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화.
“네가 밀수를? 말도 안 돼. 약초의 밀수를 추적하는 게 너의 일이잖아?”
“지난 7일 동안, 스타람의 물건이 쏟아져 나왔어요. 제 남편이 수사국에 있잖아요? 마력이 없으니 제대로 추적을 할 수도 없고, 아메니티의 거의 모든 사람들이 미친 듯이 구매했어요. 마력이 돌아온다는 왕궁의 발표를 무작정 믿을 수가 없으니 저도 불안해서 어쩔 수 없었죠.”
리젠은 상당히 모범생이었고, 원칙에 반하는 일은 절대 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타람 서적을 샀다는 건, 정말로 아메니티가 혼돈의 도가니였다는 것을 뜻하는 바였다.
“전기? 그 기술을 설명한 책인데 너무 어려워서 이해를 하지는 못했지만…… 여하튼 에너지를 바꾼다는 원리는 동일한 것 같아요. 불을 피우는 것도, 마력을 불 에너지로 바꾸는 거잖아요? 전기 역시 전기 에너지를 불 에너지로 바꾸는 것이라던데요.”
“전기 얘기는 더 이상 하지 않기로 해.”
아셰가 손사래를 치며 고개를 저었다.
“마력이 돌아왔으니 됐어. 난 마법도 잘 못하고, 그런 얘기는 재미도 없고 관심도 없어.”
“어머, 그래도 이젠 아셔야 할 텐데요.”
그녀가 눈을 동그랗게 뜨며 말했다.
“전하께서 산하기관의 기구를 하나 더 늘렸어요. 기술국이라고. 여덟 개의 기관에 또 하나 추가가 된 건 처음이에요.”
“……그래?”
아셰는 차를 마시며 반문했다. 다니엘이 요즘 오지 않더니, 그것 때문에 바빴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었다.
“마력을 대신하는 기술을 연구하고 배포하는 것이 일이라는데…… 반발이 엄청나게 심했지만 밀어붙이셨어요. 이제 마법대학에서 전기공학도 다시 정식 과목으로 들어왔고요.”
“그래? 봉쇄령이 해제될 리가 없는데.”
“음…… 이번 처사는 조금……. 음…… 약간 말 바꾸기 식이기는 한데, 어쩔 수 없다는 건 카이든도 인정하더라고요.”
리젠이 야무지게 대답했다.
“산하기관을 늘린 것이니 제국에서는 관여할 수 없고, 스타람의 전기 기술과는 별개로 독자적인 기술을 개발하는 것이니 스타람에서도 관여할 이유가 없다고요. 하지만…….”
“음.”
“기술국에서는 지금, 밀수된 스타람의 전기용품들을 싹 다 긁어모아서 연구 중이랍니다.”
“베끼는 거구나. 간단하네.”
그녀가 명쾌하게 말했다.
“스타람 쪽에서는 좀 억울하긴 하겠다. 정식 수입을 바랐을 텐데, 비열하게 독자 연구라니. 그것도 밀수품을 대상으로.”
“밀수꾼들을 인정해 준 것은 그동안 정당한 방법으로만 이윤을 추구해 온 상단들에게 큰 타격이 될 거예요. 물론 연구 그 자체도 그다지 떳떳하거나 명예롭지는 않은 일이죠. 연구 윤리에 대한 강령을 외우고 있는 저로서는 별로 마음에 들지 않지만.”
리젠은 어깨를 으쓱했다.
“그래도 현명하고, 국익을 위한 결정이라고 생각해요. 분명 개혁으로 인한 피해자도 있을 테고, 썩 보기 좋은 신념도 없지만 역사는 그런대로 또 흘러가는 법이니……. 저희는 반대했지만, 아메니티 주민들은 전하의 처사에 거의 다 안도하고 있어요. 언제 또 마력이 사라질지 모르니까요.”
“다시…… 사라지지는 않을 거야. 하지만 점차 줄고는 있으니 다니엘이 현명하게 결정하긴 했네. 제국과 스타람 사이에서 나름 성공적으로 줄을 타고 있는 모양이야.”
“이렇게 잘 하실 줄은 몰랐어요. 대학 다닐 때에는, 온화하고 선량하시기만 하신 줄 알았는데 강하고 결단력 있는 면모가 있으시더라고요. 나름대로 희생도 무릅쓰시고요.”
아셰는 그저 조용히 웃었다. 다니엘이 자신의 앞에서 얼마나 약한 모습을 보이는지 안다면 아메탄의 국민들은 모두 기함할 것이다. 사실 다니엘이 그만큼 빠르고 현명한 결정을 내릴 수 있는 데에는 아셰의 역할이 분명히 있었다. 카를 왕처럼 혁명적인 결단을 내리라고 조언한 것은 그녀이니까.
그래도 그녀는 딱히 앞에 나설 생각은 전혀 없었다. 나중에, 아주 혹시나 이단의 말대로 모든 것이 순조롭게 이루어져서 자신과 혼인을 요구하면, 그 때 다니엘이 지금의 유대감을 잊지 않고 자신을 보내 주었으면 했다. 다니엘 역시 자신을 계속 데리고 있으면 윌리엄의 죽음에 대한 책임을 물지 않게 하기 어려울 것이다. 진정으로 다니엘이 자신을 아끼고 있다면, 살게 하기 위해 못 이기는 척 이단에게 보내 주겠지.
“리젠, 미안한데 곧 올리타가 올 거야. 나중에 조금 더 얘기할 수 있을까?”
“아, 그럼요. 저도 사실 일이 바빠서 약제국에 다시 들어가 봐야 했어요.”
리젠이 황급히 찻잔을 치우며 말했다. 올리타는 의료국 소속의 직원으로, 왕족의 건강 상태를 확인하고 검진하는 역할을 하고 있었다. 이제 쉰에 가까워진 올리타는 아셰가 아주 어렸을 때부터 그녀를 담당했으며, 아셰가 별달리 부르지 않아도 두 달에 한 번씩은 정기적으로 그녀를 검진하기 위해 궁에 방문했다.
왕족이라는 이유만으로 받고 있는 특권이 많다. 아셰는 이단을 따라나서지 않은 것에 대해 후회하지 않으려고 애쓰며 머리카락을 정돈했다. 아무리 그녀가 별다르게 애국심이 없어도, ‘가족’이라고 불리는 사람들에 대해서 소속감이 없어도, 친오라비를 독살할 정도로 그녀 자신이 우선이라고 할지라도 ‘왕족의 의무’는 다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다시 생각해 보아도, 한 나라의 왕녀가 아메니티를 혼란에 빠트린 외국인의 손을 잡고 도망가는 것은 기록에 남기기에도 영 민망했다.
리젠이 떠난 지 얼마 되지 않아, 올리타가 헤일리의 안내를 받아 응접실에 들어왔다. 아셰가 실내복으로 갈아입을 동안 올리타는 헤일리에게 이것저것을 물었다.
“식사 목록은?”
“여기 제니가 정리해 두었습니다.”
“단것들이 너무 많고…… 채소가 얼마 없군. 특이 사항은 없었어?”
“네. 어디 아프다고 하신 건 못 들었어요.”
“운동은 얼마나 하시지?”
“전혀 안 하십니다.”
올리타는 세모꼴의 안경을 밀어 올리며 헤일리의 대답을 모두 기록하고, 실내복을 입고 침대에 누운 아셰의 몸을 살피기 시작했다. 그동안 시녀도, 아셰도 언제나 별다른 특이 사항이 없다고 대답해 왔기에 올리타는 아무 생각 없이 그녀의 배를 몇 번 누르고, 근육의 움직임을 확인한 후 무뚝뚝하게 말했다.
“들으셨죠? 채소를 좀 드셔야 합니다.”
“응.”
“물론 여전히 보기 좋으시지만, 체중 증가가 너무 가파릅니다. 이 기세로 증가하다 보면 이상 증세가 올 수 있어요. 단것을 조금 줄이시길 바랍니다.”
“알았어.”
“운동도 조금 하셔야 합니다. 예전에는 체술을 연마하시더니, 왜 전혀 하지 않으시지요?”
“이젠 남들에게 예쁘게 보여야 할 필요가 없으니까.”
“잘못된 생각입니다. 운동은 남에게 보이기 위해 하는 게 아니에요. 건강을 위해 하는 거랍니다. 충치가 있나 보게, 입을 벌려 보세요.”
그녀는 아셰의 입 안을 확인한 후, 미간을 찌푸리며 한숨을 쉬었다.
“충치가 꽤 있는데요. 잇몸도 안 좋고요. 단것을 하도 드셔서 그렇습니다. 약을 드릴 테니 식후에 드세요. 효과는 좋지만 조금 독한 약이라 부작용이 있을 수 있습니다. 몸에 이상이 생기면 바로 헤일리를 의료국에 보내 주세요.”
아셰는 입을 벌린 채 고개를 끄덕였다. 올리타는 산하기관 직원답게 항상 똑같았다. 그녀가 어렸을 때부터 성인이 될 때까지, 여러 연회에서 아름다운 모습으로 누볐을 때부터 윌리엄을 죽여 감금되었을 때까지. 항상 그녀에게 건강에 관해 조언했고 몸에 이상이 생기면 약을 주었다. 올리타는 가방에서 짙은 갈색 약을 꺼내 헤일리에게 건넨 뒤 말했다.
“잠은 잘 주무세요? 계속 수면제를 처방해 드렸는데.”
“조금밖에 안 남았어. 말 나온 김에 더 주고 가.”
대답을 하면서도 아셰는 살짝 민망해서 우물쭈물 말했다. 윌리엄을 죽이고 난 뒤,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을 때 그녀는 악몽에 시달렸었다. 잠이 오지 않는다며 올리타에게 수면제를 받아먹었는데, 자신이 윌리엄을 죽였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 올리타는 얼마나 자신을 끔찍하게 생각했을까. 그러나 겉으로는 전혀 알 수가 없었다. 올리타는 무표정으로 일어선 뒤 다시 한 번 물었다.
“다른 특이 사항은 없으신가요?”
“있을 게 뭐가 있겠어.”
아셰는 하품을 하며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올리타는 목례를 하고 떠났다.
* * *
“죄송합니다, 아버님.”
켄은 민망하다는 듯이 거친 밀빵과 묽은 고기 수프를 내려놓으며 말했다. 백발이 성성한 노인, 에곤은 손사래를 치며 고개를 저었다.
“무슨 소리냐. 노인네에게 이 정도면 사치다. 오히려 숨이 끊어지지 않고 입이나 하나 덜어 주지 못해 내가 미안하구나.”
“무슨 말씀이십니까. 그런 소리 마세요.”
켄이 노인의 손에 스푼을 쥐여 주며 단호하게 말했다. 그들이 살고 있는 작은 성에는 한때 열 명의 하인이 그들의 시중을 들었으나 이제 다섯밖에 남지 않았다. 커다란 창문 밖으로 푸른 풀밭과 빨간 지붕의 풍차가 돌아가고 있는 풍경이 평화롭게 자리 잡고 있었지만, 리스 공국의 작은 영지 캐넌에는 밀빵과 고기 수프도 못 먹는 사람들이 널려 있었다.
“남의 나라 전쟁에 뭐 그리 지원금을 많이 보냈는지……. 가뜩이나 흉년인데 겨울이 걱정이구나.”
“황제가 할당된 지원금을 채우지 못하면 바로 리스 공국을 초토화시켜 버리겠다고 협박하지 않았습니까.”
켄은 한숨을 쉬며 말했다. 황제의 손짓 한 번으로 거대한 산사태가 일어난 반란군들의 기지를 생각하면 두려움에 떠는 것은 당연했다. 게다가 리스 공국은 ‘왕국’이라는 칭호도 감히 쓰지 못할 만큼 국력이 약한 작은 반도 국가였다. 제국의 수도와 가장 가까운 국경에 접하고 있었으니 황제가 두려운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었다. 대륙에서 인구가 가장 적고, 마법이 융성하지 못했으며 거의 대다수의 국민들이 목축업으로 생계를 이어 나가고 있는 리스 공국은 하지만 기후가 온화하고 풍광이 아름다워 나름 평화로운 목가적인 삶을 영위하기엔 나쁘지 않았다.
그러나 내란이 일어나면서, 리스 공국은 황제가 요구한 지원군과 전쟁 자금 때문에 허덕이기 시작했다. 가뜩이나 목축업 기반의 국가인데 흉년까지 들어 국민들도 어려운 실정이었다. 특히나 변두리에 위치한 캐넌 영지는 원래 자급자족 정도는 할 수 있는 곳이었지만 바로 그 이유 때문에 다른 지역보다 높은 비율의 지원금을 차출당해야 했다. 게다가 영주인 에곤은 리스 공국의 군주인 엘더 카세튼 공의 친척이기도 했다. 피가 섞여 있는 군주의 요구에 응답할 의무가 있었다.
그러나 겨울이 오면 굶어 죽어 나갈 것이 뻔한 자신의 영지 사람들을 돌볼 의무도 있었다. 노인은 빵을 뜯다가, 늠름하게 서 있는 청년이자 양아들 켄을 바라보며 물었다.
“식량이 모두 얼마나 남았지?”
[다음 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