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3화 (192/256)

  

33화.

“집안의 하인들이 모두 물고기를 잡으러 나갔습니다. 배를 띄웠으니 곧 좋은 소식이 있을 것입니다. 지금 당장을 버틸 정도는 되고, 저도 겨울이 오기 전까지 계속 사냥을…….”

“아직 잡히지도 않은 물고기를 기다려야 할 정도로 심각한가 보구나.”

그가 천천히 일어섰다. 거의 70에 가까운 노인은 켄의 부축을 받으며 간신히 허리를 폈다.

“영주의 성이 이럴진대, 주민들은 물을 필요도 없겠어. 인구가 얼마나 남았지? 지난번에 제국에 차출된 것이 30명 아니냐?”

“50명입니다, 아버님.”

켄은 한숨을 쉬며 대답했다.

“어제 푸줏간의 하이디가 아들 쌍둥이를 낳았다고 합니다. 그래서 저희 영주의 인구는 모두 197명이 되었습니다.”

“형편없이 줄었다만, 겨울을 버티기엔 근시적으로는 적은 숫자가 낫겠지. 지팡이를 다오. 말을 탈 수 있나 확인해 봐야겠다.”

“말이요?”

켄이 깜짝 놀라 말했다. 에곤의 나이가 68이었다. 아무리 정정하다고 해도 마지막으로 말에 오른 것이 몇 년 전인지 기억도 나지 않았다.

“이대로 모조리 굶어 죽을 수는 없는 일 아니냐. 나는 살만큼 살았어도, 어제 막 태어난 쌍둥이들은 건강히 살아남아야지.”

켄은 에곤의 의중을 알 수가 없어 멍하니 그를 바라보았다. 에곤이 켄의 초록색 눈을 바라보다가 푸흡, 하고 한 번 웃었다.

“나이가 드니 말과 생각이 헷갈리는구나. 내 조카에게 가야겠다.”

“……조카요?”

“내 큰 형님의 딸이 지금 아메탄 왕국에 있지. 선대 아메탄의 왕 제펠탄의 세 번째 비로 갔나, 그랬을 거야.”

에곤의 큰 형님이라면 리스 공국의 선대왕이었다. 선대왕은 아들이 없이 일찍 죽었고, 이어서 그의 동생인 엘더가 공국의 군주 자리에 올랐다. 그대로 여기저기로 혼인을 통해 흩어진 선대왕들의 딸들은 공국의 역사에서 잊혔다.

“아메탄은 작지만 제국보다도 부유한 곳이야. 이름이 샤틴이었지……. 그 계집애의 대부가 되어 주지 못한 것이 큰 한이지만, 그래도 제 숙부가 먼 길을 건너 부탁하면 보석 목걸이라도 던져 주겠지. 무릎이라도 꿇으면 금가락지라도 나올지 혹시 아나.”

에곤은 클클클 웃으며 지팡이를 짚었다. 켄이 고개를 저었다.

“안 됩니다, 아버님. 길이 너무 멀어요. 게다가 말이라뇨. 건장한 남자도 하루 종일 말을 달리면 힘듭니다. 대륙은 전쟁 중이고, 돌아가기엔 길이 너무 멉니다. 차라리 제가 가겠습니다.”

“좋은 일도 아니고 구걸하러 가는 것인데, 숙부가 직접 가야 하지 않겠느냐. 그 애는 어린 시절 이곳에서 명랑하게 뛰어놀았어. 그 시절을 기억한다면 분명히 도와줄 것이다. 그러니 내가 직접 가야 해.”

“그럼 같이 가시죠. 제가 모시겠습니다.”

“영지에는 주인이 필요하다. 아직 허가장이 당도하지 않았더라도, 내가 없을 땐 네가 영주야. 그건 수도에서 끼적이는 종이 쪼가리에 앞서 캐넌이 인정하는 일이다. 화리트 형제와 함께 갈 테니 걱정하지 마라. 하지만 말에 대해서는 네 충고가 도움이 될 것 같군. 고깃배가 돌아오면 그 배를 타야겠다.”

“아버님! 셋이서 배를 타신다고요?”

“늙지만 않았더라도 화리트 중 하나만 데려갔을 거다. 바다에서는 그중 하나만 있어도 돼.”

에곤은 지팡이를 짚고 천천히 걸어 테라스에 나섰다. 켄은 아무 말 없이 노인을 따라 뒤에 섰다. 여전히 소들의 목에 달린 방울은 부드러운 소리를 내며 딸랑거렸고, 잔디밭 언덕 곳곳에 위치한 풍차는 알록달록하게 빛났다. 저 멀리 푸른 바다는 에메랄드빛 반짝임을 뽐내며 평화롭게 펼쳐져 있었고, 드문드문 지어진 지붕 집들은 창문을 꽃으로 장식해 놓아서 바라보기만 해도 마음이 가라앉았다.

“40년 전, 에토 공국과의 전쟁에서 공을 세우고 형님이 내게 영지를 하사한다 하실 때, 나는 두말하지 않고 이곳을 골랐지. 나는 전쟁에서 가장 큰 공을 세울 만큼 능력 있는 마법사였지만 사실은 전쟁에 금세 지쳐 있었어. 40년간 이곳은 부유하진 않아도 리스에서 가장 평화롭고, 주민들의 표정이 가장 편안한 영지였을 것이라고 자부한다.”

“아버님께서…… 훌륭한 영주셨기 때문이지요.”

“나는 곧 죽을 테고, 이곳에 묻히고 싶다. 그 때까지 내 사람들이 나를 훌륭한 영주로 믿고 의지하길 바라. 40년 전에 얼굴을 본 먼 친척이라고 하더라도, 이 사람들에게 빵 한쪽이라도 돌릴 수 있다면 무릎이 아닌 더한 것도 꿇을 수 있다. 그리고 너도…….”

노인은 그의 앞에 선, 구릿빛 피부의 탄탄한 청년을 바라보았다.

“……나의 후계자로서, 이런 마음으로 영주민들을 대했으면 좋겠구나.”

저 멀리 갈매기가 끼룩거리며 울었다. 켄은 그를 더 이상 말릴 수 없음을 알았다.

* * *

이단은 사단장 사브르의 보고를 받고 미간을 찌푸렸다.

“제국과의 전쟁을 치르고 있는 중대한 시기이므로 아카날 총통의 임기를 10년 더 연장한다? 아니, 본디 임기가 5년이었는데 연장이 왜 10년이지?”

사브르는 스타람에서 온 지원군의 사단장이었다. 스타람 출신이었으나 충직하고 생각이 깊은데다가 겸손하기까지 하여 이단과 상당히 가까워졌고, 몇 번의 전투를 함께 치른 이후엔 오랜 전우처럼 편한 사이가 되었다.

“……알 수 없지요. 하지만 사실은 출정 전에 소문이 돌긴 했었습니다.”

이단은 막사에서 총을 닦으며 그의 말을 조용히 들었다. 총이라는 것은 상당히 불편했지만 그만큼 파괴력도 큰 무기였다. 하지만 한 번 장전하는 데 시간이 너무 오래 걸려서, 이단은 총의 끝에 칼을 달아 근접전에서는 창처럼 쓰자는 의견을 내어 개조하고 있는 중이었다. 그러나 이 새로운 무기가 그동안의 병법을 모두 무력화시킬 수 있는 것은 확실했다.

“아카날이 장기 집권을 원하고, 반대하는 사람들을 숙청한다는 소문이요. 사실 원래 저희 부대 사단장은 제가 아니었습니다. 어쩌다 보니 제가 된 것이지요.”

“그럼 원래 사단장은 숙청당했나?”

“그것은…… 다음 기회에 말씀드리지요. 총독님도 연관되어 있어 이야기가 깁니다. 하지만 아카날 총통에게 실망한 건 사실입니다. 스타람 안에서는 당연히 그래야 한다는 의견이 다수긴 한데…… 하지만 공화정의 원칙이 무너진 것 같아 속이 쓰리군요.”

사브르는 자신의 정체성을 스타람 국민이라기보다는 공화주의자에 두는 것 같았다. 그는 진심으로 제국에 올바른 공화국이 성립하기를 바랐는데, 위에서 영주들끼리의 합의로 이루어진 스타람의 공화정보다 밑에서부터 평민들의 지지를 받아 일어난 혁명이 조금 더 공화주의에 가깝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이단은, 제국의 황자로 권력을 손쉽게 쥘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평민들과 함께 아주 밑에서부터 혁명을 함께 한 동지이기도 했다. 밑에서 올라왔는데도 불구하고 그에게서는 남들을 이끄는 리더십과 카리스마가 동시에 존재했다. 스타람인이라고 해서 무시하거나 멀리하지 않는 포용력을 갖춘 사람이기도 했다. 사브르를 다른 혁명군처럼 동등하게 대하고, 마법을 전혀 쓰지 못하는 스타람 군대의 훈련을 전폭적으로 돕기까지 했다.

“다음은…… 보르미히 영지에서 온 제안입니다.”

동쪽의 거대한 영지, 보르미히는 원래 혁명군을 지지하는 성명에 이름을 올리지 않았다. 이단이 흥미롭다는 듯 턱을 쓸었다.

“영주의 딸 중 하나와 이단 임시 총독이 혼인한다는 전제하에 협력하겠다는군요.”

“웃기는군.”

이단이 생각할 가치도 없다는 듯이 피식 웃었다.

“공화정을 하나도 이해하지 못하고 있잖아. 혼인으로 권력을 유지한다는 것이 말이 되나. 나는 5년 뒤에 물러날 텐데.”

“그러면 그렇게 답장을 써도 좋을까요?”

사브르는 예상한 반응이라는 듯이 대답했다.

“혼인은 할 수 있으나, 5년 후에는 통령 자리에서 물러날 것이라고요. 하지만 재투표를 해서 연임이 된다면 더 임기가 늘어날 수는 있겠죠.”

“뭐?”

이단은 미간을 찌푸리며 그를 바라보았다.

“혼인은 할 수 있다고?”

“성사되면 좋은 것 아닙니까?”

사브르가 당연하다는 듯이 말했다.

“보르미히만 협력하면, 동부는 금세 함락입니다. 수도하고도 가깝고요. 게다가 부유한 영지이니 군자금에도 도움이 될 것입니다.”

“아, 안 돼.”

그는 고개를 저었다. 사브르는 이유를 모르겠다는 듯이 눈을 둥그렇게 떴다.

“보르미히에는 젊은 남자들도 많아요. 혁명의 성공을 적어도 1년은 단축시킬 겁니다.”

“곁에 두고 싶은 여자가 있어.”

이단은 단호하게 말했다.

“혼인을 한다면 그 여자야.”

“그럼 빠르게 혼인을 하세요. 앞으로 이런 요구들이 많이 들어올 겁니다. 혼인은 예로부터 담합의 상징이었어요. 괜히 이유 없이 거절하면 상대의 기분을 상하게 합니다.”

“지금은 못해. 혁명에 성공하면 그 때 데려올 셈이야.”

“무슨 소리십니까?”

사브르가 어이가 없다는 듯 열변을 토했다.

“그럼 약혼이라도 하세요. 총독님께 말을 안 해서 그렇지, 자신의 딸들을 은근슬쩍 밀어 넣고 있는 영주들이 지금 한둘인 줄 아십니까?”

“인간이란 어쩌면 늘 이렇게 한결같고 지겨운지. 세습을 피하려고 이 짓을 하는데, 대체 왜 자기 딸들을 주지 못해 안달들이지? 내 씨를 받아도 어차피 그 애가 총독이 되지는 못해.”

“……그래도 총독님은 황족이시지요. 그 혈통이 탐나는 것은 당연합니다.”

“어이가 없군.”

그는 보르미히 영주의 서신을 구겨 그대로 불 속으로 던져 넣으며 단호히 일갈했다. 그의 마력이 닿은 불이 맹렬이 타올라 마치 막사를 모두 태울 것같이 날름거렸다.

“황족의 피가 탐나면 제국군에게 다시 붙으라고 해. 다시 말하지만 내 인생에 혼인은 그 여자 아니면 없어.”

“그 여자가 대체 누군데요? 알고나 있죠.”

“있어, 때가 되면 말해 줄게.”

사브르는 고개를 갸웃하며 한숨을 쉬었다. 그가 뭐라고 더 말하려는 찰나, 이단이 불에서 고개를 들어 그를 노려보았다.

“내가 총독이야.”

그의 눈이 불빛에 일렁거렸다.

“이 안건에 대해서 더 이상 말한다면 보르미히에 선전포고라도 하겠어.”

잔뜩 굳은 그의 표정을 보며 사브르는 자신도 모르게 위축되는 것을 느꼈다. 그의 뒤에서 그만이 피울 수 있는 거대한 불이 일렁거렸고, 사브르는 시선을 떨구며 입을 다물었다.

[다음 편에 계속....]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