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화.
“드릴 수야 있지만…….”
아셰가 천천히 일어나 서랍을 열며 중얼거렸다.
“영지를 먹여 살릴 만큼 정말로 값이 나가는 것은 없어요. 귀한 것들은 이미 팔아 다기와 찻잎을 사서…….”
“나 참.”
샤틴은 벽 한 면을 가득 채운 찻잎 통을 바라보며 한심하다는 듯이 고개를 저었다. 아셰에게 한때 많은 보석이 있었던 것은 사실이었지만, 그녀는 감금당한 이후 그 모든 것을 처분해 찬장을 가득 채울 정도로 희귀하고 비싼 찻잎을 샀다. 어디 하고 나가지도 못할 보석보다는 죽기 전에 여러 가지 차를 맛보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생각에서였다. 당연히 찻잎은 보석보다 환금성이 형편없었다.
“전하께 부탁을 드려 보는 것이 어떠냐. 그래도 부유한 국가에 산다며 도움을 청하러 오는데 이런 꼴을 보일 수는 없어.”
“말씀은 드려 보겠지만 형평성을 논하실 수는 있죠. 지금 제국의 공물을 감당 못 할 국가가 한두 곳이 아니니까요. 온갖 곳에서 지원 요청을 하면 아메탄 왕국은 난감해져요. 제국에서 요구하는 군자금을 더 올릴 수도 있고요.”
“매정한 것, 너는 어미의 숙부가, 그 노인이 먼 바닷길을 건너오는데…… 그 영지에서 지냈던 어린 시절이 내 인생에 가장 좋았던 날들인데! 이 끔찍한 왕궁은 내게 그것 하나 못 해 준다니?”
“일단은 이것들을 다 가져가세요. 아, 머리핀은 안 돼요. 올해 생일 선물로 다니엘이 준 거니까 기분이 상할지도 몰라요.”
아셰의 차분한 말에 샤틴이 도끼눈을 뜨고 서랍의 패물들을 한껏 쓸어 갔다. 그녀의 시선이 아셰의 검지에 걸려 있는 금반지로 향했다.
“이것은 뭐니?”
“……이건 안 돼요.”
그녀가 고개를 저었다.
“중요한 사람이 준 거예요.”
샤틴은 한 번 더 아셰를 노려보더니, 인사도 없이 문을 나섰다. 시녀들이 급하게 서랍을 정리하고, 그녀의 눈치를 보았다.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배를 쓰다듬었다.
4. 별과 이방인
“전하, 정말 말도 안 되는 일입니다!”
로즈리는 눈물을 흘리며 오열했다. 다니엘은 난감한 표정을 지으며 턱을 쓸었다. 아셰는 어떤 표정을 해야 할지 몰라 시선을 떨구기만 했다.
“윌리엄은 저 지하 속에서 차가운 흙에 잠겨 가는데, 살인자가 저렇게 호의호식한다는 것이 말이 됩니까?”
오랜만에 한번 있는 왕가의 식사였다. 아셰는 정말 로즈리와 마주하고 싶지 않았으나, 샤틴이 부탁한 것 때문에 다니엘에게 공식적으로 한마디라도 해 보려고 저녁 식사에 참석했다가 모두를 곤란하게 하고 말았다.
“전하가 윌리엄을 조금이라도 생각하신다면 이러시면 안 됩니다. 왕녀님은 저렇게 시녀들을 부리고, 살이 오르고, 먹고 싶은 것도 마음껏 먹는다고 들었습니다.”
아셰는 포크를 내려놓으며 작게 한숨을 쉬었다. 실제로 살이 오른 건 사실이었기 때문에 뭐라고 할 말이 없었다. 차라리 이단처럼 30명을 죽였어도 그대로 뒤돌아보지 않고 떠나 버렸으면 이토록 늘 얹힌 것처럼 살지 않아도 되었을 텐데. 단 한 명을 죽였을 뿐인데 그 유가족과 계속해서 마주친다는 것은 심리적으로 너무 힘든 일이었다.
“심지어 지난 생일 때에는…….”
로즈리의 눈에 핏발이 선 것을 보며 다니엘은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친한 친구를 불러 다과회를 하셨다지요…… 가수까지 불러서!”
어린 지젤은 아무것도 모르면서 아장아장 걸어 울고 있는 로즈리의 팔을 안았다. 루벤이라도 참석했다면 그만하라며 분위기를 바꾸기라도 했을 텐데, 지금 자리를 지키고 있는 사람들은 모두 숙부나 당숙뻘의 먼 친척들뿐이었다.
“어떻게 그러실 수 있습니까? 혹여…….”
다니엘의 표정에 긴장이 스쳤다.
“윌리엄이 죽어, 이렇게 왕위에 앉아 계시니 전하께서도 윌리엄의 죽음을 내심 반기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말조심하시오!”
숙부인 하셀이 그제야 일어서 소리쳤다. 아셰를 모욕하는 것은 괜찮아도, 왕을 모욕하는 것은 문제가 있었다. 아셰는 한숨을 쉬며 말했다.
“그러면 대체 제가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다니엘을 난감하게 할 수는 없었다. 그녀는 본능적으로 배에 한 손을 얹으며 말했다.
“식사를 하지 않으면 됩니까? 그럼 제가 어떤 식사를 하면 되겠습니까?”
로즈리가 흐트러진 머리카락 사이로 그녀를 노려보았다.
“궁을 나가면 되겠습니까? 그럼 어디로 가면 될까요? 자유를 주신다면 저야 감사한 일이지요.”
아셰의 시선은 차분했다. 그녀는 진심으로 로즈리가 원하는 바를 알고 싶었다. 물론 그녀에게 그 원하는 바를 이루어 줄 의무는 없지만, 그래도 같은 궁에 살고 있는데 맛있는 것을 양껏 먹고 친구들과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다면 남편을 잃은 로즈리는 기분이 나쁠 수 있었다.
“로즈리, 미안하지만.”
다니엘은 낮게 말했다.
“왕족끼리의 싸움은 일반인들의 살인과 죄의 결이 다릅니다. 저희는 왕가의 재판 때 아셰를 감금하고 5년 이후로 그 처벌을 유예하기로 이미 합의했습니다.”
“이렇게 호의호식할 줄 알았다면 저는 절대 동의하지 않았습니다!”
그녀가 앙칼지게 소리쳤다.
“적어도 이렇게 궁에서 시녀들을 부리며 편한 친구들과 함께 하는 생활을 유지하게 하는 것은 제가 너무 마음이 괴롭습니다. 6개월이 마치 6년 같았는데, 5년을 이 마음으로 지내라고요?”
“그럼 궁에서 로즈리가 나가면 되겠군요.”
식사를 함께 하던 당숙이 냉정하게 말했지만 로즈리는 악에 받쳐 소리 질렀다.
“우리 지젤이 좋은 곳으로 시집가기 전까지는 절대 궁에서 못 나갑니다! 누구 좋으라고 나가요?”
“……제가 시녀들을 부리지 않고.”
아셰가 낮게 말했다. 그녀는 이렇게 밑도 끝도 없이 비난당하는 것이 지겹다는 듯 로즈리를 바라보았다.
“편한 친구들과 가까이 있는 게 아니라면 괜찮습니까.”
로즈리가 그녀를 노려보았다.
“그래요, 궁을 벗어나 멀리 떠나세요. 다시는 아메니티에 발걸음도 하지 마십시오.”
다니엘이 벌떡 일어섰으나 로즈리는 핏발 선 눈으로 지젤을 안고 소리쳤다.
“저 살인자가 먹고 싶은 것을 먹지 못하고, 낯선 곳에서 외롭고 쓸쓸하게 살아가다 죽기 전까지 저는 멈추지 않을 겁니다.”
“……그러니까 왜 왔어.”
그 날 저녁, 아셰의 방에 찾아온 다니엘은 씁쓸한 표정으로 말했다.
“로즈리와는 최대한 부딪히지 마. 왜 험한 꼴을 당하고 그래.”
“다니엘.”
아셰는 축 처진 목소리로 그의 이름을 불렀다. 핏기가 전혀 없는 얼굴이 파리했다.
“난 윌리엄의 죽음에 책임이 있어. 오빠도…… 내게 욕해도 돼. 형을 죽였잖아.”
“……잊지는 않아.”
그가 나지막하게 말했다. 그게 다였다. 아셰는 다니엘도 자신의 마음을 정리하지 못했다는 걸 알았다. 윌리엄은 당장 눈앞에 없었고, 의지할 수 있는 피붙이란 아셰밖에 남지 않았다. 윌리엄을 따른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아셰를 마냥 미워할 수 없는, 그리고 어떤 면으로는 아셰를 이해할 수 있다는 마음을 외면할 수 없었다.
다니엘의 표정에 연민이 떠오른 것을 보고, 아셰는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부탁이 있어. 음…… 안 들어줘도 돼.”
“뭔데?”
아셰가 부탁을 하는 것은 처음이었기 때문에 다니엘은 살짝 놀라 물었다. 그녀가 기운 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리스 공국의 작은 영지에 엄마의 숙부가 사는데…… 제국의 공물 요구가 너무 과해서, 겨울에 다 굶어 죽게 생겼나 봐. 배를 타고 노인이 바다를 건너오고 있대. 알다시피 나도 엄마도 딱히 재산은 없잖아. 엄마가…… 오빠에게 한번 부탁해 보라고 시켰어.”
“…….”
다니엘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아셰는 그의 표정을 살피며 재빠르게 말을 이었다. 어차피 얼굴도 모르는 샤틴의 친척을 위해 다니엘과 언쟁할 생각은 조금도 없었다.
“물론 작은 영지에 조금 지원하는 건 별로 어려운 일은 아니지만…… 우리나라도 아니고, 이런 식으로 조금이라도 관련 있는 다른 국가의 영지를 돕기 시작하면 한도 끝도 없겠지. 재무국에서도 정확한 예산의 기준을 정해 달라고 요구할 거야. 그러니까 당연히 거절하는 게 난 맞다고 생각해.”
아셰가 부담 갖지 말라는 듯이 싱긋 웃었다.
“다만 엄마가 전하라고 해서 한 것뿐이야. 그냥, 음, 오빠가 거절했다고 내가 잘 말할게. 신경 쓰지 마.”
“……미안하다, 아셰. 대신 지난 연회 때 선물로 받은 보석이 하나 있어. 그걸 네게 줄게.”
“그러면 고맙지.”
왕에게 들어온 선물이라면 당연히 아셰의 모든 패물을 합친 것보다 값질 것이다. 아셰는 싱긋 웃고, 심호흡을 했다. 타이밍이라는 것이 있다면 지금이었다. 그녀는 로즈리에게 오늘 공개적으로 망신을 당했고, 유일하게 건넨 부탁도 거절당했다. 다니엘은 지금 이 순간, 그녀에게 미안함과 동정심을 깊게 품고 있을 것이다. 과연, 씁쓸한 얼굴로 다니엘이 그녀를 바라보았다.
“……다른 부탁은 없을까. 들어줄 수 있는 거라면…… 들어줄게.”
“그럼…….”
아셰는 잠시 머뭇거렸다. 심장이 두근거리며 뛰기 시작했다. 지금 어떻게든 잘 말해야 했다. 그녀는 본능적으로 손을 아직은 납작한 배 위에 두고, 낮게 말했다.
“오빠, 정말…… 정말 들어줬으면 하는 부탁이 있어…….”
그녀의 간절함이 그대로 느껴졌는지, 다니엘은 진지한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사, 사실 나…….”
그녀는 마른침을 한 번 삼키고, 발에 힘을 준 채 단번에 말했다.
“나 임신했어.”
“……뭐?”
그 때 다니엘의 표정을 뭐라고 설명할 수 있을까. 아셰는 자신도 모르게 눈물이 흐르는 것을 느끼며 재빨리 말을 이었다.
“아이를 낳고 싶어. 그리고 키우고 싶어. 부탁이야. 나는 어떻게 되어도 좋으니, 아이를 낳아서 키우게 해 줘. 그리고…… 내가 죽으면 뒤를 부탁해. 제왕 교육 같은 건 바라지도 않아. 아이의 아버지가 살아 있다면 보내 주고, 아버지에게 보낼 상황이 아니라면 누군가 좋은 사람의 양자로 들여보내 줘. 낳아서 키울 수만 있게…… 허락해 줘.”
“……누구야.”
다니엘의 온화한 얼굴이 뻣뻣하게 굳었다. 그가 이렇게 무시무시한 표정을 지은 것은 처음이었기 때문에 아셰는 숨이 가빠 왔다.
[다음 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