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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화 (200/256)

  

41화.

“아셰!”

이제는 익숙해진 금발 머리의 여자가 뒤를 돌아보며 환히 웃었다. 한 달 전 그녀가 처음 리스에 왔을 때의 첫인상을 잊을 수 없었다.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비단옷을 입고, 결이 좋은 금발 머리를 치렁치렁하게 늘어트린 채 창백할 정도로 하얀 피부를 가지고 있었다. 표정마저도 어딘가 긴장하여 마주하는 켄이 다 어려울 정도였다.

하지만 지금은, 마을 미용실에 가서 잘랐다며 어깨까지 깡총해진 머리를 푸른 리본으로 높게 묶고, 마을 처녀들이 자주 입고 다니는 리스의 거친 흰색 면으로 된 전통 의상을 입고 있었다. 단것을 잘 못 먹어서 그런지 오히려 처음 봤을 때보다 더 몸이 말랐는데, 대신 많이 움직인 덕인지 훨씬 더 건강해지고 혈색이 좋아 보였다.

“켄! 마을 학교에서 오는 거지?”

그녀가 반가운 목소리로 소리쳤다. 푸른 리본 밑으로 빠져 나온 잔머리가 바닷바람에 하늘하늘 날렸다. 아스의 언덕은 조금 높아서 사람들이 잘 오지 않았지만, 그래도 캐넌에서 손꼽히게 아름다운 곳이었다. 캐넌 영지가 한눈에 모두 보이고, 저 멀리 거대한 산맥과 함께 바다가 출렁거리며, 사시사철 이름 없는 들꽃들이 각자의 향기를 뽐내며 바람에 살랑거렸다. 특히나 아셰는 높은 곳을 좋아해서, 언덕에 한번 오르면 한참 동안이나 내려오지 않았다.

“매일같이 여기에 있으니, 몸이 더 힘들어지기 전에 의자와 테이블을 하나 설치해야겠다. 아직은 햇빛이 세니, 천막도 쳐 줄게.”

켄은 적절한 부지를 찾기 위해 평평한 곳을 눈여겨보며 허리에 손을 얹었다.

“정말? 와, 그럼 책도 여기 와서 읽어야겠네!”

아셰가 손뼉을 치며 웃었다. 일을 하고 온 그에게서 달큰한 땀 냄새가 났다.

“점심 먹으러 가자. 아버님이 기다리시겠어.”

“알았어. 그런데…… 켄, 저 나무 보여? 푸른색 꽃 좀 따 주면 안 될까?”

아셰가 눈을 반짝이며 말했다.

“내 약제국 친구에게 보내고 싶은데, 난 키가 안 닿지 뭐야. 그래도 켄이 올 줄 알았어.”

켄은 어렵지 않다는 듯이 살짝 뛰어서 높은 나무에 달린 푸른색 꽃을 한 아름 따다가 그녀에게 안겨 주었다. 이렇게까지는 필요 없었다며 그녀가 깔깔대고 웃었지만, 꽃에 파묻힌 그녀는 햇살을 받아 몹시 아름다웠다.

처음에 켄은 ‘왕녀님’ 소리를 들었을 때부터 그녀가 캐넌에 잘 적응할 수 있을까 내심 걱정했다. 아무리 성에 사는 영주라고 해도 평민들과 삶이 크게 다르지 않았다. 이 어려운 시대에 시녀를 붙여 주기도 쉽지 않았고, 처음 입고 온 비단옷은 캐넌의 어디서도 구할 수 없었다.

이야기를 들어 보니 정말로 그녀는 궁에서 시녀를 넷이나 거느리며 살았고, 동화책에서나 나오는 연회에서 빙글빙글 춤을 추었으며, 몇 벌이나 되는 드레스를 골라 입고 온갖 마법 아이템이 넘쳐 나는 아메니티에서 생활했다고 했다. 그러나 이곳은 마법 아이템이라고 해 봤자 제국에서 수입한 값비싸고 조악한 것들밖에 없었는데, 그래서 처음에 아셰는 눈을 둥그렇게 뜨며 반문하곤 했다.

‘음…… 마법구가 두 개밖에 없다고? 그럼 밤에 거리가 어둡잖아요?’

‘가, 가죽을 직접 두들겨요? 아메니티에서는 그런 건 다 아이템으로 해요.’

‘그냥 이 풀을 씹는다고요? 시약으로 추출을 안 하고?’

다소 무시당하고 있는 느낌에 켄은 조금 기분이 나쁘기도 했으나, 그 말에 악의가 없다는 생각은 들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아셰는 켄이 상상할 수조차 없는 속도로 캐넌에 적응했는데, 알아서 비단 옷 한 벌을 의상실에 주고 여러 벌의 전통 의상을 받아 왔으며(‘새로운 마님, 보통 내기가 아니던데요? 어리숙해 보여서 약간 곯려 주려고 했는데 어느새 내가 비단 옷 한 벌에 여덟 벌이나 만들어 주고 있었다고요!’) 주민들과 돈독해지고(‘잘 웃고 쾌활하던데요? 정신 차려 보니 내가 이웃집 영감 흉까지 보고 있던데.’) 특히 마을에 하나뿐인 의원과도 친해졌다(‘여기 사람들은 너무 약을 안 먹어! 작은 마님은 그래도 약초에 대한 지식도 풍부하고, 이곳의 약초를 몹시 궁금해 하더라고. 나도 모르게 책도 빌려준다고 했어.’).

“켄, 있잖아. 저기, 저 산은 왜 가면 안 된다고 했어?”

“저긴 야생 동물이 꽤 많이 나와. 산책을 가는 곳이 아니라, 사냥을 가는 곳이야.”

켄은 이름 모를 꽃을 한 아름 안고 그를 올려다보는 아셰에게 빙긋 웃으며 말했다. 그들 머리 위로 높게 푸른 하늘이 펼쳐져 있었다. 처음에 어색했던 시간을 지나, 그들은 자연스럽게 말을 놓기 시작했고 정말 가족처럼 편하게 지냈다.

“정말 가고 싶으면 말해. 내가 같이 가 줄게. 토끼라도 몇 마리 잡아가면 주방에서 좋아할 거야.”

“진짜? 내일은 리트와 씨에게 책을 빌리기로 했으니, 모레는 안 될까?”

아셰가 기분 좋게 웃으며 손뼉을 쳤다. 리트와는 이곳에 하나뿐인 의원으로 혼자 사는 외골수 50대 남자였다.

“사실 리스 공국의 의료 체계는 형편없어……. 근데 엉터리 내용이 많아서 그게 너무 재밌어. 아니, 투명 인간 되는 법, 이런 게 의료 서적에 떡하니 있다니까? 마법으로도 그런 건 못해!”

재잘재잘 떠드는 아셰를 켄은 편안하게 웃으며 바라보았다. 이렇게 밝고 명랑한 여자가 제 친오라비를 독살했다는 것이 믿어지지 않았다. 그 이유에 대해서는 한 번도 물어보지 않았으나, 자연스럽게 그녀와 가까워지니 자꾸만 궁금한 것들이 많아졌다.

“……그래서…….”

켄은 기지개를 켜며 아무렇지도 않게 말했다.

“다시, 아메탄에 돌아가고 싶어?”

“아니.”

대답은 즉시 나왔다. 아셰는 저 멀리 보이는 흰 성을 바라보며 노래하듯 말했다.

“이제 저기가 내 집이야.”

“음…… 여기는 마법 아이템도 별로 없고, 의료 지식도 형편없고, 마치 100년 전 아메니티에 머물러 있는 것 같다며.”

“그래도 이곳은 편안하잖아.”

그녀는 싱긋 웃었다.

“내가 자란 왕궁은, 어릴 때부터 서로를 견제하고 이용하는 법을 가르쳤어. 왕족과 거래를 할 때에는 반드시 하나를 받으면 하나를 줘야 해. 그게 친형제라도 말이지. 무엇을 말할 때 반드시 뒤에 있는 진실을 파악하려고 눈을 부릅떠야 하고, 남들보다 하나라도 더 아는 사실이 있다면 끝까지 감춰야 하며, 가장 친한 친구에게조차도 모든 걸 털어놓으면 안 돼.”

“……음, 끔찍한 곳이네.”

“화를 낼 때도 평정심을 잃지 말아야 하고, 상대가 웃고 있다면 속내를 짐작해야 하고, 아무리 온화하고 친밀하다 할지라도 믿으면 안 돼. 아무리 약해 보이는 상대라도 만만하게 대하면 뒤통수를 얻어맞는 법이지.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누구에게나 잘해 주면 이용 가치가 떨어져 그대로 도태돼.”

“아이고, 나는…….”

켄이 손사래를 치며 고개를 저었다.

“시켜 줘도 못하겠다. 힘들어서 어떻게 살아? 마법 아이템이 없고, 조금 일찍 죽더라도, 나는 토끼를 잡고 울타리를 고치면서 건강하게 살고 싶어. 내 앞에서 웃으면 아무 생각 없이 믿고, 이용당한다는 생각 없이 순수한 호의로 남들에게 잘해 주고, 화를 내면 사과하고, 사과 받으면 풀어지는 그런 삶 말이야.”

“응, 나도 어떻게 살았나 싶네.”

그녀가 배를 매만지면서 싱긋 웃었다. 책에서는 시간이 더 지나야 배가 눈에 띄게 부풀어 오른다고 적혀 있었다. 아직도 그녀의 배는 겉으로 봐서 전혀 티가 나지 않았지만 그녀는 혼자 흐뭇하게 웃곤 했다. 그녀의 아이가 태어난다면, 그녀는 왕궁에서보다 이런 곳에서 키우고 싶었다.

‘여자아이일까, 남자아이일까. 네가 너무 궁금해.’

그녀는 활기차게 걷기 시작하며 생각했다.

‘이곳 사람들이 그러는 것처럼, 나는 어릴 때부터 너를 바다에 데려갈 거야. 첨벙대는 바다를 보며 까르르거리고 뛰노는 걸 언제까지나 바라볼 거야. 리스의 전통 의상을 입히고, 영지에 세 개뿐인 학교 중 가까운 곳에 보내야지. 아, 바느질을 배워 직접 옷을 만들어 줘야겠다.’

공기는 맑았고, 저 멀리서 소들의 목에 걸린 방울이 딸랑거렸다. 바람결에 스쳐 오는 그 방울 소리를 들을 때마다 그녀는 마음이 가라앉는 느낌이 들었다.

“날 여기로 보내 준 다니엘에게 너무 감사해……. 다니엘은 잘하고 있을까, 내가 없으면 마음 기댈 곳이 없을 텐데.”

“다니엘?”

“음…… 내게는 이복 오라비가 셋 있었어.”

그녀는 켄을 바라보며 말했다.

“첫째 오빠는 나를 억지로 제국의 황제비 자리에 보내려고 했지. 내가 거부하자 나를 때리고, 우리 엄마를 볼모로 협박했어.”

“제국의 황제비?”

켄의 눈이 커졌다. 그렇게 대단한 여자일 줄은 상상도 못했다. 그녀가 담담하게 말을 이었다. 

“제국의 황제는 제 여자를 때리고 죽일 때도 있어. 잔혹하고 잔인한 성품이야. 제국이 시끄러운 걸 보면 몰라?”

“아…… 그렇구나……. 하긴, 가을 추수철이 다가오는데 이렇게 인정사정없이 젊은 남자들을 싹 데려가는 사람이, 제 여자에게 다정할 리 없겠지.”

“둘째 오빠는 세상을 돌아다니기 좋아하는 풍운아야. 그냥 내게 관심이 없었지. 하지만 어머니들끼리 얽혀 있어서, 굳이 말하자면 사이가 좋지는 않았어. 그리고 셋째 오빠는 나와 동갑인데…….”

아셰가 손가락을 꼽으며 먼 곳을 바라보았다.

“다니엘은 지금 아메탄의 국왕이야. 나와 어릴 때부터 함께 컸고, 왕족의 특성상 친구들이 곧 신하가 되기 때문에 서로를 이해할 수 있는 건 우리 둘뿐이었어. 다니엘은 강하고, 정치적이고, 몹시 합리적이며 목적을 위해 수단을 가리지 않는 면모가 분명히 있지만…… 그래도 마음 깊숙한 곳에 유약함이 있는 사람이었어. 그 유약함을 다독일 수 있는 건 나뿐이었는데…….”

그녀는 착잡한 얼굴로 말을 이었다.

“……내가 여기로 오고 말았어. 내 아이에 정신이 팔려, 다니엘을 생각조차 못했네. 평화로운 곳에 와 보니, 내가 내 유일한 오라비를 그 끔찍한 곳에 홀로 뒀다는 죄책감이 또 밀려와.”

“그는 아메탄 왕국의 왕이야. 쫓겨나다시피 한 네가 왜 국왕의 걱정을 하는지 모르겠군.”

“거봐, 켄조차 그런 말을 하잖아. 다니엘을 이해할 수 있는 건 나뿐이라는 사실은, 이 세상에 둘밖에 모르겠지.”

아셰는 쓸쓸하게 웃었다.

[다음 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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