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화.
“흐음.”
아셰는 천천히 눈을 깜빡였다.
“그런데…… 대체 왜 이런 상황을 만든 걸까. 아무리 생각해도 이유를 알 수가 없어. 제국에 지원군과 물자를 보낸 아메탄에 대한 복수? 그렇다면 다른 주변 국가들은 왜 그대로 두는데?”
아셰의 질문에 다니엘이 다시 한 번 이를 갈았다.
“지금 가장 신난 건 밀수꾼들이야.”
“……응?”
“스타람 물건들이 미친 듯이 팔리고 있다고 들었어. 어쩐지 이단이 들어온 이후, 스타람 밀수가 극성을 부려서 그 금액이 천문학적으로 늘었다는 보고가 있었어.”
그녀는 깜짝 놀라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러고 보니 약초의 밀수 추적을 담당하는 리젠조차 스타람 풀들이 섞여 들어오고 있다며 그녀에게 선물하기까지 했다. 마력을 품지 못한 풀조차 유통될 정도라면 보통 물건들은 얼마나 밀수가 활발하다는 얘기일까.
“말도 안 돼. 전기를 쓴다고?”
“어차피 우리는 전기를 쓰지 못해서 그 물건들을 제대로 쓸 수조차 없어. 하지만 결국엔 전기를 도입할 수밖에 없을 테고, 그 때가 되면 그 물건들의 가격이 더 오를 것이라는 군중 심리 때문에 부르는 게 값이라더군. 게다가 스타람에서…… 배터리? 뭐 그런 걸 개발 중이라던데, 그것만 있으면 바로 작동을 할 수 있다는 소문이 있어.”
“아…….”
“제국의 봉쇄령은 풀릴 리가 없지. 정식 수입은 당연히 불가능할 테고, 밀수라는 꼬리표를 달고 어마어마한 금액이 스타람으로 들어가고 있어. 젠장, 그게 다 전쟁 자금이지.”
그녀는 깨달은 바가 있어 잠시 멍하니 앉아 있었다.
‘전쟁에는 돈이 필요해.’
제국은 이런저런 약소국에게 지원군과 물자를 제공받는다고 하지만, 반란군의 뒤에는 고작 스타람이 있을 뿐이었다. 그러나 스타람이 아무리 부유하다 해도 작은 섬일 뿐이었고, 당연히 물자는 부족할 수밖에 없었다.
‘아메탄 왕국은 국력은 약하지만 산하기관의 여러 가지 연구 때문에 굉장히 부유한 나라지. 특히나 아메니티에 사는 사람들의 부는 내가 깜짝 놀랄 정도였어.’
아메탄 왕국의 거의 대다수의 부는 아메니티에 몰려 있다. 귀족들과 산하기관 직원들이 터를 잡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 거대한 부에 걸맞은 투자처가 별달리 없어 개인의 현금 보유 물량이 많았다. 그 자금이 그대로 스타람의 전기용품들에 들어가 밀수꾼과 스타람의 배만 불려 주고 있는 것이었다.
“제국의 내란에 어떻게든 피해를 볼 것이라는 건 자명한 일이었잖아.”
그녀는 천천히 다니엘을 위로하며 말했다.
“제국군에 지원군과 물자를 보냈듯이, 또 그만큼 반란군에게도 들어갔을 뿐이라고. 그냥 그렇게 생각해.”
“……지금 아메니티는 엄청난 혼란이야. 사람들이 미친 듯이 밀수꾼들을 불러 스타람의 물건들을 사고, 제대로 된 생활조차 안 되어 산하기관조차 마비됐어.”
“오래 가지 않을 거야.”
그녀가 피곤한 다니엘의 손을 잡아 주며 상냥하게 말했다.
“르엘라가 예전에 말해 줬어. 그 누구도 이제는 스타람에게 그랬듯 영원히 마력을 뺏을 수 없대. 고작 며칠간이래. 이 며칠만 지나면 돌아올 거야. 르엘라 말이니 믿어도 돼.”
‘나와 둘 중에 선택을 하라면, 네 오라비를 선택하겠지?’
아셰는 그가 결국에 그녀에게 이런 것들을 말하지 않고 떠난 것을 이해할 수 있었다. 그러나 마음이 가라앉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곧 돌아올 거라고, 왕궁의 모두가 방법을 강구 중이라고 벌써 몇 번이나 발표했어. 하지만 국민들은 믿지 않아. 마력이 이렇게 완벽히 사라진 건 처음이잖아. 날이 지날수록 불안감은 더해 가고, 스타람 물건들은 부르는 게 값이 되고 있지.”
다니엘은 불안하게 한숨을 쉬었다.
“국민들을 불편하게 하면 안 돼. 무작정 왕을 따르는 시대가 아니야. 제국에 반란이 일어났다면 우리는 왜 안 되겠어? 내가 무능하다 판단되면 바로 폭동이 일어날지도 몰라. 빠르게 대처해야 해. 하지만 이런 전례가 없어서 어떻게 해야 할지 알 수가 없어. 내 책임이잖아. 결국 내가 그를 왕궁에 들였어.”
“진정해, 다니엘.”
그녀 앞에서는 이토록 불안한 마음을 토로하지만, 그는 대외적으로 상당히 침착하고 신중하게 움직이는 사람이었다. 온화하고 평온하며 그러면서도 맺고 끊는 것이 분명한 왕. 그가 흔들리면 국가가 흔들린다. 그는 남 앞에서는 절대 흔들리지 않는 모습을 보여 주면서도, 궁에 갇혀 죽을 날만을 기다리는 그의 이복 여동생에게는 속내를 모두 털어놓았다.
“비열한 건 그들이야. 그들이 작정하고 속인 거야. 그땐 그 결정이 최선이었어. 스타람은 능력이 출중할지 몰라도 국익 앞에서 음흉하고 비열해. 오빠가 너무 온화하고, 인간적이었던 것뿐이야.”
아셰는 침착하게 그를 달래 주었다. 그러면서 이단이 했던 말들을 복기하고 있었다. 엔리히 황족의 정당성은 힘에서 온다고……. 그렇다면 아메탄 왕족의 정당성은? 어린 시절 제왕 교육에서 배웠다. 누구보다도 많은 지식을 가지고 넓은 시야로 현명하게 국가를 이끄는 것. 그녀의 말이 이어졌다.
“영원한 동맹도, 영원한 적도 없는 법이지. 우리도 국익을 위해 조금 비열해지면 돼. 이 혼란을 슬기롭게 넘기면 제국의 드넓은 땅에 공화정이 들어서도 오빠의 왕권은 탄탄할 거야. 다른 사람은 할 수 없는 압도적인 현명한 결정을 내려 줘. 마치 카를 왕의 개혁처럼.”
그녀는 산하기관을 개혁하고 파격적으로 평민의 신분 상승 기회를 도입한 카를 왕의 전례를 들며 차분히 말했다. 제왕 교육에서 끝도 한도 없이 공부하는 역사였다. 대륙 변방의 약소국에서, 결국 부를 이룰 수 있는 것은 인적 자원뿐이라는 것을 간파한 카를 왕은 당시 귀족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산하기관의 개혁을 단행했다. 제국에는 없는 별도 기관에 권력을 준 셈이라 귀족들은 한때 반란까지 도모했다. 천한 평민에게 능력만 된다면 합당한 지위를 준다는 발상은 그들의 권위를 위협하는 일이었고, 제국의 가치관을 뒤엎는 근본 없는 행위였다.
그러나 그 산하기관은 결국 역사를 거듭하여 아메탄 왕국에 평화와 부를 가져다주었다. 스타람이 그 부를 먹잇감으로 삼아 황자를 직접 보낼 정도로.
“위기를 기회로 만들어 봐, 다니엘. 왕만이 할 수 있는 커다란 개혁을 한번 해 보는 건 어때?”
“……카를 왕처럼.”
다니엘은 곰곰이 생각하며 중얼거렸다. 그가 천천히 일어섰다.
“고마워, 아셰.”
그가 자신과 똑같은 금발 머리를 쓰다듬으며 살짝 웃었다.
“뭘 해야 할지 알 것 같아.”
“……응?”
“카를 왕처럼, 이제는 혁신을 해야 할 때가 됐어. 국익을 위해 조금 비열해지면 돼.”
다니엘의 푸른 눈에 초점이 돌아왔다. 그는 온화한 미소로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아셰, 너는 그저 내 말을 들어 줄 뿐이지만…… 때때로 누구보다도 내게 필요한 사람이야.”
그는 그녀의 구불구불한 긴 금발 머리에 입을 맞췄다. 그녀는 동갑내기 오라버니를 보며 뿌듯하게 웃었다. 어떻게든 살겠다는 의지는 없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굳이 죽고 싶지도 않았다. 어쩌면 오늘 일로 다니엘이 4년 반 이후에 조금의 자비를 베풀어 주지는 않을까……. 윌리엄을 죽인 것을 잊지는 않겠지만, 그래도 자신에게 필요한 사람이라고 생각해 주지 않을까……. 먼 땅으로 떠난 이단만을 믿고 기다리기엔 그녀는 그만한 순정이 없었다.
핏빛 머리의 그 남자를 사랑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그와 몸을 섞을 때면 이대로 시간이 멈췄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곤 했다. 함께 떠나자고 할 때에는 진심으로 고마웠고, 아직도 눈을 감으면 그의 짙은 눈썹과 자신감에 찬 번득이는 눈매가 선했다.
그는 자신이 떠나고 나면 다니엘이 분노에 휩싸일 것을 바보가 아닌 이상 쉽게 예상했을 것이다. 대체 그녀와의 결혼을 요구하겠다고 할 정도면 어느 정도의 위험 부담까지 계산하고 있는 걸까. 그리고 그런 협상을 걸 생각을 할 정도로 그녀를 사랑하는 걸까. 물론 자신도 만일 그런 날이 오면, 아셰는 그에게 보내 달라고 다니엘에게 부탁할 마음을 먹고 있을 정도로 그를 사랑하긴 했다. 그녀가 인생을 살면서 유일하게 가슴이 떨렸던 남자였으니까.
하지만 애초부터 그녀는 그를 구원이라고 생각하지 않았고, 희망을 가지기엔 상황이 너무 좋지 않았다. 그녀가 사랑에 큰 의미를 부여하는 여자였다면 애초에 그가 함께 떠나자고 했을 때 따라나섰을 것이다. 하지만 그녀는 아주 어렸을 때부터 그런 감정들이 자신의 인생에 큰 영향을 끼칠 것이라고는 단 한 번도 생각하지 않았다.
반란군과 합세하여 이제 대대적인 전쟁을 시작하려고 하는 그 남자를 애써 마음속에서 지우며, 그녀는 또다시 홀로 남았다. 다니엘이 떠나고 난 궁 안에서, 그녀는 한동안 창밖을 바라보았다. 불빛이 없는 아메탄 왕궁의 검은 밤은 칠흑처럼 내려 앉아 있었다. 별빛은 더욱더 밝게 빛나고, 아셰는 한참 동안이나 학자자리의 여덟 개 별을 바라보았다.
마력은 정확히 7일 만에 돌아왔다. 정상적으로 작동하기 시작하는 마법구를 보며 아셰마저도 안도의 한숨을 쉬었으니 아메니티 전역에 퍼진 안도감은 어떻게 표현할 수조차 없을 것이다. 하지만 다시 돌아올 수 없는 것들도 있었다. 리젠은 마력으로 최적의 조건을 설정하여 기르고 있던 희귀 약초들이 모두 죽었다며 어깨가 축 늘어져서 왔다.
“왕녀님, 7일 동안 아메니티는 난리도 아니었어요. 저희가 이렇게 마법에 의존하며 살았나 싶을 정도로 무서운 하루 하루였지요.”
그녀가 생각만 해도 끔찍하다는 듯이 몸을 떨었다.
“마력이 점차 사라지고 있다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지만, 조금 경각심을 가지긴 해야 할 것 같아요. 저희는 끓는 물에 들어간 개구리처럼 서서히 죽어 가고 있었던 거예요. 마력이 없으면 마법 아이템을 사는, 그런 임시방편으로 계속해서 삶을 유지해 온 거죠. 하지만 이젠 정말로 심각하게 고민할 때가 되었어요.”
“그건 그렇지.”
아셰는 차를 마시며 고개를 끄덕였다. 찻주전자를 드디어 데울 수 있어서 오랜만에 마시는 차였다. 촛불로 찻주전자의 물을 끓이기엔 너무 번거로웠던 것이다.
“그래서 저도…… 사실 몰래 스타람의 서적을 하나 샀어요. 값은 어마어마했지만.”
“뭐?”
아셰의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다음 편에 계속....]