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화.
“왕녀님, 왕녀님.”
아셰는 간신히 눈을 떴다. 밤새도록 이어진 복통 때문에 정신이 혼미했다. 그녀가 끙끙거리며 식은땀을 흘리자 제니가 그녀의 이마를 닦아 주며 쉼 없이 그녀를 불렀다. 아셰가 숨을 몰아쉬며 흐릿한 시야 속에서 제니의 붉은 머리를 확인했다.
“절 알아보시겠어요? 정신이 드세요?”
“아…… 아파…….”
“헤일리가 의료국에 갔어요. 조금만 기다리세요.”
그녀는 간신히 물을 마시고, 쥐어짜는 듯한 통증에 입술을 깨물었다. 이렇게 끔찍한 복통은 난생처음이었다. 신음 소리를 내며 몸을 웅크리는데 헤일리를 따라 올리타가 급히 들어왔다.
“언제부터 이러셨어?”
“오늘 새벽부터요.”
헤일리가 덜덜 떨면서 말했다. 그녀의 얼굴에 걱정이 한가득 쌓여 있었다.
“처음엔 괜찮으시다고 했는데…… 점점 더 심해지시나 봐요.”
“증상이 어떠세요? 왕녀님, 제 말 들리세요?”
“……너무 아파. 배를 쥐어짜는 것 같아. 숨도 잘 안 쉬어지고, 머리가 핑핑 돌아.”
“뭐 잘못 드신 거 있어? 요즘 특이 사항 없었어?”
“어, 없어요. 제니, 왕녀님 식단표 좀 갖고 와 봐……. 야채도 더 늘렸고…… 치통 약도 꼬박꼬박 드셨어요.”
고통으로 침대에서 몸을 떠는 아셰를 보며 올리타가 숨을 몰아쉬었다. 그녀가 재차 물었다.
“특별한 곳 가신 데는 없어?”
“없어요……. 아시다시피, 최종 재판 이후 궁 밖에는 한 발자국도 나가지 않으셨습니다.”
“……왕녀님, 잠시 실례하겠습니다. 피를 뽑을 거예요.”
올리타는 가방에서 여러 가지 시약을 꺼내 테이블에 늘어놓고, 주삿바늘을 찔러 넣었다. 아셰는 배에서 느껴지는 통증이 너무 심하여 피를 뽑는 느낌도 느끼지 못했다. 그녀가 시약들 속에 아셰의 피를 한 방울씩 떨어트리자 몇몇 시약의 색깔이 변했다.
“……말도 안 돼……. 혹시 왕녀님께서 만난 사람은 없어?”
“약제국의 리젠 하카트, 어머님이신 샤틴 마마, 그리고 가끔 전하께서 비밀 통로로 왔다 갔다 하시는 듯 했습니다.”
“정말로 그게 다야?”
“그, 그랬는데…….”
아셰는 희미한 의식을 붙잡지 못하고 숨을 헐떡댈 뿐이었다. 올리타가 급히 그녀의 치마를 들쳤다. 다행히 하혈이 없음을 확인한 그녀는 벌떡 일어나 헤일리에게 말했다.
“한시가 급해. 지금 바로 약제국에 달려가, 내가 전해 주는 시약들을 당장 제조해 달라고 해. 지금 바로 달려가. 그리고 제니.”
올리타는 제니까지 불러서 급하게 말했다.
“주방에 가서 바싹 익힌 고기를 잔뜩 가져와. 마력 회복에 좋은 시트라 샐러드와 온갖 과일도. 혼자선 못 들고 올 테니, 다른 시녀들과 함께 가.”
“하, 하지만 다른 시녀들은 왕녀님의 감시를 위해 이곳을 나갈 수 없는데…….”
“급하다고 해. 의료국 산하기관 직원의 판단이니 책임은 내가 지겠다. 모두 데려가.”
시녀들은 올리타의 지시에 주춤거리며 모두 아셰 궁을 떠났다. 올리타는 고개를 들어 아무도 없는지 한 번 더 확인하고, 급히 문을 닫았다.
“왕녀님, 이것 드세요.”
그녀는 파리한 아셰의 입술에 시약을 하나 흘려 넣었다. 아셰의 텅 빈 눈에 조금씩 초점이 돌아오기 시작했다. 올리타는 목소리를 낮춰 말했다.
“왕녀님, 주위에 아무도 없어요. 정신이 드시죠?”
“응? 응…….”
따뜻한 시약이 온몸에 퍼져 나갔다. 다시 흐릿하게 돌아온 시야에 올리타의 세모꼴 안경이 보였다.
“왕녀님.”
올리타가 차분하게 말했다.
“……남자와 관계를 하신 적이 있으세요?”
“어?”
아셰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올리타는 그녀의 반응이 긍정임을 알아채고 재차 물었다.
“몇 달 전이에요? 아니, 언제부터 언제까지 하셨어요?”
“왜…… 왜? 마지막은, 어, 얼마 안 되었는데…….”
올리타는 어떻게 이 궁 밖으로 한 발자국도 안 나갔는데 이런 일이 생겼는지 묻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얼굴에 참담함이 스쳐 지나갔다.
“왕녀님, 잘 들으세요.”
“……응.”
“왕녀님은 지금, 임신하셨어요.”
“뭐?”
아셰의 눈이 커졌다. 그녀가 속사포처럼 속삭였다.
“올리타, 나는 달거리가 정상적이지 않다며. 임신이 힘들다며!”
“힘들다고 했지 불가능하다고 한 적은 없어요.”
올리타는 한숨을 쉬며 말했다.
“여성의 몸은 모두가 제각각이라, 그 안에서 벌어지는 일을 모두 추적할 수는 없어요. 다만 아셰 왕녀님의 몸은 일반적인 경우와 다르다는 뜻이었어요. 제가 그것도 모르고 너무 독한 치통약을 처방해서 이렇게 아프신 거예요.”
“아, 아가는?”
아셰가 자신도 모르게 배를 감싸며 말했다.
“하혈이 시작되지 않았으니 시약을 드시면 무사하실 거예요. 그렇지만…… 왕녀님.”
올리타가 속삭였다.
“일부러 시녀들을 모두 물렸어요.”
그녀는 마른침을 삼켰다. 임신했다는 너무나 놀라운 소식에 통증마저 남의 일 같았다.
“분부하시면, 아무도 모르게…… 아이를 제가…… 시약 몇 모금이면 됩니다. 왕녀님의 몸에 전혀 해가 가지 않아요. 아드와 시약이라고 아시죠? 아무런 통증이나 증상 없이 그저 몸을 되돌리기만 합니다. 아주 구하기 힘든 것이지만 왕궁이니 충분히…….”
“안 돼.”
아셰는 거세게 고개를 저었다.
“절대 안 돼. 낳을 거야.”
“전하께서 명하실 수도 있습니다. 저는 수사국에 왕족의 진료 일지를 넘겨야 할 의무가 있습니다.”
“안 돼. 올리타, 절대 안 돼.”
상상만 해도 끔찍하다는 듯이 그녀의 푸른 눈에 눈물이 고였다.
“부탁이야. 당분간만 비밀로 해 줘. 원래 내 월경은 불규칙적이니 수사국에서 이상하게 여길 리 없어. 어차피 다니엘은 자비로운 사람이야. 때가 되면, 내가 직접 말할게.”
다니엘은 지금 이단에 대한 분노로 이를 갈고 있는 상태였다. 지금 그가 알게 된다면 어떤 반응을 보일지 끔찍했다. 적어도 그가 새롭게 세운 기술국이 자리를 잡고, 이 위기를 현명하게 잘 극복해 나갔다는 평가를 받으면 그 때 인간적으로 부탁해 볼 심산이었다. 올리타가 속삭였다.
“왕녀님, 언제까지나 속일 수는 없어요. 배가 불러 오기 시작하면…….”
“그래도 내가 방법을 강구해 볼 수는 있겠지. 지금은 아니야. 다니엘의 기분이 좋을 때 내가 직접 말할게.”
“……왕녀님, 저는…… 왕녀님이 아닌, 전하께 충성하는 몸입니다.”
아셰는 눈을 질끈 감았다. 원래 산하기관 사람들은 이 모양이었다. 진실과 객관성, 전문성 등에 가장 큰 가치를 두고 있는 사람들이 그녀의 비밀을 지켜 줄 리 없었다. 가장 친했던 리젠마저도 진실 앞에서 그녀를 고발하지 않았던가.
“그, 그럼 기한을 줄게. 한 달, 한 달만 내게 시간을 줘.”
그녀는 일단 되는 대로 내뱉었다.
“한 달 정도는 입을 다물어 줄 수 있잖아. 응? 한 달만.”
“왕녀님, 주제넘게 한 말씀 드립니다.”
올리타는 한숨을 쉬며 그녀의 진땀으로 얼룩진 이마를 닦았다.
“왕녀님은 4년 반 이후 사형 선고를 받으실 확률이 큽니다. 이 아이의 아버지가 누구인지는 모르겠으나 왕녀님의 반응을 보아하니 떳떳한 남자는 아닌 것 같군요. 그렇다면 이 아이의 삶은 어떻게 되겠습니까? 낳기만 한다고 해서 능사는 아닙니다.”
“…….”
“제가 한 달의 시간을 드리는 것은…….”
아셰는 배를 감싸고 불안하게 그녀를 바라보았다.
“다른 결정을 심사숙고해 보시라는 뜻입니다. 한 달 후에 뵙겠습니다.”
올리타의 재빠른 처치로 아셰의 복통은 금방 잦아들었다. 그녀는 입맛이 없었지만 제니가 가져온 샐러드와 고기를 천천히 꼭꼭 씹어 먹었다. 올리타는 아이를 없애는 방향으로 권유하고 갔지만, 그녀는 이미 결정을 내린 상태였다.
예전에, 이단이 자신은 자식을 원치 않는다고 말했기 때문에 더 이상 언급하지 않았지만 사실 아셰는 오래 전부터 아이를 갖고 싶었다. 특히나 이단을 닮은 아이라면 더더욱 욕심이 났다. 그녀는 부모에게 충분한 사랑을 받고 크지 못했으며 그래서 자신이 아이를 낳는다면 무조건적인 사랑을 퍼붓겠다고 예전부터 생각하던 차였다.
그러나 올리타의 말은 들을 가치가 있었다. 그녀에게는 4년 반의 시간만이 있었고, 아이의 아버지는 전쟁터에 나가 있었다. 만일 낳는다면 이 아이를 누가 키울 것인가? 제일 먼저 떠오른 건 다니엘이었다. 그녀는 그동안 쌓은 다니엘과의 관계를 생각하며, 어느 정도는 그가 키워 주고 이단에게 보내 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아니면 이단이 약속을 지켜 그녀를 데리러 올 수도 있었다.
아니면 이단에게 말해서, 자신과 아이를 데리고 탈출해 달라고 하는 건 어떨까. 그녀의 머리가 팽팽 돌았다. 아이가 생긴 이상 자신이 지켜야 할 아메탄 왕족의 명예 같은 건 더 이상 중요하지 않았다. 지금이라도 어떻게든 연통을 넣을 수 없을까. 그런데 어떻게?
복잡한 표정으로 그녀가 고기를 씹어 삼키고 있는데, 문이 활짝 열렸다.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흠칫 놀라 뒤를 돌아보았다. 샤틴이었다.
“오, 오셨어요?”
“부탁 좀 들어줘야겠다.”
다짜고짜 그녀의 식탁 맞은편에 앉은 샤틴이 턱을 치켜들고 말했다. 아셰는 숨을 몰아쉬며 물을 삼켰다. 샤틴이 그녀의 앞에 놓인 고기를 보며 혐오스럽다는 듯이 미간을 찌푸렸다.
“그만 먹어! 궁 안에 갇혀서 돼지같이 살만 찔 거야?”
“……왜 오셨어요?”
이렇게 저녁 시간에 샤틴이 용건도 없이 찾아오는 일은 없었으니, 아셰는 차분하게 그녀를 바라보며 물었다.
“돈이 될 만한 패물을 좀 다오. 리스 공국의 숙부에게 편지가 왔어.”
아셰는 샤틴의 출신국인 리스 공국에 단 한 번도 가 본 적이 없었다. 샤틴 역시 마찬가지로, 제펠탄이 그녀를 데리고 리스 공국에 유람을 갈 정도로 샤틴을 사랑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막연히 그녀의 외가라고만 생각했지만 어차피 샤틴의 부친이나 형제가 지금 군주인 것도 아니었다.
“제국에 공물을 너무 많이 보내 겨울을 보내기 어렵다더구나. 그런데 알다시피, 제펠탄은 내게 아무것도 주지 않았어. 너는 패물이 좀 있지 않니? 심지어 그 노인이 직접 바다를 건너 부탁을 하러 온다는데 빈손으로 보낼 순 없다. 에곤 숙부는 친절하고 덕이 많으신 분이야. 캐넌은 내가 어린 시절을 보낸 곳이기도 해. 내 인생 가장 행복하던 시절이었다.”
[다음 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