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7화 (196/256)

  

37화.

“응?”

“……혼인해.”

아셰의 눈동자가 정처 없이 흔들렸다. 기다려 달라고, 어떻게든 다니엘에게 자신을 달라고 하겠다던 이단의 목소리가 생생하게 귓가에 울리는 것 같았다.

“누, 누구랑?”

“아무리 거지같은 영지라고 해도 널 평범한 사람에게 보낼 수는 없어. 너는 아메탄 왕족이니까. 당연히 영주에게 가야지.”

“……어? 뭐라고? 아까, 노인이라고 하지 않았어?”

“네가 선택해. 정확히는 68살이야.”

다니엘은 냉정하게 말하고 일어섰다. 아셰는 그의 얼굴에서 이상한 서늘함을 느꼈다.

“로즈리에게는 그럴듯하게 말할 테니까. 넌 말도 안 된다고, 못 가겠다고, 죽어도 궁에 버티겠다고 오열해. 그래야 로즈리는 널 보내 줄 거야. 원래 너는 공국의 그런 변두리 영지에 갈 정도의 신분이 아니야. 대외적으로는…… 로즈리가 너무나 히스테리를 부려 찢어지게 가난한 70세 노인에게 억지로 시집을 보냈다고 공표할 거야.”

“……아…….”

“물론 왕국의 골칫거리를 데려가는 영주에게는…… 그만큼의 지참금을 함께 보내야지. 영지의 주민들이 굶어 죽을 것 같아 이 먼 길을 찾아온 영주가 거부하지는 않을 테고. 거기서 그의 아이로 속여 낳아 키워.”

“고, 고마워, 다니엘.”

아셰는 빠르게 말했다. 그녀의 얼떨떨한 얼굴을 바라보며, 다니엘은 한숨을 쉬고 낮게 말했다.

“……너무 힘들면 돌아와. 그 땐 로즈리도 조금 누그러지겠지.”

“말도 안 됩니다.”

에곤은 너무 놀라 지팡이를 떨어트릴 뻔했다.

“아무리 멀어도 그 애는 저와 친척입니다.”

“리스에서는 사촌부터 혼인을 허락한다고 들었습니다.”

다니엘은 온화하게 웃으며 말했다. 하지만 에곤은 통치자의 웃음이 자비로움을 뜻하는 것은 아니라는 걸 경험으로 알고 있었다.

“게다가 저는 이제 곧 70이 됩니다. 차라리 제게 아들이 있으니……. 제 아들이 스물다섯이니, 오히려 그 나이가 맞을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그리고 캐넌은 아름답지만, 작고 조용한 영지입니다. 왕녀님이 계실 곳이 아닙니다.”

“아들? 슬하에 자식이 없다고 되어 있는데.”

“호, 호적에 아직 올리지 못했을 뿐이지 제 양아들입니다. 지금 군주님께 허가장을 올렸으나, 제국의 전쟁 때문에 워낙 바쁘시어 처리가 늦어지는 것뿐입니다. 실제로 영지의 주민들도 인정하고 있으며, 제 후계자로 아주 옛날부터 컸습니다.”

“허가장이 나올 때까지 기다려 줄 시간이 없습니다.”

노인의 손이 떨렸다. 다니엘은 다시 한 번 몸을 숙이며 말을 이었다.

“아셰는 이미 동의했습니다. 아셰를 위해서라면 쓸데없는 거절입니다. 그리고 그대의 군주가 그렇듯이 나도 아주 바쁩니다.”

에곤은 지팡이에 몸을 기대어 한숨을 쉬었다. 다니엘은 그의 말을 더 이상 듣고 싶지 않다는 듯 빠르게 말했다.

“그대만 결정하면 됩니다. 커다란 배와 그 배에 식량을 가득 실어 지참금으로 보내지요. 아메탄 왕국에서 처치가 곤란한, 직계존속을 살해한 왕녀를 데려가는 대신 영지의 가난을 해소하느냐…… 아니면 환금성조차 보장되지 않은 패물 몇 개를 가져가느냐…….”

“그, 그것이…… 하지만…….”

다니엘은 이럴 때에 어떻게 쐐기를 박는지 이미 잘 알고 있었다.

“물론 싫을 수 있지요. 인정합니다. 아, 아셰는 독살에 능하니 그 애가 우려 주는 차를 마시지 않는 편이 좋을 겁니다. 영지민들과 겨울을 넉넉하게 보내는 것보다, 살인자를 아내로 맡기에 껄끄러운 마음이 더 크다면 어쩔 수 없지요.”

“오늘내일하는 노인네가 독살과 무슨 상관입니까. 그래도 이건 모양이 너무…….”

“단순히 영주의 모양이 좋지 않다는 이유만으로 식량을 거절하시는 것도 존중하겠습니다.”

에곤은 한숨을 쉬었다. 남사스러웠지만, 그리고 이런 생각은 정말 조금도 하지 않고 바다를 건너왔지만 커다란 배에 가득 채워 준다는 식량은 탐이 났다. 새로 태어났다는 푸줏간의 쌍둥이 아들을 생각하며 그가 눈을 감았다. 푸줏간의 주인이자 아이들의 아버지는 제국에 지원군으로 차출 당했다. 침묵을 지키는 그에게 다니엘이 씩 웃으며 말했다.

“청혼이 들어왔다고 하죠. 대외적으로, 영지의 후계를 잇기 위해 여기저기 알아보았지만 아내감을 찾을 수 없었다고, 그래서 감금 중인 아셰 왕녀에게 청혼을 넣으러 왔다고 하겠습니다.”

“……하…….”

노인은 몇 년은 더 늙은 것 같은 얼굴로 눈을 쓸었다.

“결혼식은 아메탄에서 올리고 가시지요. 조촐하게 아셰의 궁에서 조용히 진행하겠습니다.”

그 다음 일은 빠르게 이루어졌다. 왕가의 회의가 급히 소집되었고, 다니엘은 무표정으로 캐넌 영지에서 아셰에게 청혼이 들어왔다고 선언했다. 후사가 없는 70의 늙은 노인이 혼처를 알아보고 있는데, 당장 굶어 죽는 사람이 생기고 있는 작은 영지에 딸을 보내 주는 곳이 없어 살인으로 사형 선고만을 기다리고 있는 아셰에게 청혼을 넣었다는 설명이 이어졌다.

“아, 안 돼요…….”

아셰는 로즈리가 보란 듯이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난 이곳에서, 맛있는 것을 먹고 친구들을 만나며 살고 싶어……. 그런 늙은이랑 시골구석에서 어떻게 살아요? 난 절대 싫습니다. 전하, 제발 저를 보내지 마세요…….”

“하지만 네가 있으면 궁이 너무 시끄러워.”

다니엘은 냉정하게 말했다.

“궁에 있는 왕족에게 로즈리가 원하는 대우를 할 수도 없는 일이다. 네게도 나쁘지는 않아. 원칙적으로 네가 외국에 가면 국적이 옮겨져 우리는 집행권이 사라진다. 4년 반의 유예 기간도 사라져.”

“그게 무슨 소용이에요! 차라리 4년 반이라도 먹고 싶은 것을 실컷 먹으며 편하게 살겠어요! 당장 1년도 안 되어 그 외진 곳에서 굶어 죽게 생겼는데!”

로즈리가 찬성표를 던진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다니엘이 찬성표를 던지자, 아셰가 이렇게 되든 저렇게 되든 별 관심이 없던 다른 구성원들은 성의 없이 다니엘을 따라 찬성표를 던졌다.

그렇게 해서, 아셰는 며칠 후 리스 공국으로 가는 커다란 배를 타게 되었다. 아메니티에서 가까운 작은 항구에는 곡식과 훈제된 고기들이 가득 들어찬 배가 파도에 출렁거렸다. 그녀가 떠나는 날, 궁의 사람들은 죄인을 배웅할 수 없다는 연유로 인해 샤틴도 다니엘도 시녀들도 오지 못했다. 오로지 자유의 몸인 리젠만이 훌쩍이며 항구까지 마중을 나왔다.

“왕녀님…… 제가 휴가만 받으면 무조건 놀러 갈게요. 외로워서 거기서 어떡해요…….”

“특이한 풀을 찾으면 보관해 둘게. 리젠, 울지 마. 난 이제 자유도 있고, 4년 반이라는 끔찍한 기간도 없어.”

아셰는 붉은색 망토를 두른 채로 생긋 웃었다.

“그동안, 살아도 사는 게 아니었어. 왕궁에 갇혀서 죽을 날만 받아 놓고 사는 게 무슨 의미가 있겠어. 이제야 난 드디어 새롭게 삶을 사는 기분이야. 이건 비밀인데…….”

그녀가 리젠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

“로즈리의 동의를 얻기 위해 가기 싫은 척한 거야. 난 정말 기쁘게 가는 거야.”

“그, 그래도…….”

리젠은 목소리를 낮춘 채 지팡이를 짚고 난간에 힘들게 선 에곤을 슬쩍 바라보았다. 아무리 생각해도 40살이 넘게 어린 신부를 데려가는 저 노인이 정상이라고 생각되지 않았다. 아셰는 리젠의 표정을 보고 피식 웃으며 말했다.

“네 남편에게, 내가 허락했다고 하고…… 진실을 말해 달라고 해. 수사국 사람이니 당연히 내막을 알고 있을 거야. 아메탄에 일어난 일은 모두 알고 있는 남자잖아……. 그럼 저 사람이 그렇게까지 나쁜 사람은 아니라는 걸 알 거야.”

리젠은 아셰를 꼭 끌어안았다.

“그렇다고 해도 이렇게 헤어지는 것은…… 너무 슬퍼요, 왕녀님. 그렇게 외롭고 슬프고 외진 곳으로 보내는 제 마음이……. 정말…… 정말 죄송해요.”

“괜찮다고 몇 번을 말해.”

잠시 침묵이 흘렀다. 리젠은 잠시 머뭇거리다가, 낮게 말했다.

“시간이 지나니, 왕녀님을 고발한 것보다 더 마음에 남는 것들이 있었어요. 훨씬 더 가슴속에 안타까움으로 자리 잡은 것들.”

리젠의 어투가 침착해져서, 아셰는 그녀가 아주 오랫동안 이 말을 생각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었다.

“어느 날 왕녀님이 황제의 비가 될 것 같다고 했을 때…… 제가 축하한다고 했지요. 그 자리가 보통 자리냐고, 아드님이라도 낳으시라고…….”

아셰는 눈을 깜빡였다. 정작 자신은 그때엔 별다른 생각이 없었기 때문이다. 당연히 리젠은 제국과 황제에 대해서 잘 모르니 할 수 있는 말이라고 생각했고, 대충 대답하고 넘어간 것 같았다.

“가장 친한 친구인데, 제가 그렇게 말한 그 순간…… 왕녀님이 얼마나 외로우셨을까, 그런 생각을 했어요. 왕녀님, 왕녀님 말씀대로 저는 다시 돌아가도 진실을 밝히겠지만…… 그날로 돌아간다면 왕녀님의 손을 꼭 잡고, 윌리엄 태자님이 아닌 왕녀님에게 잘 된 일이 맞냐고 물어볼 거예요.”

“…….”

“사실은 그게 훨씬 더 죄송해요. 단단히 마음먹었던 커다란 사건보다, 고의는 아니었지만 무심했던 순간들이. 참 이상하죠? 왕녀님을 고발한 주제에, 말 한마디가 더 죄송하다고 말을 하지 못해서 언제나 숨겨 왔지만.”

담담한 그녀의 진심을 듣고 나서 아셰가 괜찮다고 더 이상 말할 수 없었던 것은, 리젠의 목소리에 그 어느 때보다도 짙은 슬픔이 묻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리젠이 그녀를 더 꼭 끌어안으며 속삭였다.

“왕녀님, 어떻게든 도와드리겠다고 한 건 진심이에요. 제 목숨을 걸고 맹세할게요. 저 멀리 있는 땅에서라도, 왕녀님을 도울 수 있는 거라면 무엇이든 하겠어요. 제가 수사국 직원은 아니지만, 한때 카이든과 수석을 다퉜던 재원이라는 것은 아시죠? 왕녀님께 도움이 될 일이 분명히 있을 거예요.”

“당연히 알지. 그 누구도 모를 거라고 생각했던 내 범죄조차 밝혀냈던 네 능력을 의심하지는 않아. 하지만…….”

아셰는 피식 웃으며 그녀의 등을 토닥였다.

“난 이제 아메탄의 사람이 아니야. 그런데 무슨 충성 맹세야?”

“충성 맹세가 아닌, 친구의 약속이에요.”

리젠이 눈물을 닦으며 미소 지었다.

“훨씬 더 믿을 만한 거죠.”

[다음 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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