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화.
“총독님, 제발.”
“사브르.”
그가 눈을 번득이며 말했다.
“5만 명의 군인들도 할 수 없는 일을 내가 혁명군을 위해 하겠다고 하는데, 대체 너는 왜 내게 3일의 시간도 주지 못한다고 하는 것이지? 히치 해협은 심지어 황제와도 멀어.”
“혁명군의 정신은…… 마법에 이기는 인간의 저력입니다.”
“하지만 일단 이기고 봐야 할 것 아닌가. 목적으로 가는 길 중 하나의 수단일 뿐이야. 그러니 다수결에 맡기자는 거고.”
“결과를 이미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의도가 있는 다수결은 공화주의의 약점을 이용하는 것밖에 되지 않습니다.”
사브르의 눈에 참담함이 비쳤다.
“다수결이 신념을 대변하지는 않습니다. 모두 옳지는 않고요.”
“나는 다수결에 의해 선출되었다. 빙빙 도는 대화는 그만하지. 군사 회의를 소집해.”
* * *
켄은 커다란 배가 항구에 들어오자 깜짝 놀라 세 명 남은 하인들을 데리고 뛰쳐나갔다. 이미 캐넌 영지 인구의 절반은 항구로 구경을 나간 것 같았다. 사람들을 헤치고 나간 켄은, 지팡이를 짚으며 훨씬 더 늙어 보이는 얼굴로 선박에서 내리는 에곤을 급히 부축했다.
“이, 이게 다 뭡니까?”
“하인들을 시켜 성에 옮기고 정리하거라. 오늘 밤 재고를 정확하게 파악해서, 내일부터 식구 수에 맞추어 영지 주민들에게 나눠줘.”
켄은 오랜 항해에 지쳤을 하인들을 빼고, 그 자리에서 자신을 도와줄 영주민 몇 명을 골라 배에서 식량을 내리기 시작했다. 생각보다 많은 양이 들어 있어 스무 명도 족히 넘는 사람들을 더 동원해야 했다. 작은 항구가 오랜만에 북적이며 생기가 돌았다.
“소영주님! 이거, 밀이 아주 무거운데요?”
“그럼 스미스 씨에게 드리면 되겠어요. 스미스 씨가 항상 곡식에 짓눌려 보고 싶다고 하셨잖아요?”
청년들이 껄껄 웃었다.
“훈제 고기는 겐지에게 넘겨! 매일 푸줏간에 냄새를 맡으러 오니까!”
“이건 설탕이군요. 입자가 이렇게 고운 건 처음 봅니다.”
“샤틴 공주님께 가신다고 하지 않으셨어요? 우리 샤틴 공주님이 아메탄에서 상당히 총애를 받나 봅니다!”
“글쎄요, 제가 알기로 샤틴 공주님의 부군이 작년에 돌아가셨는데 어찌 된 일인지……. 아메탄 왕국은 마법이 발달하여 제국보다 부유하다는데 그게 사실인가 봅니다. 그래도 그렇지 이건 정말 상상 이상의…….”
켄은 설탕이 가득 든 상자와 밀 한 포대를 번쩍 들다가, 조심스럽게 배에서 서성이는 여자를 보고 깜짝 놀랐다. 그는 그렇게 아름다운 여자를 처음 보았다. 반짝이는 금발 머리가 구불구불하게 늘어져 있었으며, 고급스러운 실크를 몇 겹이나 덧댄 원피스를 입고 있었다. 동그랗게 푸른 눈은 한없이 바라봐도 좋을 만큼 깊었으며 살결이 희고 고왔다. 오랜 굶주림에 지친 영지의 사람들과는 다르게 뽀얗게 살이 올라 있었다.
“누, 누구……시죠?”
“아까 소영주님……이라고 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그녀가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영주님께서, 소영주님을 따라 성으로 오라고 하셨어요.”
그를 둘러싸고 있던 영지 사람들이 키득거리며 수군거렸다. 켄은 아주 오래 전부터 에곤의 양자로 자랐으며 당연히 향후 캐넌 영지를 물려받을 남자로 인정받고 있었다. 영지의 그 누구보다도 말을 잘 탔고, 백발백중의 활 솜씨를 가졌으며 키가 훤칠했다. 머리카락은 평범한 갈색이었지만 눈은 아름다운 초록색이었고, 목소리가 낮고 음색이 좋아 노래를 잘했다.
하지만 그런 것들 때문에 그가 소영주로 인정받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켄은 영지의 주민들과 스스럼없이 잘 어울렸으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원칙을 지켜 공정하게 매사를 돌보고 일처리가 깔끔했다. 그토록 캐넌 영지가 사랑하는 남자, 켄은 스물다섯이 되도록 장가를 가지 못했는데 군주로부터 허가장이 나오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번거로울 일도 아니지만 원래 리스 공국의 군주는 일처리가 느리다고 소문이 자자한 사람이었다. 그러면서 제국에 내란이 일어나기까지 하니 허가장과 같은 자질구레한 일들은 우선순위에서 밀려 버리고 말았다.
하지만 이제 그는 진정으로 소영주가 되었다. 에곤이 아메탄으로 간 사이 군주의 직인이 찍힌 허가장이 도착했기 때문이었다. 주민들은 키득대며 영주님이 어떻게 알고 소영주의 짝을 데려왔다며 자기들끼리 수군거렸다. 켄은 목덜미가 붉어지는 것을 어쩔 줄 모르며 바보같이 물었다.
“저를…… 따라서요?”
“네.”
그녀가 심호흡을 하고, 단호하게 말했다.
“아셰 사이나카라 아메탄입니다. 방금 아메탄에서 아버님과 혼인식을 올리고 왔습니다.”
키득거리던 분위기가 한순간에 찬물을 끼얹은 듯 조용해졌다.
“부탁할 것이 있으면 소영주님께 하라고 하시더군요. 혹시 남는 공간이 있다면, 제 방을 하나 주셨으면 합니다. 햇빛만 잘 들면 됩니다.”
“아…… 네…….”
켄은 어색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아셰는 주위를 둘러보더니, 차분하게 말했다.
“여기서는 소영주도 짐을 함께 옮기는군요. 제가 몸이 좋지 않아 무거운 것은 들지 못하지만 버터 상자 정도는 옮기겠습니다.”
에곤은 침대에 기대어 숨을 헐떡였다. 오랜 여행과 예상하지 못한 일련의 사건들 때문에 몹시 지친 상태였다. 아셰와 켄이 그의 침대 맡에 조용히 앉아 있었다. 켄이 건넨 양자 등록 허가장을 본 에곤은 긴 한숨을 내쉬었다.
“며칠만 일찍 왔더라도, 이 사달은 나지 않았을 터인데…….”
“어, 어떻게 된 겁니까?”
켄이 옆자리에 다소곳하게 앉아 있는 아셰를 곁눈질하며 말했다.
“편지를 쓰려고 했지만…… 도저히 어떻게 써야 할지 알 수가 없어 그냥 왔다. 나는 몹시 지쳤으니, 자세한 사정은 왕녀님께 듣도록 해라. 샤틴의 딸이다.”
이름에서 눈치챘지만, 정말로 ‘왕녀님’이라는 말을 듣자 저절로 입이 벌어졌다. 아셰가 차분하게 말했다.
“왕녀님이라뇨. 이름을 부르고 하대하셔도 됩니다. 이제 저는 아메탄의 사람이 아닙니다.”
“……지금 당장은, 도저히 안 되겠군요.”
에곤은 고개를 저으며 참담한 표정으로 말했다.
“왕녀님, 이 노인과 설마 방을 같이 쓰실 생각은 아니시겠지요. 저는 샤틴이 어릴 때 대부를 해 줄 뻔했던 사람입니다. 차마 손녀뻘 되는 샤틴의 딸과 동침할 생각은 들지 않습니다. 물론 그러고 싶어 하는 노인이 있을 수도 있겠다마는, 저는 아닙니다.”
“……그, 그렇다면…….”
아셰는 고개를 숙였다.
“가, 감사합니다.”
“왕녀님 덕분에 저희 영지의 주민들이 이번 겨울을 무사히 견딜 수 있고, 배부르게 먹을 수 있으면 그걸로 저 역시 감사드릴 뿐입니다.”
에곤이 쿨럭이며 한숨을 쉬자, 아셰는 빨리 일어나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에곤은 힘들게 숨을 내쉬며 말했다.
“샤틴의 딸이라고 생각하겠습니다. 샤틴이 여섯 살일 때, 캐넌 영지에 놀러 와 이 성 마당을 뛰어다니곤 했습니다. 친척에게 몸을 의탁했다 생각하시고 편히 지내십시오. 촌수는 다소 멀지만 이곳은 왕녀님의 외가입니다.”
그 말에, 아셰는 울컥 눈물이 나올 뻔했다. 그녀에게 외가가 있다는 생각은 단 한 번도 해 보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엄마였던 샤틴의 정신이 불안정했으니 그녀의 고향이 궁금했을 리가 없었다.
“나는 이제 나이가 들어 대다수의 영지 관리는 나의 아들, 켄이 하고 있습니다. 뭐든지 켄과 의논하시는 것이 좋을 겁니다. 아, 문서상으로는 어쩔 수 없지만, 절대 나를 남편이라고 칭하지 마십시오. 부탁드립니다. 이 나이에 왕녀님과 혼인한 것 자체가 저는 남사스럽습니다.”
“그, 그러면…….”
에곤은 인자하게 웃으며 말했다.
“적당히, 숙부님 정도가 좋을 듯싶습니다. 샤틴이 저를 그렇게 불렀지요.”
아셰는 켄이 보여 준 세 개의 빈방 중에 가장 햇볕이 잘 들고 넓은 방을 골랐다. 침대 옆 공간이 충분한 것을 보아 나중에 아기 침대를 놓아도 될 것 같았다.
“왕궁이 어떤 곳인지는 알 수 없지만…….”
켄은 테이블에 앉으며 말했다. 그는 리스 공국의 군주조차도 마주한 적이 없었다. 고급스러운 옷에 기품이 배어 있는 자세로 앉아 있는 아셰의 앞에서 그는 모든 것이 당황스러웠다.
“여자의 시중을 들 수 있는 하인은 현재 성에 없습니다. 알아봐 드릴 수는 있어도, 시녀 일을 하던 사람이 없어 마음에 안 드실 수 있습니다.”
“소영주님께서는, 시녀를 두고 계신가요?”
“……제가요?”
켄이 깜짝 놀라 반문했다.
“아, 아니죠.”
“그럼 저도 두지 않겠습니다. 제 몸 하나는 간수할 수 있습니다.”
아셰는 웃으며 대답했다.
“어, 어찌 된 일인지 말씀해 주실 수 있으십니까. 사실 영지 전체가 발칵 뒤집힐 정도로 놀라운 일이라…….”
“대외적으로 알려진 것은…… 후계가 없어 고민이던 영주님이, 감금당해 있던 제게 아메탄까지 직접 오셔서 청혼을 넣은 것이지요.”
“그럴 리 없습니다.”
켄은 미간을 찌푸리며 바로 부정했다. 너무나 빠르게 나온 대답 때문에 아셰는 살짝 장난을 치고 싶은 기분이 들어, 다소 놀리는 투로 말을 이었다.
“왜요? 영주님께서 정말로 자신의 피를 이은 아들에게 영지를 물려주고 싶으셨을 수도 있지요. 아시다시피, 68세라고 하여 여자와 동침이 불가능하지는 않답니다.”
“다 맞는 말이지만, 그래도 아버님이 그러실 분은 아닙니다.”
“저도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친오라비를 독살할 여자는 아니었죠.”
켄이 놀란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아메탄은 멀리 있는 왕국이고 상대적으로 부유하다고 하나 어쨌든 제국의 입김에 납작 엎드린 약소국이었기 때문에 리스 공국의 작은 영지까지 아메탄 왕가의 소문이 닿지는 않은 듯했다. 어차피 에곤이 알고 있는 사실이니 켄도 알게 될 것이다. 괜히 좋은 인상을 심어 두어 친해졌다가 나중에 차갑게 변하는 얼굴을 보고 싶지 않아 그녀는 천연덕스럽게 말을 이었다.
“저는 제 친오라비를 독살했고, 그래서 감금되어 있던 처지랍니다.”
그녀가 켄의 선한 눈을 보고 씩 웃었다.
“제가 하고 싶은 말은, 그러니까, 그 누구도 그럴 만한 사람은 없다는 거예요. 항상, 인생은 그럴 리 없다고 믿었던 것에게서 배신당하는 법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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