는 것이 우리 쪽에도 좋겠어. 아카날 총통과 왜 멀어졌는지 알겠군.”

이단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성 밖으로 보이는 들판을 바라보았다. 사브르는 그의 단단한 옆모습을 바라보며 살짝 한숨을 쉬었다. 그가 다소 체념한 말투로 중얼거렸다.

“어쨌든 리한 사단장님과 같은 생각을 하는 사람들은 거의 없습니다. 총독님에 대한 지지는 열화와 같아졌고, 사단장님 말씀대로 총독님을 대체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는 게 지금 분위기이지요. 사람들은 자신이 할 수 없는 일에 동경을 느끼는 법입니다. 아까 총독님의 마법 몇 번으로 성벽이 부서지던 모습을 사람들은 평생 기억할 겁니다.”

“……사브르 키렐은 어떻게 생각하는지 궁금한데.”

“저…… 말씀이신지요.”

사브르는 연거푸 한숨을 쉬었다. 마법을 쓰는 것에 반대한 두 사람 중 하나인 그는 축제 분위기인 군인들을 가만히 바라보면서 대답했다.

“저는 마력을 전혀 쓰지 못하는 스타람인입니다. 리한 사단장님과 같이, 뼛속부터 공화주의자고요. 그래서 원칙적으로 이런 결정이 못마땅한 건 사실입니다. 하지만 아카날 총통이 장기 집권을 선언한 스타람이 정답이라고 생각하지도 않습니다. 실제로 리한 사단장님과 저는 스타람의 공화정이 실패했다고 평가해야 한다는 데 의견을 모았습니다.”

“음.”

“총독님은 아카날 총통님과 다르십니다. 비록 제 바람과 다르게 움직인다 하시더라도 저는 희망을 건다면 이쪽에 걸겠습니다.”

“약속하지. 이 길고 지루한 전쟁에서 이기면, 절대 마법을 쓰지 않겠어. 어차피 내가 황제를 죽이면 천 년간 내려져 온 이 지긋지긋한 핏줄의 힘은 나의 대에서 끝난다. 사라진 것에 대해서는 전설만 남을 뿐 힘은 사라질 거야. 일단 빠르게 이기고, 신의 저주인 이 힘을 끊고, 내 임기가 끝나면 조용히 살 거야.”

“……진심이십니까. 마력도 권력도 없이 뭘 하시려고요. 5년이 지나더라도 총독님은 너무 젊습니다.”

“흠, 권력은 세습하지 못해도, 황궁에서 내가 소유권을 주장할 수 있는 물건들은 꽤 되지 않을까……. 그 때가 되면 내가 마지막 황족이잖아.”

그가 피식 웃었다.

“뭐, 많이 심심하면 쿠키나 케이크를 만드는 법을 배워 볼까 해.”

“……예? 단것은 안 드시잖아요?”

“극복해야지.”

사브르가 깜짝 놀라 그를 바라보았다. 이단의 눈에 쓸쓸함이 엿보여서 사브르는 잠시 말을 잇지 못했다. 그는 남들이 보지 못하는 이단의 이면을 보고 있다고 항상 생각했다. 가끔 엿보이는 힘에 대한 오만함, 다수를 뜻대로 움직일 수 있는 정치력, 사람들을 하나의 패로 보고 적절하게 여론을 호도해 가는 영리함, 그 속에 숨겨진 독단적인 잔인함까지. 그러나 이런 표정은 또 처음이라 그는 적잖이 당황했다.

잠시 생각에 빠져 있던 이단의 눈빛이 다시 돌아왔다. 그가 팔짱을 끼고 다시 차갑게 말했다.

“캐넌의 상황은 어떻지?”

“……그저 평화롭다고 합니다. 아셰 왕녀의 지참금 덕분에 몹시 풍요로운 겨울을 준비 중이라고 하더군요. 영주인 에곤은 몸이 좋지 않아 거의 성 밖에 나오는 일이 없고, 왕녀와 동침을 하는 것 같지는 않다는 보고가 있었습니다. 왕녀는 그를 숙부라고 부른답니다. 실제로 외가 쪽에 핏줄이 이어져 있지요.”

이단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공공연하게 캐넌 영지에서는 이런 소문이 퍼져 있다고 합니다. 감금되어 있던 아셰 왕녀를 불쌍히 여긴 에곤이 자신의 영지에 데려왔다고요. 그녀의 모친 샤틴이 어린 시절 잠시 캐넌에 머물렀다고 하더군요.”

“헛소문이군. 아메탄의 국왕은 자신의 여동생을 가까이 두고 싶어 했어. 시골의 다 굶어 죽어 가는 영주가 달라고 해서 줄 사람이 아니야.”

“그거야 모르는 일이지요. 여하튼 상당히 잘 지낸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그곳에 있는 것이 전쟁터에 데려오는 것보다 안전하긴 하겠군.”

그가 그렇게 중얼거려서, 사브르는 내심 안도했다. 그러나 그의 바람과는 정반대로, 이단은 낮게 말했다.

“성이 정돈되고, 다시 성벽을 올리는 데까지 일주일이면 되겠지?”

“……예?”

“마력을 긁어모아 마법을 썼으니 황제의 공격에도 당분간 안전할 테고, 난공불락의 요새이니 제국군이 몰려와도 거뜬할 거야. 어차피 남쪽에 있는 캐시의 군대를 기다려야 하니 이 성에서 2주는 있어야 해. 그동안 나는…… 히치 해협을 통해 캐넌에 잠시 다녀오겠어.”

“총독님.”

사브르가 고개를 저었다.

“위험합니다. 혼자 가시겠다는 말씀이신지요.”

“이틀이면 돼. 제국만 벗어나면 황제가 마력을 추적할 수 없어. 걱정하지 마.”

“제가 말씀드렸지 않습니까. 왕녀는 그곳에서 안전하고 행복합니다. 구태여 가실 이유가 없습니다. 전할 말이 있으면 편지로…….”

이단의 눈이 다시 밤하늘의 별로 향했다.

“내가 불안해서 가는 거야.”

“……예?”

“그녀가 나를 잊을까 봐, 그 평온한 삶에 물들어 다시는 나를 찾지 않을까 봐, 나중에 내가 불러도 오지 않을까 봐 가는 거야.”

사브르는 차마 말을 잇지 못하고 입을 벌린 채 그를 바라보았다.

[다음 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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