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0화 (199/256)

  

40화.

켄은 가만히 그녀를 바라보다가,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이곳은 아닙니다.”

“……네?”

“이곳의 삶은 단순합니다. 뿌린 대로 거두고, 서로가 서로를 믿고 아낍니다. 그 사람이 내 예상대로 움직이지 않았다면 그건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을 거예요.”

아셰는 맑은 녹색 눈의 청년을 잠시 가만히 바라보았다. 본능적으로 판단하건대 남자의 말은 진심이었다. 그녀는 갑자기, 소영주라는 직위를 가진 청년이 영지 사람들과 함께 농담을 하며 함께 짐을 옮기던 모습을 떠올렸다. 조금도 권위적이지 않았고, 사람들 속에서 편안해 보였다. 아셰는 당연히 소영주가 왔을 때 식량을 훔치지 못하도록 감시하기 위해 배 안으로 들어온 줄 알았다. 그러나 그는 사람들과 낄낄거리며 함께 짐을 옮겼을 뿐이었다.

“그러니…….”

켄이 차분하게 말했다.

“진짜 사정을 말씀해 주십시오. 아메탄이야 잘 모르겠지만, 리스에서는 이런 식으로 혼인하지 않습니다. 신중하게 혼담을 주고받은 뒤 오랫동안 서로의 동의를 구해 진행하지요. 어, 어머님…….”

아셰가 깜짝 놀라 그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어색하게 물었다.

“나, 나이가 어떻게 되세요, 소영주님?”

“스물다섯입니다.”

“저는…… 한 달 전에 스물넷이 되었는데…… 그, 그냥 아셰라고 부르세요.”

“그, 그럼 저도 켄이라고 부르십시오.”

잠시 정적이 흘렀다. 아셰는 순진하고 건강한 청년의 앞에서 손가락을 꼬물거리며 다시 말문을 열었다. 그의 차분하고 진중한 말에 더 이상 장난을 치며 도발할 생각이 들지 않았다.

“친오라버니를 독살한 죄로, 저는 감금되어 있었습니다. 왜 즉시 사형을 당하지 않았냐면…… 그건 아메탄의 규율이니 나중에 설명하겠습니다. 어쨌든 궁에서 너무 편히 놀고먹는다는 눈총 때문에 왕궁의 골칫거리였고, 그 때 영주님…… 아니 숙부님이 제 모친께 식량 지원을 요청하러 오신 겁니다.”

“아.”

“아메탄의 국왕이자 제 오라비는 식량을 잔뜩 지원하는 대신 궁의 골칫거리였던 저를 머나먼 땅에 내보내게 된 것이지요. 이것이 내막입니다. 사실 저희도 혼담을 주고받아 신중히 결정하지, 급작스러운 청혼은 아주 드문 일이예요.”

“아, 알겠습니다.”

켄은 눈을 천천히 깜빡였다. 이토록 아름답고 약해 보이는 여자가 친족을 살해했다니 믿을 수가 없었다. 그는 그녀가 대접 받고 살던 왕녀임에도 불구하고 싹싹하게 눈치껏 버터 상자를 나르던 모습을 잊을 수 없었다.

“부탁이 있다면…… 여기 사람들 대부분은 저와 같은 옷을 입지 않더군요. 평범한 옷을 구하고 싶은데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제가 마을 의상실로 가서 알아보겠습니다. 옷 한 벌만 주시면 그 크기에 맞춰…….”

“아, 마을에 의상실이 있군요. 소영주님도 바쁘실 텐데 제 시중을 들 필요는 없어요. 위치를 알려 주시면 제가 직접 가겠습니다. 제가…… 궁에서만 생활하여 한동안 많이 헤맬 듯합니다. 많은 도움 부탁드립니다. 그, 그리고…….”

아셰는 잠시 망설이다가, 어차피 해야 할 말이라고 생각하여 차분하게 말을 이었다. 괜히 잘 모르는 곳에서 시간을 끌었다가 난감해지느니 처음부터 돌파하는 것이 낫다는 판단에서였다.

“사실은…….”

“말씀하십시오.”

“……제가 임신 중입니다.”

켄의 눈이 커졌다. 그녀는 두 손을 모아 쥐고 간절하게 말했다.

“당연히, 당연히 숙부님의 아이는 아닙니다. 낳아서 키우고 싶습니다.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켄은 잠시 생각하다가, 천천히 대답했다.

“배가 불러 오면 남들에게 일단 숨기는 것이 좋겠습니다. 아버님은 아이를 낳을 수 없는 몸이시고 모든 영지 주민들이 그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아이를 낳고, 양자로 들이는 것이 가장 깔끔합니다. 아메탄 왕국에 있는 친구의 자식이라고 하면 모두 수긍할 것입니다.”

“양자요?”

그의 차분한 대답에 아셰는 불안한 시선을 어쩌지 못하며 물었다.

“만일 남자애라도 태어난다면…… 그렇다면 켄의 계승권을 위협하지 않습니까? 이 아이는 이 영지와 아무 관련이 없습니다.”

켄은 사람 좋게 웃어 보였다.

“제가 혹시라도 잘못되면 영지를 맡을 사람이 있어 다행이지요. 혹여나 저보다 더 뛰어난 아이라면, 저는 미련 없이 마을 학교에서 활쏘기나 가르치며 살렵니다.”

아셰는 가만히 눈앞의 청년을 바라보았다. 이 청년이 유독 위기의식이 없는 건지, 아니면 영지 전체가 이런 평온한 분위기인 건지, 그도 아니면 리스 공국 자체가 이렇게 느슨한 나라인 건지 알 수가 없었다. 만일 샤틴이 이런 목가적인 분위기에서 컸다면, 아메탄 왕궁으로 와서 적응하지 못 하고 미치게 된 것도 이해가 갔다.

“그럼 여독을 푸시고, 이따 저녁 식사를 함께 하도록 하죠. 아버님을 숙부님이라 부르신다면, 어쨌든 저희는 사촌의 위치가 됩니다. 편히 대하세요. 식구가 늘어난다는 것은 무조건 기쁘고 따뜻한 일이지요. 곧 조카가 태어난다면 이 성에도 어린아이의 웃음이 들리겠군요.”

그녀는 가만히 켄을 바라보았다. 켄이 편안하게 웃어 보이며 일어섰다.

“마침 제 방의 바로 맞은편 방을 고르셨습니다. 필요할 때 부르세요. 아, 도서관은 위층에 있습니다. 하지만 책이 많지는 않아요.”

“예……. 그럼 외출은 누구에게 허락을 받으면 될까요?”

“……네?”

켄은 잠시 멍하니 그녀를 바라보다가, 웃음을 터트리며 말했다.

“그거야, 아셰의 ‘자유’입니다. 하지만 식사를 거르신다면 주방의 에타에게 말씀하시는 게 식량을 절약하는 데 도움이 될 겁니다. 늦게 들어올 예정이라면 집사인 벤에게 미리 말씀하시면 문을 잠그지 않겠지요.”

자유가 있다는 뜻이었다. 그동안 갇혀 있었던 아셰는 자신에게 찾아온 행운에 머리가 어지러울 지경이었다. 갑자기 인생이 희망으로 번득이는 것 같았다. 그녀가 이렇게 따뜻하고 안전한 곳에 올 줄은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그녀는 켄이 나간 문을 한동안 바라보며 환희로 가득 차 숨을 몰아쉬었다.

‘아가야, 아직 방심하기에는 이르지만…….’

그녀는 배를 쓰다듬으며 생각했다.

‘내 예감이 맞다면, 이곳에서 너와 함께 살 수 있게 되어 얼마나 기쁜지 몰라. 지금 내가 본 인상이 정확하다면 켄은 네게 정말 좋은 삼촌이 되어 줄 테고……. 안전한 영지를 뛰놀면서 나보다 훨씬 더 자유롭게, 사랑 받으며 무럭무럭 자라면 되겠다. 숙부님은 많이 늙으셨지만, 원래 노인들이 아기를 예뻐한다는데……. 얼른 너를 보고 싶다. 이단을 많이 닮았을까? 눈매는 나를 닮았으면 좋겠는데…….’

햇빛이 따스하게 들어와, 그녀는 창틀에 기대어 바깥 풍경을 바라보았다. 화려하고 세련된 아메니티와는 전혀 다른 풍경이었다. 저 멀리 푸른 바다가 넘실대고, 아메탄에서는 100년도 더 전에 사라진 풍차가 느릿하게 돌고 있었다. 길가에 마법구는 하나도 보이지 않았고 푸른 초원들 사이로 젖소들이 풀을 뜯으며 방울 소리가 울렸다. 투박하고 오래된 집들에는 알록달록한 꽃들이 창틀에 장식되어 있었다. 아이들 한 무리가 꺄르륵 웃으며 어디론가 뛰어갔다.

‘이단은…….’

그녀는 먼 바다를 바라보며 생각했다.

‘내 소식을 들었을까…….’

그녀가 혼인했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어쩌면 그는 해방감을 느꼈을 수도 있다고 생각하자 그녀는 조금 쓸쓸해졌다. 사실 아셰와 이단은 한 달 동안 아셰의 필요에 의해 몸을 섞은 것밖에 없었다. 끝이 다가왔을 때, 서로가 이별에 아쉬워 충동적으로 사랑을 말했던 걸지도 모른다. 마치 헤일리가 봐 준 카드점의 내용처럼, 불같이 화려하고 치열하지만 찰나에 불과한 감정. 카드점이 생각나자, 그녀는 갑자기 드는 기시감에 표정이 굳었다.

‘왕녀님은 어디론가 떠나게 되는데, 그곳에서 계속해서 이방인으로 남으실 거예요.’

그때는 그녀가 떠날 수 있다는 생각조차 하지 못해서, 당연히 엉터리라고 생각했다.

‘이 카드는 마음가짐을 뜻하기도 하는데, 왕녀님의 마음이 끝내 정착하지 못한다는 의미이기도 하지요.’

말도 안 돼. 아셰는 애써 생각을 지우며 배에 손을 얹었다. 만일 이곳이 정말로 어릴 때부터 내가 꿈꾸던 작고 평화로운 영지라면, 나는 꼭 여기에 정착할 거야. 내 친척들과 함께 안전하게 내 아이를 키울 거야. 이방인으로 남지 않고, 반드시 이곳에서 정착하고 말 거야. 벌써부터 아메니티의 왕궁보다 훨씬 더 마음이 편한 곳인데……. 그녀가 아주 오래 전부터 원하던 삶인데……. 그녀는 잡념을 없애기 위해 거세게 고개를 저었다.

* * *

아셰가 리스 공국의 작은 영지, 캐넌에 온 지도 한 달이 흘렀다. 캐넌의 작은 성은 아메탄 왕궁과 비교할 수조차 없이 작고 낮지만, 눈부시게 하얀 건물에 동그랗게 올린 푸른 지붕이 그림처럼 아담하고 아름다운 모양새로 높은 언덕에 자리하고 있었다. 영지의 젊고 건강한 남성들 대다수가 제국에 지원군으로 보내졌기 때문에 켄은 마을을 돌아다니며 부족한 일손을 도우면서 하루를 보냈다.

캐넌은 평화롭고 역사가 오랜 곳이었기 때문에 대단히 논쟁이 될 만한 사건이 벌어지거나 하여 영주의 심판을 받아야 할 일은 거의 없었다. 켄은 곧 돌아올 겨울을 대비하여 마을 학교의 울타리를 튼튼하게 고치고, 떨어진 지붕을 메웠다. 가뜩이나 젊은 남자가 없는 마을에서 훤칠하게 잘생긴데다가 소영주이기까지 한 켄을 좋아하는 마을 아가씨들이 우르르 몰려 그의 뒷모습을 구경하다가 자기들끼리 까르르대며 흩어지곤 했다.

성에서 청량한 종소리가 울리자, 켄은 허리를 두드리며 일어나 기지개를 켜고 성으로 향했다. 점심 식사를 할 시간이었다. 마을 처녀들이 자신의 집에서 먹자고 팔을 이끄는데도 그는 겸연쩍게 웃으며, 아버지가 적적해하니 식사는 함께 해야 한다고 대답했다. 그러나 그의 발걸음은 바로 성으로 향하지 않고, 돌아가는 길목에 있는 ‘아스의 언덕’으로 향했다.

[다음 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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