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6화 (195/256)

  

36화.

“대체 누구야?”

“오빠, 약속해 줘. 제발…….”

“말해. 누구야?”

“때가 되면…… 때가 되면 말할게. 오빠, 제발…… 낳아서 키우게만 해 줘. 응? 로즈리 말대로 시녀들도 필요 없고, 그 어떤 왕족의 대우도 필요 없어.”

아셰는 절대 아이 아버지를 말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지금 다니엘은 이단에 대해 결코 좋은 감정이 없었다. 자비롭고 남을 해치기 싫어했던 그가 직접 죽여 버리고 싶다고 언급했던 남자였다. 시간이 흘러 이단의 힘이 세지고 권력을 갖게 되면, 그리고 아메니티의 캄캄했던 혼란이 조금 더 잊히면 그 때 말하는 것이 현명했다.

“그 아버지는 알아?”

“몰라…….”

“연락은 해 봤어?”

“내가 갇혀서, 연락을 어떻게 해.”

“당장 연락해서 내 앞에 무릎 꿇려. 수사국 사람을 보내 주지. 아니, 카이든을…….”

“……안 돼. 오빠, 그냥 할 수 있을 때까지는 내가 키울게. 오빠, 제발…….”

그녀는 다니엘의 앞에 무릎을 꿇으며 눈물을 뚝뚝 떨어트렸다. 다니엘은 그녀를 가만히 바라보고 있다가, 벌떡 일어서 비밀 통로를 통해 사라졌다.

“아이의 아버지는 이단 황자 같습니다.”

카이든은 어두운 표정으로 말했다. 다니엘은 카이든에게 은밀히 아셰의 임신 사실을 알리고, 남몰래 아버지를 조사해 달라고 부탁한 차였다. 최악의 결과에 다니엘이 탄식을 내뱉으며 이마에 손을 짚었다.

“다른 가능성은 없어?”

“먼저 시녀들을 심문했습니다. 이단 황자가 있던 한 달 동안, 아침에 찻잔이 두 개씩 나왔다고 하더군요. 당연히 시녀들은 전하께서 자주 왔다 가신다고 생각했다고 합니다.”

“……아셰는…….”

다니엘은 눈을 감고 중얼거렸다.

“내게 절대로 차를 내어 주지 않아.”

“그렇다면 시녀들이 볼 수 없는 곳, 비밀 통로를 통해 응접실에 왔던 것이고…… 저는 아주 예전에, 3왕자궁에서부터 아셰 왕녀님의 궁까지 통하는 비밀 통로밖에 알지 못해서, 전하의 도움을 받아 다른 비밀 통로를 알려 달라고 해야 하나 싶었지만…….”

비밀 통로는 왕족들만 알고 있는 비밀이었다. 아주 옛날, 3왕자였던 시절에 다니엘은 리젠에게 잘 보이고 싶어 리젠과 카이든에게 아셰의 궁으로 통하는 비밀 통로를 하나 가르쳐 준 적이 있었다.

“갑자기 3왕자궁에서 이단 황자가 생활했던 것이 떠올랐습니다. 왕녀님의 궁으로 통하는 비밀 통로를 조사한 결과, 검붉은 머리카락 몇 올을 발견해 낼 수 있었습니다. 아셰 왕녀님의 궁을 둘러싼 마력을 조사하니 거대한 방음 마법의 흔적이 보이더군요. 황족 이외에는 그런 마법이 가능하지 않습니다. 문제는 어떻게 그 비밀 통로를 알았냐는 점이죠.”

“……어떻게 드나들었는지는 둘만이 알겠지. 그게 중요한 건 아니야. 찻잔이 두 개씩 나온 아침이 잦았대?”

“거의 매일이라고 합니다.”

“아…….”

이 정도면 일방적인 겁탈이라고 보기도 어려웠다.

“그 배은망덕하고, 빌어먹을 개자식은…….”

다니엘은 이를 갈며 중얼거렸다.

“이 왕궁에 기어 들어와 7일간의 혼란을 만들고, 밀수꾼들에게 그 많은 돈을 갖다 주고, 산하기관이 열심히 창출한 아메니티의 부를 스타람에 흘러 들어가게 한 것도 모자라…… 내 여동생을 임신시켜?”

“…….”

카이든은 아무 말도 없이 착잡한 표정의 다니엘을 바라보았다. 다니엘은 이마에 손을 얹으며 중얼거렸다.

“수사국의 말을 들었어야 했어. 수사국장 루카스는 내게 여러 번 말했어. 제국의 유명인과 스타람의 유명인이 한 번에 아메탄 왕국에 들어오는 일은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하다……. 무언가 음모가 있고, 이단이 힘들다면 리한이라도 잡아 고문해야 한다고 했지. 네 말이 모두 맞았어. 난 어쩌면 내 치하에, 둘이나 보호 요청이 들어오니 그저 설렜었나 봐. 아메탄을 내가 잘 이끌고 있는 줄 알고 자만했던 거야.”

그가 보호해 주겠다 약속한 남자 둘, 이단과 리한은 둘 다 지금 아메탄에 없었다. 모두가 다니엘을 비웃듯 반란군에 합류했던 것이다.

“전하께서는 잘하시고 계십니다.”

카이든의 말에도 다니엘의 표정은 나아지지 않았다. 그가 한숨을 쉬었다.

“……어떻게 해야 할까. 아셰는 낳아서 키우고 싶어 해.”

“말도 안 됩니다.”

카이든이 단호하게 말했다.

“이단은 평범한 남자가 아닙니다. 그의 후사가 있다면 당연히 황제에게는 커다란 무기가 됩니다. 우리는 어쨌든 황제에게 충성을 바치고 있고, 이단의 자식을 넘기지 않는다면 황제의 분노를 사게 될 겁니다. 아직 제국은 대륙의 패권을 놓지 않았습니다.”

“이단의 자식을 황제에게 넘기라고?”

“그러다가 반란이 성공하면…… 이단의 보복에서 자유로울 수 없습니다. 이단은 성인이라 한 달 동안 몰래 보호하는 것이 가능했지만, 아기는 다릅니다. 왕궁에는 보는 눈이 많고, 절대 숨길 수 없을 겁니다.”

다니엘은 그가 예전에 한 번 맞닥트렸던 갈림길에 다시 선 것을 알았다. 제국이냐 반란군이냐를 선택해야 했고, 그 대가는 아메탄 왕국이 될 수도 있었다.

“카이든.”

그가 조용히 말했다.

“나는 그 아기가 우리 국민들의 목숨값을 다 한다고 생각하지 않아. 이제 자비로운 왕 노릇은 그만할 거야. 왕좌의 선의는 혼란으로 되돌아올 수 있다는 걸 이 일로 배웠어. 지금 당장 아이를 없애는 건 어떨까.”

“……위험 부담이 있습니다.”

카이든은 한숨을 쉬며 말했다.

“아셰 왕녀님이 그토록 아이에 대한 집착이 있다면, 아이를 잃었을 때 복수심에 불타 이단에게 도움을 요청할 수도 있습니다. 비밀 통로를 공유하고 있는 사이라면, 그 둘의 관계는 우리가 짐작하는 것보다 훨씬 더 복잡하고 깊을 수도 있지요.”

다니엘은 착잡한 표정으로 초조하게 테이블을 두드렸다. 카이든이 말을 이었다.

“게다가 이단은 황제와 다릅니다. 우리만큼은 아니어도 정보원들을 서서히 깔고 있어요. 공화주의자는 어디에나 있으니, 아마 아메탄 왕국 깊숙한 곳에도 유능한 정보원들이 분명 있을 겁니다. 뭐든, 끝까지 숨기는 건 어렵습니다. 저희가 조사한 정보로는…… 이단의 오른팔인 스타람인이 아예 정보 수집을 전담하고 있다고 합니다.”

“그럼 어떡하라는 거야?”

“가장 깔끔한 것은.”

카이든이 냉정하게 말했다.

“아셰 왕녀님을 지금 죽이는 것이지만…….”

다니엘의 시선이 흔들렸다. 카이든은 당연히 안 될 줄 알았다는 듯이 살짝 고개를 저었다. 

“그게 안 된다면 일단은 아메탄이 아닌 다른 먼 곳으로 보내십시오. 시간을 좀 벌어 볼 수는 있습니다. 무조건 왕궁은 안 됩니다.”

“……누가 제 오라비를 독살했다는 왕녀를 데려가겠어? 그래도 아메탄의 왕족인데 평민이나 하급 귀족에게는 보낼 수 없어. 그리고…….”

다니엘은 한숨을 쉬었다.

“아셰는 내 유일한 혈육이야……. 루벤은 떠도느라 왕궁에 잘 오지 않고, 그래도 내가 한숨 돌릴 곳은 아셰의 궁뿐이야. 멀리 보내는 건 내게도 힘든 일이야.”

“……결정은 전하께서 하시는 것입니다.”

카이든은 다니엘의 고뇌를 이해한다는 듯이 한참을 가만히 서 있었다.

* * *

“이게 뭡니까?”

“왕궁 출입에 대한 허가서입니다. 외국인이라 전하의 직인이 필요합니다.”

다니엘은 행정국의 직원이 아침부터 가져온 문서를 보고 미간을 찌푸렸다. 그는 존대가 습관이 되어 친한 사람들이 아니면 반말을 쓰지 않았다. 리스 공국의 캐넌 영지에서 온 영주와 그의 하인 두 명이었다. 영주의 나이가 68임을 본 다니엘은 그제야 일전에 아셰가 말했던 샤틴의 친척임을 기억해 냈다.

“샤틴의 궁을 잠시 방문한다, 이건가요?”

“예.”

그는 아무 생각 없이 직인을 찍으려다가, 잠시 멈칫하며 생각에 잠겼다. 그는 행정국의 직원에게 급히 말했다.

“내가 직접 만나야겠습니다.”

“……네?”

“오후에 내 궁에서 직접 독대할 테니. 일정 잡아 놓으세요.”

그는 그대로 일어나, 아셰의 궁으로 향했다.

아셰는 불안하게 궁에 들어온 다니엘을 바라보았다. 다니엘이 비밀 통로가 아닌 궁의 입구를 통해 들어온 것은 아주 오랜만이었다. 대외적으로 알려져도 상관이 없다는 뜻이었다. 게다가 지금은 아침이었다. 아셰는 이제 습관처럼 배를 쓰다듬으며 다니엘의 앞에 앉았다.

“무, 무슨 일이야?”

“……아이를 키우고 싶다고?”

“응.”

“그거면 돼?”

“응. 정말로 그거면 돼. 내가 죽으면 그 뒤만 부탁해. 미안, 정말 미안…….”

“……네가 끝까지 키우는 건 어때.”

아셰가 눈을 크게 뜨고 숨을 들이켰다. 그녀의 눈에 눈물이 고였다.

“로즈리만 어떻게 합의하면 돼. 너도 알겠지만, 나머지 사람들은 네게 별 관심도 없어. 윌리엄의 사람들은 이미 다 다른 삶을 찾기 시작했고. 네가 4년 반 뒤에 죽든 말든 이제 의미가 없어. 윌리엄은 이미 죽었으니까.”

“그, 그럼…… 날 살려 주는 거야? 내가 윌리엄을 죽인 게 맞는데도?”

“대신…….”

다니엘은 무표정으로 딱딱하게 말했다.

“아메탄을 떠나야 해.”

“상관없어.”

아셰가 냉큼 말해서, 다니엘은 순간 상처 받은 표정을 지었다. 그는 아셰와 떨어지는 것이 서운했는데, 이미 아셰는 그녀의 형제는 안중에도 없는 것 같았다.

“진짜 상관없어. 아무 데나 가도 돼. 진짜야.”

“……캐넌 영지 어때.”

“응?”

아셰는 ‘캐넌’이 어딘지 한참이나 생각해야 했다.

“네 어머니에게 패물을 구걸하러 온 그곳 말이야.”

“상관없지!”

그녀가 열정적으로 말했다.

“이 먼 바닷길을 노인네가 건너올 정도로 가난한 곳이야. 리스 공국은 마법도 여기처럼 융성하지 못해 목축업으로 하루하루를 살아. 대륙 끝에 있는 샤틴에게까지 올 정도면 정말로 찢어지게 가난한 곳이 틀림없어.”

“괜찮아. 소를 키우라고 하면 소를 키우고, 풀만 먹으라고 하면 풀만 먹겠어. 나는 보석도 드레스도 큰 욕심이 없어. 그런 것이 중요하다면 이미 1년 전에 제국에 갔을 거야.”

아셰는 단호하게 대답했다. 이미 그녀는 배 속의 아이와 함께 있을 수만 있다면 어디든 갈 결심을 하고 있었다. 그녀는 아주 옛날부터, 가난해도 좋으니 부모 중 한 명이라도 자신을 아껴 주며 키워 줬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마지막으로…….”

다니엘은 눈에 띄게 굳은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네가 그곳에 가려는 대외적인 이유가 필요해.”

[다음 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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