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화.
아셰는 천천히 배에 올라타며 손을 흔들었다. 약속이라 하니 마음 깊숙한 곳에 묻어 둔 한 남자가 생각났다. 한 달, 짧았다면 짧고 길다고 하면 길었던 시간들이었다.
‘그 안에 내란을 끝내고 내가 임시 총독 자리에 앉으면.’
배가 천천히 바다를 가르며 출발했다.
‘네 오라비에게 너를 달라고 하지.’
아셰는 이제 캐넌의 안주인이 된다. 그렇다면 이단이 이미 유부녀인 자신을 달라고 더 이상 주장할 수가 없다. 그의 말에 따르면, 공화국의 지도자 역시 법을 지켜야 한다고 했다. 황제처럼 밑도 끝도 없이 ‘그 여자를 달라’라고 주장하여 데려올 수 없다는 말이었다.
‘네 궁의 닫힌 천장이 아니라, 푸른 하늘과 넓은 잔디를 함께 보고 싶어.’
그러고 보니 그와 함께 밝게 빛나는 태양을 본 적이 없었다. 처음 만났을 때도 밤이었고, 7년 후에 재회했을 때에도 항상 캄캄한 밤이 되면 아셰의 작은 침대에서만 그를 만났다.
‘널 사랑해. 4년 반 안에, 내가 청혼을 하면 기쁘게 받아 줘.’
그때에는 그 방법이 최선이었다. 그녀는 멀어지는 아메탄을 보며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았지만, 멍하니 귓가에 남은 낮은 목소리를 떠올리고 있었다.
‘너만 있으면 돼. 난 너만. 매일같이 너를 안을 수 있으면 그거면 돼.’
그는 그녀가 언제나 그곳에 있을 것이라 예상하고, 그의 약속만 하고 떠났지만…… 이렇게 될 줄은 그 누구도 알지 못했다. 막연히 그 약속을 기다리기엔 너무나 많은 변수가 있었다. 이단의 패배, 이단의 변심, 다니엘의 변심, 궁 안의 위험……. 아이만을 생각하면 이 선택이 최선이었다.
그녀는 배에 손을 얹고, 크게 손을 흔드는 리젠에게 웃어 보였다. 아이를 제 손으로 키울 수 있는 것, 마음 아릴 일 없이 언제까지나 곁에 있어 줄 수 있는 것, 삶의 끝에서 선물처럼 찾아온 이 생명을 지키는 것……. 그런 것들을 그녀는 포기할 수 없었다. 만일 이단이 패배하기라도 한다면, 황제는 대륙 끝까지 찾아와 이단의 씨를 죽이고 말 것이다. 대륙 구석의 작은 영지로 가는 것은 그런 면에서 마음이 놓이는 선택이기도 했다.
‘아가, 이제는 나와 너뿐이야.’
바닷바람이 그녀의 금발 머리를 흐트러트렸다.
‘이젠 네가 나고, 내가 너니까.’
* * *
이단은 벌떡 일어섰다.
“뭐?”
사브르는 깜짝 놀라 뒤로 넘어질 뻔했다. 원래 사브르는 스타람 지원군의 부사단장이었으나 사정상 사단장을 맡아 이단와 합류한 차였다. 그러나 예상외의 사건으로 원래 사단장이었던 리한이 돌아와 위치가 애매하게 되었는데, 원래부터 그의 진정한 재능은 정보 수집에 있었기 때문에 이단과 몹시 가까워진 그는 이단의 정보원으로 활약하며 이런저런 대륙의 정보를 알려 주는 역할을 하게 되었다. 그는 아메탄의 ‘수사국’을 몹시 관심 있게 보았으며, 정확한 정보는 확실히 전세에 중요하다는 생각을 했기 때문이었다.
황제가 부족한 것이 있다면 바로 그 정보력이었다. 마약과 미향에 찌들었으니 합리적인 판단을 할 수 있을 리 없었다. 만일 빠른 정보력만 있었어도 한때 아메탄에서 개발되었다고 알려진 마력증폭약을 얻어내 전세를 역전시킬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황제는 아주 뒤늦게서야 그런 약의 존재를 알았고, 이미 누군가에 의해 다시는 제조할 수 없는 약이 되었다.
그렇게 사브르는 온 대륙에 사람들을 퍼트려 이단의 눈과 귀가 되어 주고 있었다. 그가 이단의 격한 반응에 놀라 더듬거리며 말했다.
“아, 아셰 사이나카라 아메탄 왕녀가…… 리스 공국의 영주와 혼인했다고요.”
“……그럴 리 없어.”
이단은 고개를 저었다.
“4년 반 동안 갇혀 있어야 할 여자야. 그런데 혼인이라고?”
“자세한 회의 기록을 알고 싶으신가요?”
사브르는 이단이 심상치 않은 반응을 보이자, 문서를 뒤적이며 천천히 말을 이었다.
“어디 보자…… 리스 공국의 캐넌 영지……. 영주는…… 68세군요.”
이단이 어이가 없다는 표정으로 사브르를 노려보았다. 그는 캐넌이라는 영지의 이름도 처음 들어 보았다. 게다가 68세?
“제국의 무리한 공물로 인해 인구가 절반 가까이 줄었다는군요. 후계자가 없어 혼처를 알아보던 차에…… 당연히 가난한 노인에게 시집갈 여인은 없고…… 살인자로 갇혀 있던 아셰 왕녀에게 청혼, 윌리엄의 미망인인 로즈리의 강력한 주장으로 인해 혼인이 성사되었다고 합니다.”
“…….”
이단이 초조하게 막사 안을 걷기 시작했다. 테이블 중앙에 놓인 대륙 지도에서 리스 공국을 찾는 그의 눈이 번득였다. 사브르의 보고가 계속되었다.
“보고에 의하면 회의 때 아셰 왕녀가 몹시 반항했다고 하는군요.”
“……대체 캐넌이 어디 붙어 있는 곳이지? 지도에도 안 나와 있군.”
“작아서 그럴 겁니다. 축척이 다른 지도책을 봐야겠군요.”
“사브르.”
그는 고개를 들고 낮게 말했다.
“……다음 전투가 언제지? 난 캐넌에 가야겠다.”
“예? 캐넌에요?”
사브르는 깜짝 놀라 반문했다. 그는 이단과 아셰 사이에 무슨 일이 있음을 직감했다. 일전에 혼인 동맹을 제안했을 때 곁에 두고 싶은 여자가 있다며 단박에 거절한 것도 아셰와 관련되어 있을 가능성이 높았다.
“총독님, 지금 우리는 대륙 한복판입니다. 캐넌에 가려면…….”
그가 리스 공국으로 향하는 길을 지도에서 죽 손가락으로 훑었다.
“수도 엔리히를 지나야 합니다. 황제의 본거지죠. 게다가 지금 이 시기에, 총독님이 캐넌에 가시겠다고요? 그게 말이나 되는 소리입니까?”
“……그녀를 데려올 거야.”
그의 눈이 번득였다.
“총독님, 착각하지 마십시오.”
사브르가 날카롭게 말했다.
“총독님을 따르는 이 수많은 군대들은, 이단 아르마스 엔리히를 따르는 것이 아니라 공화정을 따르는 겁니다. 저 역시 총독님의 여자를 구하러 리스 공국에 가지는 않을 겁니다.”
“……나만 가면 된다. 내가 누굴 데려간다고 생각하는 거지?”
“총독님은 우리의 구심점입니다.”
그가 고개를 저었다.
“그 정도로 멍청한 사람을 우리가 총독으로 추대했다고 생각하지 않게 해 주십시오. 전투는 이제 시작이고, 아주 지리멸렬한 싸움이 될 것입니다. 황제의 마력 흐름을 가장 잘 읽을 수 있는 분이 총독님이신데 지금, 총독님이 전쟁터를 떠나시겠다고요?”
“말을 타고 밤새 달리면 3일이면 돼.”
“말이 됩니까?”
사브르가 그의 어깨를 잡았다. 그의 눈에 이미 초점이 없었기 때문이다. 사브르는 그의 표정에서 섬뜩함을 느끼고 숨을 몰아쉬었다. 이단은 몹시 신사적이고, 차분했으며 합리적인 사람이어서 인망이 높았다. 여러 상황에서 자비롭고, 사람을 극한까지 몰아가지 않으며, 의리와 약속을 중요시하는 면모가 보였기에 많은 사람들의 지지를 이끌어 냈다. 하지만 그와 가장 가까이 있는 사브르는, 가끔 나타나는 그의 위압감에 깜짝깜짝 놀랄 때가 있었다.
“당신을 잃으면 혁명군은 크게 무너집니다. 제국에서 노리고 있는 1순위가 총독님이지요. 제발 책임감 있게 행동하세요. 게다가 제국 안에서는 황제에게 당신의 마력이 추적당합니다. 홀로 움직이다가는 개죽음 당해요.”
“내 여자가…….”
이단이 사브르의 눈을 똑바로 마주보며 으르렁 거렸다.
“내 여자가 70 먹은 노인의 씨를 받으러 끌려가고 있어. 그런데 책임감 있게 행동하라고? 제 여자 하나 지키지 못하는 남자가 대체 무슨 책임감을 논한단 말인가? 4년 반 안에 데려오겠다고 약속했는데, 고작 두 달도 안 되어…….”
“가신다고 해서, 뭘 어쩌겠다는 말씀입니까.”
사브르가 그제야 전말을 가늠하고 탄식을 내뱉으며 말했다.
“가서 이미 혼인까지 올린 여자를 납치해 와요? 대체 총독님과 그 여자가 함께 있을 정당한 이유는 뭡니까? 옳은 것과 정의를 추구하는 혁명군의 수장이 남의 여자를 힘으로 데리고 온다는 게 말이나 됩니까? 차라리…….”
일단 이단을 달래야 한다고 생각한 그가 낮게 말했다.
“적절한 시기에 그 노인을 죽이죠. 그러면 아셰 왕녀님은 미망인이 됩니다. 그리고 혁명이 성공하여 전쟁이 끝나면 곧바로 청혼을 넣어 데려오세요. 그 과정에서 대외적으로 정당하지 않은 것은 없습니다. 그게 낫지 않겠습니까?”
이단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사브르가 지적한 부분은 그 역시도 알고 있었다. 감정에 치우쳐 우기는 대신 그는 한참 동안이나 지도를 유심히 바라보았다. 그가 시카 성을 가리키며 낮게 말했다.
“이번 전투가 마무리될 때까지 얼마나 걸릴까.”
“아무리 빠르게 잡아 봤자 보름이지요.”
“그럼, 그 후 내가 직접 출정한다. 이곳으로 갈 거야. 그 이상은 못 기다려. 일단 군사 회의를 소집해야겠어.”
“……지난 군사 회의 때, 아직 군대가 충분하지 않아 어렵다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마법을 쓰면 돼.”
“진정한…… 혁명이 아닙니다. 그럼 핏줄의 권능으로 전쟁을 이기고 있는 황제와 다를 게 무엇입니까. 황제의 마법을 황자의 마법으로 이기는 건 역사에 도움이 되지 않아요. 멀리 돌아가더라도 우리 일반인의 힘으로 이겨야 합니다. 이미 다 결정된 사안이었잖아요.”
“다수결로 결정하기로 하지.”
“다수결이라면 당연히 마법을 사용하자고 하겠죠! 당장 승리가 눈앞에 보이는데. 이전까지만 해도 대다수가 총독님의 마법을 쓰자고 주장하지 않았습니까. 한 번만 쓰자고, 주요한 전투에서 한 번만 쓰자고 시튼 장군님이 말했을 때, ‘한 번’은 결국 여러 번이 된다는 걸 꼬집은 리한 사단장님의 대답을 상기해 보십시오.”
“……시카 성만 손에 넣으면 남부가 안전하게 평정되고, 그 단단한 요새를 얻게 된다. 황제는 지난번에 크게 마법을 써서 한동안 출정하지 못해. 그럼 히치 해협을 통해…… 리스 공국으로 갈 수 있어.”
“……총독님.”
사브르의 눈에 경악이 스쳤다.
“시카 성에서 안전하게 군대를 지킬 수 있어. 나는 아셰를 만나야겠다. 당장 데려오지 못하더라도, 나를 믿으라고 한마디는 해야 해.”
“……편지를 보내십시오. 제게 전달하시면 어떻게든 보내겠습니다. 이미 캐넌에 정보원 하나를 보냈으니까요.”
“내 눈으로 봐야겠어. 그녀가 삶을 체념하고 비상이라도 삼키기 전에.”
[다음 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